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프랑크푸르트에서 잠을 설쳤다. 비행기에서 많이 잔 편은 아니라 숙소에 도착하면 많이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의 1시간 간격으로 깼던 것 같다. 침대도 좋고 조용하기도 했는데 시차와 긴장감 때문이었나보다.


프랑크푸르트는 가격대비 숙소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40 유로 대에 훌륭한 객실을 예약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숙소를 밤 10시가 넘어서 들어와 다음날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었다.

라이프치히 역에 도착하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로고가 맞이해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것은 라이프치히에서 아침 11시 30분에 있는 바흐 페스티벌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일정을 짜다가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매주 주일에 있는 토마스교회 합창단 칸타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공연을 찾아보니까 마침 이 주가 바흐 페스티벌 기간이었다.


대체로 클래식 페스티벌의 아쉬움은 하루에 복수의 공연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잘츠부르크나 루체른이나 은근히 하루 내내 공연 보기가 힘들다. 국내의 대관령이나 통영 역시 비슷하다. 락페스티벌 처럼 2박 3일 하드코어하게 즐기고 올 수 있으면 시간을 내서라도 갈텐데, 멀리까지 가도 공연을 여러개 보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바흐 페스티벌은 진짜 방대한 공연을 자랑한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공연이 쉬지 않고 있다. 거기다 라이프치히가 자랑하는 유서깊은 토마스 교회, 니콜라이 교회, 종교개혁 교회 등 다양한 장소를 활용한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토마스 교회 합창단 등 라이프치히의 음악 단체도 많지만 외부 단체도 상당히 많다.



내가 보기로 한 공연은 오르간 반주의 트롬본 리사이틀이었다. 독주자는 뮌헨 ARD콩쿨을 우승한 젊은 영국인 마이클 뷰캐넌이었다. 성씨만 보면 한 성깔 할 것 같은 이름이지만 굉장히 순해보이는 영국 청년이었다. 마침 라이프치히에서 만나기로 한 오케스트라 후배가 트롬본을 하는 애라서 기가막힌 일정이라며 둘이 신나서 예매했다.


라이프치히에는 10시 반쯤 도착했는데, 시간이 남길래 호텔에 캐리어를 놨두고 오기로 했다. 구글 맵으로 봤을 때 딱히 멀어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캐리어 끌고 가니 호텔에 도착한건 11시 5분. 공연까지 25분 남았는데 대충 2km는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거기다 공연장이 자유석이라 늦게 가면 자리도 구릴 것 같았다. 후배에게 욕을 한가득 얻어먹으면서 ㅈㄴ 뛰었다. 땀뻘뻘 숨헉헉 거리면서 교회에 도착할 때 쯤이 되니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쭉쭉 떨어지며 우리를 조롱했다.


공연 보기 전에 화장실 좀 들리려고 하는데 화장실이 한칸 짜리 공용 화장실 밖에 없어서 한참을 기다렸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쯤 박수 소리가 들리길래 부랴부랴 뛰쳐 나와 들어갔다. 


교회 안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내가 가본 종교 시설이야 유럽에 있는 고딕 양식의 휘황찬란한 성당과 논산에 있는 거-대한 성당 법당 등이었는데 종교개혁교회는 상당히 조그마했다.


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앉았는데, 연주자가 안 보였다. 어라 방금 분명히 박수소리가 들렸는데? 알고 보니 트롬보니스트도 2층 오르간 옆에 서있었다. 


트롬본과 오르간의 듀엣이라니. 이 편성으로 된 곡을 하나라도 아는 거 있으십니까? 당연히 전곡이 편곡된 것이지 않을까 했는데 세곡이 원래 트롬본과 오르간을 위한 듀엣 곡이었다. 홀스트, 슈니트케, 리스트 등이 있었고, 제나키스의 트롬본 솔로 곡, 바흐의 오르간 소나타, 모차르트의 호른과 목관과 현을 위한 론도의 편곡 버전등을 연주했다.


2층에서 오르간과 함께 울려퍼지는 트롬본 소리는 그림에서 보던 천사의 나팔 소리 같았다. 성스러운 것은 항상 높은 곳에 있는 이유를 알겠더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듣는 자세가 달라졌다.


슈니트케의 곡을 할 때는 트롬본이 교회 왼편으로 가서 연주했다. 극단적인 음향을 추구하는 곡으로 트롬본 주자에게는 살인적인 도약과 기예 수준의 음역을 요구했다. 


뷰캐넌은 트롬본에서 다채로운 음색을 뽑아냈다. 대체로 호른과 같은 부드러운 톤을 내다가도, 필요한 순간 벨 찢어지는 소리까지 잘 조절했다. 모차르트 편곡에서는 트릴 같이 트롬본으로 내기 까다로운 소리도 곧잘 냈다. 


사실 머리 속에 ‘트롬본 공연 보러간다’라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오르간 역시 공연의 주인공이었다. 바흐 오르간 소나타에서는 페달이 조금씩 늦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리스트의 호산나에서는 트롬본과 함께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광휘’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오퍼에서 아라벨라가 저녁 10시가 좀 못 돼서 끝났는데, 10시 30분에 니콜라이 교회에서 다른 공연 하나를 또 예매해놨다. Vox Luminis의 쉬츠, JC 바흐, 바흐 칸타타 공연이었다. 오페라 보고 나서 무슨 저 야심한 시간에 공연을 또 하나 보는 게 과연 정신이 박힌 일인가 아주 살짝 고민했지만, 나란 놈이 별 수 있겠나. 일단 내가 볼 수 있는 바흐 페스티벌 공연 중 이 공연이 가장 이름있는 단체의 공연이었다.

