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하임 연출 보려고 오페라 봅니다.



오페라 보면서 기대될 때

1. 카우프만 노래하는 공연 볼 때

2. 쿠렌치스 지휘하는 공연 볼 때

3. 헤어하임 연출하는 공연 볼 때

언젠가 우주의 기운이 모이면 셋을 한번에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헛된 꿈을 꿔본다. 아직까진 셋 중 둘이라도 겹친 적도 없다. 솔직히 셋 중 하나만 만족해도 이미 천재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데 이게 겹치기 시작하면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쿨타임이 지났으니까 헤어하임 찬양을 한번 써야지. 당연히 정식 영상물이 나오겠지 하고 아껴뒀지만 안 나오더라. 오페라플랫폼에서 다시보기 기간은 지났지만 유튜브에 영어자막을 입힌 영상이 남아있다. 

헤어하임의 신작을 보는 건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을 보는 기분과 비슷하다. 또 어떤 이야기로 관객들의 머리 속을 헤집으며 뒤통수를 때려줄까. 그냥 다른 오페라를 보는 것과는 공연의 장르가 다르다. 헤어하임-오페라를 즐기기 위해서는 원작 오페라를 잘 이해해야한다. 스페이드의 여왕을 봐야겠다고 처음 마음 먹었던 것도 헤어하임이 연출한 이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헤어하임이 연출한 <스페이드의 여왕>은 이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에 대한 메타적 작품이다. 그는 언제나 전통적 설정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콜레라에 걸려죽게 만든 물잔이 등장하며 폰 메크 부인의 초상화가 나온다. 무엇보다 차이콥스키 본인이 등장한다.

헤어하임의 설정은 역시 도발적이다. 전주곡이 나오기 전, 차이콥스키가 한 남자에게 펠라치오를 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자는 돈을 받고 차이콥을 비웃으며 방에서 나간다. 

오페라가 시작하고 나서야 그 남자는 작품의 주인공인 게르만이며, 차이콥스키로 보이는 인물은 오페라에서 게르만의 연적인 옐리츠키 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연스럽게 옐리츠키의 약혼녀이자 히로인인 리자는 차이콥스키를 짝사랑하며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여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같은 존재가 된다. 돈의 비밀(도박을 이기는 필승의 세 카드)을 쥐고 있는 여백작은 차이콥스키의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이 된다.

리자와 옐리츠키의 결혼은 애초에 거짓된 것이라는 걸 더 이상 부연 설명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차이콥스키는 리자에게 게르만의 마음을 받아주도록 종용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약혼녀와 이어지게 만드는 상황이라니. 차이콥스키는 괴로워하면서도 이 방법 밖에 없다는 표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아이러니안에서 차이콥스키는 피아노 앞에 앉아 음악을 연주한다. 그 순간 관객은 지금 듣고 있는 차이콥스키의 황홀한 음악이 작곡가의 개인적 괴로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게르만이 여백작을 죽이는 것은, 차이콥스키로부터 폰 메크를 뺏어가는 것과 같다. 리자가 3막에서 배신 당했다고 오열할 때, 헤어하임은 아리아를 교묘히 분할한다. 원작에서 게르만이 약속시간에 등장하지 않아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 리자가 원망하는 인간은 더 이상 게르만이 아니라 차이콥스키-옐리츠키가 된다. 하이라이트는 "진짜였구나!"라고 하는 대사다. 원래는 게르만이 카드의 비밀을 얻기 위해 자기에게 접근했다는 의심이 옳았다고 확신하는 대사다. 헤어하임의 리자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려는 차이콥스키를 붙잡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셔츠의 단추를 풀며 차이콥스키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차이콥스키는 그런 리자에게 어떠한 성욕도 느끼지 못하며 조용히 퇴장한다. 이때 리자가 외치는 "진짜였구나!"는 차이콥의 개인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인 밀류코바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사로 격상한다.


사소한 패러디. 첫장면 새장 오르골이 연주될때 파파게노의 Der Vogelfänger bin ich ja가 나온다. 2막에 혼자 남은 차이콥스키가 다시 오르골을 돌릴 때 나오는 음악이 바로 파파게노 아리아의 패러디인 파스토랄의 첫 곡이다.  파파게노처럼 새 의상을 입은 두명이 나와 차이콥스키를 위로해준다. 


