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오고나서 학회 프로시딩을 쓰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제출하고나서 오랜만에 블루레이를 보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버티던 블루레이 책장이 기어이 hmv 세일을 못이기고 용량을 초과해버려 죄책감이 생겼다. 올바른 해결법은 사는 걸 줄이는 거지만 어차피 나한테 가능한 해결법은 보는 걸 늘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 오페라 감상을 재개하면 무조건 돈 조반니를 제일 먼저 보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뭘 보냐는 것. 블로그에 여행기 쓰고나서 깨달은 건데 여태 한번도 돈 조반니 후기를 블로그에 올린 적이 없었다. 내가 돈 조반니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고, 돈 조반니 블루레이 중 재밌어 보이는 건 이미 블로그질 시작하기 전에 다 봤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돈 조반니 영상은 끝도 없이 발매됐다. 딱히 돈 조반니를 열심히 모을 생각은 없는데, 이건 재밌어 보여서 사고, 이건 홀텐이 연출해서 사고, 이건 헹엘브로크가 지휘해서 사고... 


아직 안본 것 중에서 바렌보임 돈 조반니를 꺼내 들었다. 이걸 산 지 1년도 더 지난 것 같다. 바렌보임 피가로가 워낙 내 취향이 아니라 넘길까도 했지만 프로하스카가 나오니까 보기로 했다. 

처음 서곡이 나올 때부터 이 연주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이런걸 예선 탈락이라고 해야하나. 1999년 피가로에 비하면 시간이 지났으니 바렌보임의 해석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했지만 말도 안되는 기대였다. 거대하고 육중한 모차르트였다. 이쯤에서 멈추고 테아트로 레알 영상으로 갈아탈까 생각했지만 좀 있다가 나올 프로하스카를 생각하며 참기로 했다.


브린 테르벨(터펠)을 영상으로 보는 것도 생각보다 오랜만이었다. 요새 모차르트는 잘 안 부르는 것 같지만, 소시적에는 가디너 피가로에도 나왔었다. 레포렐로 역시 테르벨의 레퍼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일 테다. 가볍고 경박하며 사악한 목소리를 내는데 테르벨만한 가수도 없긴 하다. 테르벨의 레포렐로는 돈 조반니에게서 완전히 독립된 인물을 보여준다.

네트렙코와 프리톨리Barbara Frittoli는 역시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와는 많이 떨어져있었다. 그냥 마음을 놓고 이건 모차르트가 아니라 베르디라고 세뇌하면서 들으니 더 들을만 했다.

돈 오타비오 역은 주세페 필리아노티Giuseppe Flianoti가 맡았다. 요새 오페라 계는 돈 오타비오로 구멍을 내는 게  관습인가보다. 아무리 돈 오타비오가 까다로운 역할이라고 하지만 라 스칼라 정도면 해석은 둘째치고 최소한 음역에 맞춰서 소리는 내줄 가수를 써야하는 거 아닌가? 브레슬릭이 오타비오를 맡은 올해 엑상프로방스가 빨리 영상물라 나와서 오타비오 수난 시대를 끝내야한다.

 베르디 - 바그너 가수들 사이에 오직 프로하스카만 모차르트 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하지만 일반적인 노래와는 상당히 다르게 훨씬 더 요염하고 관능적이었다. 프로하스카의 목소리가 가볍고 깨끗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공연에서는 끈적하고 어두운 목소리를 곧잘 낸다. La ci darem la mano에서 가사 한줄한줄, 모음 하나하나에서 다채롭게 변하는 프로하스카의 표현은 이 곡에 담긴 관능적인 긴장감을 훌륭하게 들려준다. 여기에 카슨의 연출을 잘 소화해 다양한 표정을 보여줘 이 작품에서 체를리나의 독특한 위치를 확실하게 자리매김 시킨다.

마제토 역의 슈테판 코찬Štefan Kocán은 흔한 평민 신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목소리가 독특하다. 목소리만으로 당장 사람 한명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포스다. 메피스토펠레 같은 역할을 하면 딱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메트 리골레토에서 스파라푸칠레로 나온 적이 있다. 스파라푸칠레야 그런 괴물같은 베이스들이 많이 맡는 역이라 특별하다는 인상은 못 받았지만 돈 조반니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더 신기했다. 마제토보다 오히려 기사장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저런 목소리가 지옥에서 들리면 정말 오줌 지릴 것 같은데.. 

기사장 역할의 연광철은 아쉽지만 최고의 컨디션이 아닌 듯 하다 .


