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이 엄청 많은 주였지만 정작 오페라는 두 시간 짜리 딱 한편 밖에 못 봤고, 그나마도 3일 동안 나눠서 봤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나서야 쓰는 리뷰.


작품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 러시아어일 것 같지만 원래 프랑스어 작품이다. 투란도트의 원작자로 유명한 카를로 고치의 원작을 바탕으로 프로코피예프가 직접 리브레토 작업을 했다.

기본적으로 동화 오페라이지만 골때리는 부분이 있다. 청중이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 마냥 등장하며 작품에 개입한다. 처음 프롤로그부터 이 청중들은 서로 비극이 좋네 희극이 좋네 멜로가 좋네 익살극이 좋네 싸우고 있다. 이 모든 걸 합친 게 바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는 그냥 구경만 하는 것 같다가 아예 극의 사건에 개입한다. 

청중이 어떻게 개입하는지,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클럽의 왕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 왕자는 심기증 때문에 그냥 죽어가고 있다. 해결책은 왕자를 웃게하는 것. 왕은 광대 트루팔디노를 시켜서 왕자를 웃겨보려 한다. 왕자가 죽어가길 바라는 사람으론 왕의 조카딸 클라리스와 그의 약혼남이자 수상인 레안드로가 있다. 레안드로를 지지하는 마녀 파타 모르가나와 왕을 지지하는 첼리오가 카드게임을 하는데 모르가나가 이긴다. 모르가나는 자신이 있는 한 왕자가 웃을 일은 절대 없다고 호언장담한다. 패기넘치게 왕자를 위한 연회에 찾아온 모르가나. 그런데 그 동안 안 웃던 왕자가 모르가나를 보더니 바로 폭소를 터뜨린다. 모르가나는 졸지에 팀킬러가 되고 빡쳐서 왕자를 저주한다.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 빠지도록 말이다. 왕자는 트루팔디노와 함께 이 오렌지를 찾아 나선다. 첼리오의 도움으로 왕자는 오렌지를 얻는다. 오렌지를 가지고 돌아가는데 오렌지가 점점 거대해진다.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지친 왕자는 잠에 빠진다. 첼리오는 오렌지를 꼭 물가에서만 열어봐야한다고 경고했지만 목마른 트루팔디노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오렌지를 열어본다. 오렌지에선 갑자기 공주가 튀어나온다. 튀어나오자 마자 목 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한다. 당황한 트루팔디노는 혹시나 물이 있지 않을까 다른 오렌지를 또 열어본다. 거기서도 목마른 공주가 튀어나온다. 결국 두 공주 모두 죽는다. 당황한 트루팔디노는 도망. 깨어난 왕자 역시 목 마르다고 또 오렌지를 열어봄. 거기서도 공주가 튀어나고 왕자와 공주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공주 역시 갈증에 죽어가고 있다. 여긴 사막 한 가운데, 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이 때, 보다 못한 청중(합창단)이 물을 가져다 준다. 이걸로 공주는 살아난다. 왕자는 공주와 결혼하려고 혼자 부리나케 왕에게 달려간다. 왕자가 왕을 데리고 오는 와중에 모르가나가 홀로 남은 공주를 쥐로 변신시켜버린다. 왕과 왕자가 돌아와보니 공주 대신 모르가나의 하녀가 공주 행세를 하고 있다. 왕은 왕자가 약속을 지켜야한다며 그 하녀와 결혼시키려 한다.

여기서 또 보다가 빡친 청중이 모르가나를 제압해버리고 첼리오한테 얼른 공주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결혼식이 거행되려는 순간 첼리오의 도움 덕택에 공주가 원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고 해피 엔딩을 맞는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청중들을 Ridicules(Crank)라고 표기했다. 음 연극 보면서 주인공이 무대 위에서 목말라 죽어갈 때 답답하다고 물 던져주면 좀 이상한 놈이 맞긴 하지. 오페라를 보는 청중들을 보는 오페라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살짝 메타적이다. 이런 부분은 고치의 원착에는 없던 내용이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 하듯 이 작품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레안드로와 클라리스가 꾸미는 음모는 진지한 정치극 같은 면모가 있고 왕자와 공주의 사랑은 로맨틱 하다. 왕자의 여정은 동화적이고 우스운 장면도 많다. 이러한 다양한 색채의 이야기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과 굉장히 잘 맞물린다.

이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독특하고 변태적인 구석이 있다. 시니컬하고 비꼬거나 비웃는 듯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 많다. 뭐라고 분류해야할 지 모르겠는 야릇한 순간들이 있다. 이 오페라에서 발췌로 가장 자주 연주되는 행진곡 역시 그 시니컬함니 특징이다.

이런 특성이 오페라의 리브레토와 결합하니 음악이 훨씬 더 또렷한 인상을 준다. 프로콥을 들으면서 항상 들었던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곡을 썼을까'가 오페라 안에서는 간명하게 드러난다. 첼리오의 음악, 첼리오와 모르가나가 카드를 치는 장면, 왕자가 모르가나를 보고 웃는 장면, 거인 요리사에게서 오렌지를 훔쳐내는 장면 등 각각의 상황이 생동감 있는 음악으로 묘사된다.


로랑 펠리는 이런 유쾌한 작품에 딱 맞는 연출가다. 거대한 플레잉 카드로 전반적인 무대를 꾸몄다.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솜씨 역시 탁월하다. 첼리오가 혼자 등장하는 장면의 전주곡을 첼리오가 직접 지휘하게 만든다. 마지막에 클라리스와 레안드로가 도망치는 일련의 동선은 너무 정신없지 않게 담백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지휘는 서울시향에도 몇번 객원으로 왔던 스테판 데네브가 맡았다.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음색이나 합주력이 살짝 빈틈을 보여주는 곳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 가수진은 첼리오 역의 윌라드 화이트Willard White를 빼면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작 화이트가 딱히 빼어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왕자 역의 마샬 드퐁테느Martial Defontaine와 트루팔디노 역의 세르게이 호모프Serghei Khomov가 노래나 연기가 모두 인상적이었다.


부클릿엔 프로코피예프의 일기가 담겨있다.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초연했는데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했다. 연출가도 개판이라 자기가 직접 많이 뛰어들 수 밖에 없다고 회고한다. 합창단한테 짧은 영어로 이것저것 지시하니까 한 단원이 '여기 어차피 러시아계 유대인이 절반인데 왜 힘들게 영어로 말하시냐'고 했단다.

20분 정도의 부가 영상이 들어가 있다. 이 작품을 러시아어가 아닌 불어여야 하는 이유, 펠리가 자기 연출은 모두 음악에서 나온거라고 하는 이야기, 연출 몇가지 설명 등이 나온다

올해 대관령음악제에서 마린스키 극장 오케와 아티스트들이 와서 공연하는데, 마린스키에서는 러시아어로 공연하니 아마 대관령에서도 원전인 불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공연할 듯 하다. 티켓 오픈을 찾아보니 마침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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