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니케의 품격.


헤르베르트 베르니케Herbert Wernicke는 20세기 독일 오페라를 대표하는 연출가 중 한 명이다.2010년 공연 당시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엘렉트라 프로덕션을 바덴바덴 축전극장에서 베티나 괴슐Bettina Göschl의 재연출로 상연하였다.

베르니케는 무대와 의상 까지 모두 디자인하였고, 이를 토대로 바덴바덴 제작팀이 베르니케의 프로덕션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베르니케는 무대를 대담하게 분할해냈다. 무대 대부분의 공간을 검은 벽으로 막아버리고, 엘렉트라에게는 아주 조금의 공간만 남겨둔 것이다. 검은 벽은 사선을 축으로 하여 회전한다. 이 때 그 틈사이로 보이는 빛의 기하학적 형태의 변화는 상당히 세련되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특히 이 클로즈업 샷에서 검은색과 빨간색의 대비가 너무 강렬하여 마치 컴퓨터로 이미지 작업을 한것과 같은 착각을 준다. 저 검은 벽이 흡사 흑체라도 되는 것 같은 포스를 자랑한다.

클리템네스트라가 들어오는 장면에 문이 완전히 열린다. 


이 프로덕션이 1997년에 초연되었음에도 이런 기하학적 디자인과 강렬한 색채 대비 덕에 여전히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인물에 대한 묘사 역시 간결하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트는 복수를 상징하는 검은색, 크리소스테미스(와 아에기스) 순진한 삶?을 상징하는 하얀색, 클리템네스트라는 붉은색으로 묘사된다. 엘렉트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위치에서 노래한다. 오직 하나의 목표와 집념으로만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춤을 추다 죽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결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과 이어져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엘렉트라는 극 내내 저 도끼를 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제한된 동선 안에서도 캐릭터 표현이 훌륭하다. 


엘렉트라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은 엘렉트라가 저 도끼를 오레스트에게 건내주지 못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엘렉트라는 복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사실 조력자 정도도 되지 못 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복수극의 플롯으로만 생각하면 이 점은 어느 정도 '김 빠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호프만스탈이 어째서 이렇게 썼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베르니케는 이 부분에서 엘렉트라 역시 도끼를 힘껏 내리찍는 것으로 엘렉트라를 복수의 행위에 상징적으로 가담시킨다.


포다의 연출과 비교했을 때, 베르니케 역시 여러 종류의 상징을 사용한다. 내가 왜 베르니케의 연출은 괜찮게 봤을까 생각했는데, 일단 상징이 매우 직관적이고 일관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또한 무대를 좁게 만들고 배경 없이 오직 인물만 남겨놓아 사람의 표정을 더 부각시킨 것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베르니케가 연기 지도를 맡은 건 아니라는 점이 많이 아쉽다. 가수들이 그럭저럭 잘 해주고 있지만 결국 남는 게 연기 뿐인 무대에서 재연출로는 베르니케의 연출적 능력을 온전히 평가하긴 힘들어보인다. 


음악적으로도 완성도 높다. 린다 왓슨Linda Watson과 알베르트 도멘Albert Dohmen은 틸레만의 바이로이트 발퀴레에서 썩 좋아하지 않았던 가수인데, 이 곳에선 상당히 훌륭한 노래를 들려준다. 린다 왓슨은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안정감 있는 목소리를 가졌고 비브라토의 사용이나 프레이징 역시 안정적이다. 도멘은 보탄을 부를 때는 너무 단조로워 지루한 편이지만 음침한 오레스트를 부르는 것은 훨씬 괜찮았다. 클리소스테미스를 맡은 마누엘라 울Manuela Uhl은 엘렉트라와 대비되는 생기넘치는 노래를 들려준다. 클리템네스트라 역을 맡은 미국 출신 메조 소프라노 제인 헨셸Jane Henschel은 일단 목소리보다 외모가 너무 인상적이다. 처음에 보고 무슨 특수 분장이라도 한 줄 알았다.

가사 표현력도 상당히 좋아서 집중이 잘 되었다. 독일어 발음도 명확해서 미국인인지 모르고 야네 헨셸이라고 읽을 뻔 했다.

아에기스 역으로는 카메오 마냥 르네 콜로가 나온다. 전성기가 한참 지나 너무 나이든 목소리이지만 찌질한 아에기스를 표현하는 데는 적당해보였다.


틸레만의 지휘는 보통 큰 호불호를 낳지만 요즘 들어 안티 틸레만인 나 역시 그의 음악에 설득될 때가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오케스트라를 휘어잡는 걸 넘어 극 전체를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벌써 7년 전으로 반주 역시 뮌헨 필이 맡았다. 바덴바덴에서 자주 지휘하던 틸레만이 드레스덴을 맡으면서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를 먹고, 반대로 잘츠 부활절의 상주 오케스트라였던 베를린 필과 래틀이 바덴바덴으로 옮긴 게 재밌다. 틸레만의 지휘에서 먼저 느껴지는 건 뛰어난 앙상블과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색채감을 잘 살려냈다는 점이다. 내가 아직 엘렉트라의 음악에 완전히 익숙치 않아서인지, 틸레만 특유의 변태같은 진행은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았다.


녹음에서 가수들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게 잡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점은 아쉽다.

가수들이 모두 자기 파트를 무난하게 소화해내고 틸레만의 반주 역시 훌륭히 세공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한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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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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