바그너 역할로만 보던 마테이의 돈 조반니. 마테이가 부르는 돈 조반니의 가장 큰 약점은 마테이가 너무 순하게 생겼다는 점이다. 목소리도 너무 아름답고 부드럽다. 사악하고 양아치 같은 돈 조반니만 봐오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돈 조반니를 보니 적응이 안 됐다. 여기에 너무 모범생 같은 헤어스타일 까지 들어가니 그냥 인생 편하게 사는 부잣집 도련님 인상이 돼버렸다. 

그 전까지의 돈 조반니들이 대체로 마초적이며 호쾌한 바람둥이를 보여준다면 마테이의 돈 조반니는 현실적이다. 특별히 사악한 사람도 아니고 기사장 살인 역시 사고일 뿐이다. 마지막 파티 장면에서 호화 코스요리와 와인을 즐기는 마테이의 모습은 흔한 상류층의 모습이다. 차라리 돈 조반니가 사악하고 기이한 인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쳐다보겠지만, 평범한 인간이 되었을 때 관객은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낀다. 카슨의 연출은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마테이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돈 조반니에 어울리는지 살짝 회의가 생길 때 쯤에 2막 세레나데가 나왔다.  이 아리아에 별 애정이 없었는데 갑자기 설득당했다. 

아 마테이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분을 못 알아뵙고... 돈 조반니를 부르는 데 몸에 근육이 있어야할 필요는 없죠 당연합니다. 아니 사람이 왜 갑자기 잘 생겨보이지... 저렇게 순박한 눈으로 세레나데 부르는 돈 조반니 봤습니까. 돈 조반니는 차캤습니다... 여자를 몸으로 유혹하는 다른 돈 조반니들에게 마테이가 노래로 일침을 날리는 장면이다.


카슨의 연출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카슨은 돈 조반니를 극장의 관객으로 만들어버린다. 무대에는 또하나의 객석이 있거나 또 하나의 무대가 있을 뿐이다. 돈 조반니는 곧 라 스칼라에 앉아있는 관객들과 다를 바가 없다. 관객들은 이 부도덕한 인물의 삶을 진실이 아니라 극이라는 이유로 흥미롭게 쳐다보지만 카슨은 꾸준히 이 나쁜놈이 니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 조반니 역시 우리 주위의 인물이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돈 조반니는 오페라 극장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즐겁게 보고 있는 너희 관객 같은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그런 악행을 Viva la libertà 라고 대단한 것 마냥 포장하는 이 이야기,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은연 중에 즐기는 관객들에게 날리는 한방이라고 할까.


돈 조반니는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담배를 문다. 누군가 자신을 귀찮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따지는 순간 그는 그 상황을 해결하려하지 않고 그저 회피한다. 담배하나를 입에 물고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태도로 배짱을 부린다. 여기에 카슨이 덧붙이는 말은 하나 "어차피 다 쇼일 뿐인데". 1막의 난장판에서 도망쳐나올 때 무대의 커튼을 닫아버리는 것은 돈 조반니가 '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상황을 얼마나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날레에서 출연진들이 나와 객석을 향해 그렇게 살지 마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 경고를 귀 담아 들을 생각이 없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라는 관습을 위해 덧붙여진 마지막 피날레가 관객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 경고가 그닥 달갑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페라 관객의 대표로서 돈 조반니는 이들을 사뿐히 무시해준다. 


대체로 개찐도찐인 돈 조반니 연출 중에서 상당히 주목할만한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영상 커버는 마치 전통적인 연출인 것 마냥 찍어놨다. 얌전해 보이는 게 판매량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었나 보다. 그 덕에 화려한 캐스팅을 뒤로하고 가장 구멍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리아노티의 얼굴에만 초점이 맞춰져있다. 


마지막 기사장 장면에서 화면에다가 안개 효과를 넣어놨다. 저 안개가 진짜 무대에 있는 안개가 아니라 그냥 포토샵 효과로 넣은거다! 원래 기사장 등장할때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데 그건 금방 흩어져서 사라진다. 그리고 난 뒤의 화면에다가는 저렇게 추가로 장난을 쳐논거다. 더 빡치는 건 뭐 그럴싸해보이겠다고 저 안개가 아래에서 위로 등속운동 한다는 점이다. 거기다 카메라 앵글 바뀔 때도 안개 위치는 계속 똑같다. 진짜 영상 감독 머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저런 눈속임이 통할 꺼라고 생각한건가ㅋㅋㅋㅋ 이딴 장난으로 마지막 장면을 망쳐놓는다는 게 너무 화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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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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