텍스트를 가장 거스르는 것 처럼 보이는 연출이야 말로 가장 텍스트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리자가 1막 2장에 자신의 약혼남 옐리츠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살펴보자. 옐리츠키가 참 훌륭한 사람이고, 지적이며, 잘 생겼고,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비하면 옐리츠키가 아깝다는 이야기 까지 한다. 딱 하나 빠진 이야기가 있다. 옐리츠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또 하나, 노래의 후반부에서 리자는 '그'의 외모에 반해버렸다는 비밀을 조심스럽게 독백한다. 원래대로라면 아마 게르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테다. 하지만 가사 어디에도 이 때의 '그'가 옐리츠키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마지막에 게르만이 도박에서 지고 가장 먼저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를 믿어준 리자도 아니고, 자기 때문에 죽어간 여백작도 아니다. 바로 옐리츠키 대공이다. 게르만이 옐리츠키 대공에게 미안해야할 일이 뭐가 있는가. 약혼녀 뺏어간 것보다 더한 잘못을 얼마나 많이했는데. 하지만 창부가 차이콥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 된다.

게르만이 도박장에서 부르는 아리아, '인생은 게임이야' 역시 다르게 다가온다.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게르만은 더 이상 중심 인물이 되지 못한다. 무대 위에는 차이콥스키가 있고, 그의 부인이 있으며, 그의 후원자가 있다.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 차이콥스키를 비웃으며 퇴장했던 그는 이제 차이콥스키의 계획과 음악에 휘말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차이콥스키는 작품의 리브레토 상에서 그를 미치게 만들었고 이제는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여 게르만의 파멸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음악으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차이콥스키가 악마로 나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조롱받는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관심은 있지만 진심으로 사랑받지 못한다. 차이콥스키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무대에서 보여주며 그 산고로 낳은 음악이 무엇인지 오페라가 들려주는 셈이다.


얀손스는 흔히 러시아 지휘자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므라빈스키, 스베틀라노프, 게르기예프와 같은 지휘자와는 반대에 위치해있지만, 누구보다도 러시아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에 애정이 큰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도 이 작품을 연주하여 BR에서 음반으로 발매했다. 다소 템포가 느린 감이 있지만 RCO의 찬란한 음색을 이끌어내며 처절한 차이콥스키가 아니라 밝고 황홀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투티에서도 깨지지 않는 밸런스는 경이로운데, 2막 1장의 마지막 황후 입장 장면이 그랬다. 평범하게 연주하면 그저 소리만 크고 장식적이기만 한 음악으로 들릴 수 있지만 얀손스는 이 부분을 고귀하게 바꿔놓는다.


출연진들이 얀손스의 BR음반과 많이 겹친다. 게르만 역에 미샤 디디크Misha Didyk가 작품에 어울리는 러시아 드라마틱 테너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톰스키 역을 맡은 알렉세이 마르코프Alexey Markov 역시 여유롭고 품위있게 배역을 소화해낸다. 리사 역의 스베틀라나 악세노바Svetlana Aksenova는 러시아 가수의 부드럽고 짙은 음색을 잘 살려냈다. 여백작 역의 라리사 디아드코바Larissa Diadkova 는 게르기예프 루슬란에서 보았던 가수인데 목소리는 여백작에 잘 어울리지만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미스테리한 느낌이 조금 부족해보였다. 차이콥스키-옐레츠키를 맡은 바리톤은 베르디 레퍼토리로도 꽤 유명한 블라디미르 스토야노프Vladimir Stoyanov였다. 노래하는 파트가 짧긴 했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임팩트를 분명히 줬다. 폴리나 역의 안나 고랴초바Anna Goryachova 역시 작은 역할이지만 아름다운 발성과 매끈한 표현으로 인상을 남겼다.

1막 2장에서 폴리나의 노래를 피아노가 반주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그냥 피아노를 치는 시늉만 하는 줄 알았는데 피아니스트이자 배우이기도 한 네덜란드 출신 크리스티안 쿠이펜호벤Christiaan Kuyvenhoven이 분장해서 연기와 피아노를 맡았다.



헤어하임의 연출은 이렇게 또 한번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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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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