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셴바흐의 지휘는 꽝, 베흐톨프의 연출은 모범적.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작. 국립국어원 이탈리아어 표기법에서 s는 항상 ㅅ으로 표기한다. 그래서 보통 '리조또'라고 발음하지만 표준표기는 리소토다. 마찬가지로 così도 코시라고 쓰는 게 맞는데, 실제 발음이 IPA로 kozi 니 대부분 <코지 판 투테>라고 쓴다. 이게 특히 차이가 나는 게 한글 '시'의 발음이 구개음화로 ɕ로 바뀌어 발음되기 때문에 코시라고 쓰면 발음이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 이 작품은 다른 다 폰테 삼부작인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에 비해 지명도가 많이 떨어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다른 두 작품은 모두 사전에 올라가있다). 그러니까 난 발음과 비슷하게 코지라고 쓰겠다. 나도 참 원칙 없는 사람이다.


피가로의 결혼이 오페라 부파의 전형을 보여주고, 돈 조반니는 특유의 무게감 때문에 특별한 반열에 오른 작품이라면 코지는 이론상 대작이라고 해야할까. 다폰테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미 불멸의 걸작으로 남은 두 작품을 완성한 콤비가 원작 없이 자기들 하고 싶은 이야기로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망작이 나올 수 있겠냐 이 말이다. 


코지가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굉장히 '이론적'이라는 점이다. 코지를 보고 있으면 정말 수학적으로 잘 계산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 셋 여자 셋, 정확히 성비 50%로 대칭적이다. 아리아의 배분도 두 쌍의 커플이 똑같이 가져간다. 여기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중창의 비율,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성격이 극이 한참이 진행되고 나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도 실험적이다. 작품의 이야기 자체도 이론적이지 않는가. 돈 알폰소는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오페라의 내용이다. 피결이나 돈조와 달리 이 작품이 어떻게 끝날지는 시작부터 명약관화한 일이다. 알폰소의 사회적 실험 안에서 페란도와 굴리엘모, 그리고 피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가 마치 크로마토그래피처럼 분리된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피결과 돈조와 달리 인공적인 냄새가 더 많이 느껴진다. 알폰소는 연애관계의 바깥에 위치한 인물이지만 이 모든 것을 조종한다. 피가로와 돈 조반니가 극 안에서 자기자신을 담보로 종횡무진하는 동안 알폰소는 그저 페란도와 굴리엘모를 조종할 뿐이다. 외부인이 한발짝 뒤에서 사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 다 폰테가 원작 없이 스스로 코지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처럼, 극 중 알폰소도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을 일어나게 만든다. 


베흐톨프는 부클릿에서 돈 알폰소는 다 폰테 본인처럼 계몽주의의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알폰소가 보기에 사랑이라는 것, 혹은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은 환상이며 일종의 정신적 질병이다. 그는 페란도와 굴리엘모를 계몽시키고 싶어한다. 자신의 실험을 통해 그들이 사랑의 진실을 바라보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길 기원한다.


여기서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갈릴 수 있다. 알폰소의 실험은 성공했는가? '여성의 지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과연 페란도와 굴리엘모가 그의 뜻대로 계몽되었는가? 그의 실험을 통해서 두 커플이 더욱 견고한 사랑을 하게 되었는가? 아니다. 알폰소의 실험을 통해 두 커플은 마치 스튁스 강을 건넌 것 처럼 더 이상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인 감상일 것이다. 


베흐톨프는 여기서 한번 더 나아간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알폰소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했다. 왜냐면 이 실험을 통해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폰소의 실험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피오르딜리지가 자신의 '옳은 짝'인 페란도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나도 이웃 블로거님의 글을 읽다가 안 사실인데, 2막에 피오르딜리지가 마음을 가다듬겠다며 군복을 입는데 굴리엘모 것이 아닌 페란도 것이 자신에게 더 맞는다고 페란도의 군복을 입는다. 대충 구글링해보니 코지 관련된 학술 서적들에서는 다들 언급하는 부분인 것 같더라. 자신을 숨기고 허장성세를 펼치려는 순간 자신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셈이다. 피날레에서 원래의 커플로 돌아가지 않고 피오르딜리지와 페란도가 이어지는 연출이 최근 많은 것은 이런 디테일에서부터 비롯된다.


베흐톨프의 무대에서는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극단적인 변화를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련되게,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무대에 예쁘게 놓여있는 나무 화분들은 내가 언급한 코지의 '인공적'인 느낌과 닿아있다. 서곡에서부터 남자들이 목욕하는 여성들을 몰래 훔쳐본다. 이 작품에는 몰래카메라의 관음증 같은 면모가 다분히 많다. 베흐톨프는 두 여자의 반응을 끊임없이 훔쳐보는 남자들을 부각시킨다.

전반적으로 연기가 자연스럽고 과도한 해석이 없다는 점에서 입문자에게 무난한 연출이라고 평하고 싶다. 노래 동선을 단조롭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은 베흐톨프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근데 잘츠부르크에서 이건 좀 너무 심심하지 않나요. 뭐 이상한 거 많이했으니까 팬서비스 차원에서 한번 전통 회귀 해주겠다는 건가.


가수들이 모두 무난하지만 에셴바흐의 지휘가 정말 지루하고 생기없어서 가수들의 노래까지 죽는다. 서곡 듣고 1막 앞 부분 듣고나서 끄고 싶었다. 듣고 있으면 음악이 너무 생동감 없어 답답할 지경이다. 마치 페달포인트를 밟는 것 처럼 늘어지기만 하는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끔찍한 수준이다.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음악을 해부하고 있는 느낌이다. 단순히 템포의 문제만도 아니고 다이나믹 변화가 없다. 느리더라도 아름다운 프레이징으로 선율이 부풀어 오르면 음악이 살아나고 움직이는 느낌이 나는데 에셴바흐의 지휘는 아무 느낌 없이 그저 박자만 맞춰 흘러갈 뿐이다. 다 듣고나면 몸 속에 쌓인 답답한 응어리를 쿠렌치스 음반을 들으면서 빼줘야한다. 

이름을 아는 가수는 루카 피사로니와 제랄드 핀리 둘 뿐이었는데, 전반적으로 6명의 가수가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고 저 둘이 낯익음 버프 때문에 좀 더 괜찮게 들리더라. 여자 가수 중에는 데스피나 역할의 마르티나 얀코바Martina Janková의 목소리가 가장 모차르트에 적합하여 인상적이었다. 피오르딜리지 역을 맡은 말린 하르텔리우스Malin Hartelius역은 너무 날카로운 피오르딜리지라 취향에 안맞았고 도라벨라 역을 맡은 마리클로드 샤퓌Marie-Claude Chappuis의 노래는 가볍고 쾌활한 매력이 잘 살아있었다. 


요약: 에셴바흐의 구린 지휘를 감당할 수 있으면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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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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