"이 오페라에서 중요도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슈이스키가 1위, 피멘이 2위이며 보리스는 3위에 불과하다."

판본: 1869년 판본에 여관 주인 노래, 2막 크렘린 장면 초반 유모와 표도르의 노래가 추가됐다. 거의 1872년 장면에서 


리세우 대극장 답게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마티 살미넨Matti Salminen이 보리스를 맡았고 에릭 하프바슨Eric Halfvarson이 피멘을 맡았다. 덕분에 무소륵스키 장인가수 아나톨리 코체르가Anatoli Kotcherga가 바를람으로 밀렸다. 아바도 음반에서 보리스 부르시던 분이 어쩌다가 술집에서 노래나 부르는 역할까지ㅠㅠ


하지만 가장 압권은 슈이스키역의 필립 랑그리지Philip Langridge다. 2010년에 타계하여 이미 고인이 된 가수인데, 폭넓은 레퍼토리로 다양한 음반을 남겼다. 아바도 음반에서도 슈이스키를 맡았었다.


랑그리지의 슈이스키는 극중에서 존재감이 폭발한다. 원래 푸쉬킨의 원작도 슈이스키가 '보리스 하는 짓 맘에 안들면 내가 황제해먹어야지'라는 걸로 시작한다. 


랑그리지의 활약을 캡처로 알아보자. 


아 어딜 만지세요.

디테일이 살아있는 게, 보리스는 사실 평민 출신이고 슈이스키는 뼈대있는 가문이다. 옷 터는 저 동작에서 슈이스키의 기품과 오만이 느껴졌다.

 

'어우 제가 걱정하는 건 (x발 니놈한테) 고문당하는 게 아니라, (웃음) 폐하가 불펴편하실 까봐죠 ^^'

저 한문장 사이에서 완벽한 표정과 목소리의 변화를 보여준다. 


드미트리 죽은 건 제가 잘 확인했답니다.

히익 왕관이다 왕관!



괜찮아요? 어디 다친데 없어요?


파이셀 닮은 피멘을 데려와서 보리스에게 드미트리 이야기를 읊게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실까~

헤헤헤헤 작전대로다

크크크ㅡㄱ크그큭킄 씐난다


피멘님 살펴 가세요~



영국인들 DNA에는 셰익스피어가 자체 내장인가, 종특으로 연기 가중치가 있나. 로버트 로이드도 그렇고 필립 랑그리지도 그렇고 이 러시아 오페라를 잘근잘근 씹어드신다. 분명히 슈이스키의 분량은 그대로인데 가수 혼자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아리아 대신 대사를 전달하는 게 대부분인 슈이스키 같은 역할에서 연기력은 곧 노래의 표현력과 동치다. 슈이스키의 노래가 이렇게 다채로운 표현을 가지고 있는지 랑그리지를 보면서 깨달았다.


피멘 역의 에릭 하프바슨은 바그너 가수로 유명하다. 파파노 지휘 돈 카를로에서는 대심문관으로 나오기도 했다. 피멘 역할이 기본적으로 바그너의 베이스와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몇번 이야기했었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아주 깊은 울림으로 진중한 노래를 들려준다. 지루해질 수 있는 노래를 긴장감을 놓지 않는 프레이징으로 끌고 나간다.  사소한 거지만 수염 분장도 지금까지 본 다른 피멘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워 몰입도 잘됐다.


오히려 살미넨은 기대했던 것에 비해 실망이었다. 내가 워낙 살미넨을 좋아해서 기대가 높은 것도 있지만, 하겐이나 훈딩에서 보여주던 그 무지막지한 모습이 별로 없다. 첫 대관식 아리아에서부터 고음이 불안하고 건조한 음색이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물론 저 거칠고 야수같은 음색이 살미넨의 매력이지만, 생각보다 보리스와 잘 안 어울리더라. 여기에 여우같은 랑그리지 슈이스키를 만나고 보니 영락없이 당하기만 하는 곰이 되어버린다. 


코체르가는 바를람에서 훌륭한 개그 연기를 선보인다. 


그 외에 표도르 역에 일본계 미국인 카운터테너 브라이언 아사와Brian Asawa가 캐스팅된 점이 독특하다. 아주 매력적인 음색에 자연스러운 노래를 들려주고 연기도 아주 좋아서 그 동안 들은 표도르 중 가장 좋았다. 찾아보니 작년에 4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사인은 심장마비. 낯이 익은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그랑 마카브르에서 왕자 역할을 맡은 가수였다.


제바스티안 바이글레Sebastian Weigle는 꽤나 명망있는 독일 오페라 지휘자이지만 이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조금 실망스럽다. 일단 오케스트라 녹음 상태가 연도에 비해 많이 구리고, 리세우 대극장의 오케는 캐스팅의 네임 밸류에 한참 못 미쳐 삑사리도 종종 들린다. 프롤로그 들으면서 반주가 실망스러워 멈추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빌리 데커Willy Decker는 그 유명한 라 트라비아타 하나로 평생 연금을 확보해 놓은 연출가다. 오페라 시작부터 드미트리 살해를 직접 보여주고, 대관식 장면에서도 대놓고 드미트리의 유령이 직접 왕관을 씌워준다. 권력을 상징하는 커다란 황금 의자가 중요하게 쓰인다. 왕좌 처럼 생기지 않고 너무 평범하게 생겼는데 크기만 키워놓은 의자라 권력이 본질 적으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보여주는 듯 하다.

시종일관 드미트리의 초상화가 등장하며 러시아 민중들이 구세주 드미트리의 귀환을 얼마나 염원하는지 계속 표현한다.

크렘린 장면에서 드미트리의 환영을 보는 장면이 정말 섬뜩하게 표현된다. 



죽기 전에 넋이 나간 보리스의 모습.

마지막에 합창단이 등장하는 장면까지도 보리스에게 빅엿을 먹이는 장면으로 바뀐다.


반주가 구리지만 연출이 현대적이면서도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어 볼만하다. 무엇보다 랑그리지의 슈이스키는 한 가수가 어떻게 역할을 살려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슈이스키 나오는 장면만이라도 꼭 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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