적당히 둘러보다 들어갔는데 자리가 별로 없어서 뒤쪽에 앉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프로그램을 못 샀는데, 뼈아픈 실수였다. 프로그램에 독어와 영어 가사가 다 적혀있어서 사람들은 다 가사 보면서 듣더라.

복스 루미니스는 르네상스 합창단 같은 음색을 가졌다. 1인 1성부 수준의 소규모 앙상블로 비브라토 없이 놀라울 정도로 맑고 깨끗하며 신비스러운 음색을 내는 단체였다. 쉬츠의 곡을 얼마나 하는 지 정확히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이런 음색을 교회의 울림으로 듣고 있으니 없던 신앙심도 피어나는 것 같았다. 프로그램을 사서 가사까지 알아먹었다면 그곳에서 주님을 영접했을 지도 모른다. 앵콜로는 unser leben werde 라고 들리는 가사의 작품을 노래했다. 여성 단원들이 교회 2층에 서라운드로 서서 노래를 하는데 꿈속에서 들을 수 있다는 천사의 목소리가 분명 저런 소리일 테다.


공연이 끝나니 12시가 됐다. 아무리 해가 늦게 진다고 해도 12시면 꽤나 밤이다. 거기다 호텔 까지 가는 길이 조금 외진 구역이라 꽤 어두웠다. 저녁으로 6시에 샌드위치 하나만 먹은 상태로 아무것도 못 먹었고, 밤은 깊어 날씨는 쌀쌀한데 나는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길은 어두워 헤어 고트의 도움이 절실했다. 지나가다가 수상한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누가 나한테 시비를 걸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진짜 어두운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서 화들짝 놀래서 잔뜩 겁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독일어로 도와달라는 말을 뭐라고 하더라 생각해보니, Zu Hilfe! Zu Hilfe!라고 외치면 되겠더라. 그러면 어디선가 세 명의 다메가 등장해서…


호텔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돌아오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려 킷캣을 좀 샀다. 전날 잠을 너무 못자서 자기 전에 맥주라도 한캔 마시려고 고민 끝에 하나 골랐다. 터키식이라길래 맛이 이상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한 모금 맛 봤다. 맛있다. 어라 근데 맥주가 아니네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쩐지 알콜 도수가 안 나와 있더라니….. 멍청하면 맥주도 못 마십니다ㅜㅜ


후기를 쓰고 싶었지만 잠도 별로 못잔 상태에 다음날 아침 11시 30분에 또 공연을 예매해놨다. 아침에 해뜨면 아무리 안대를 해도 잠이 안오니까 일단 무조건 잠부터 자고 봐야겠다.



아침 공연은 첼로 리사이틀이었다. 바흐 첼로 콩쿨을 우승한 파올로 보노미니가 바로크에서 보케리니 까지 이어지는 레퍼토리로 프로그램을 짠 리사이틀이었다.

공연은 교회가 아니라 알테 뵈르제Alte Börse에서 했다. 일정에 치여서 관광을 다 포기했지만 그래도 라이프치히에 왔는데 토마스 교회는 구경해야하지 않겠나. 가봤는데 문은 닫혀있어서 외관만 구경하고 급하게 알테 뵈르제로 다시 돌아왔다.

토마스 교회 모습.



알테 뵈르제 모습. 사진을 이상하게 찍어서 헷갈리는데, 가운데 괴테 동상 뒤 작은 건물이 알테 뵈르제다. 뒤에 건물은 다른 건물입니다. 

건물 자체의 폭도 딱 이 정도다. 



공연장에 들어가보니 홀이 가득 차있었다. 아니 아침부터 다들 왜 이렇게 공연을 찾아다니십니까…. 어셔들이 급하게 의자를 몇개 가져와서 깔아줬다. 홀이 정말 작고 아담한데다 자연광 조명이었고 바깥 소리도 종종 들려 오묘한 느낌이었다.


첼로 소리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랬다. 여기 음색 깡패가 또 한명… 이 공연 예매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노미니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괜찮길래 예매한 건데 진짜 헉 소리가 났다. 시대연주 스타일의 깔끔하고 우아한 음색인데 악기는 현대악기라 알차고 선이 굵다. 거기다 바로크 감성이 듬뿍 담긴 연주자더라. 그냥 시대연주 솔리스트인데 악기만 현대악기 쓰는 느낌. 달라바코의 무반주 카프리치오를 연주하는데 프레이징이 진짜 말 하듯 자연스러우면서 다채로웠다. 

쳄발로 반주를 맡은 에도아르도 토르비아넬리 역시 제대로 활약했다. 쳄발로 소리가 가볍지 않고 묵직해서 듣고 있기에 참 신기했다. CPE바흐의 뷔르템베르크 소나타 1번에서 안정감 있는 질주로 쳄발로의 매력을 한껏 발휘했다.

리사이틀의 대미를 장식한 보케리니의 C장조 소나타 G 17은 화려한 음색과 기교가 더해져 첼로에서 빛이 날 정도로 행복한 소리를 뿜어냈다. 시대연주의 따뜻하고 우아한 음색과 현대악기의 기교와 음량이 만나서 뻗어나가는 순간이었다. 



공연이 12시 45분 쯤에 끝났는데, 앵콜을 두곡 했다. 정확히는 두 곡 까지 하는 걸 보고 나왔다. 1시에 개혁교회에서 칸타타 공연을 보기로 예매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보노미니와 사진 찍어놓으면 나중에 자랑으로 남지 않을까하여 칸타타 공연 따위 놓쳐도 상관 없어!! 라고 생각하며 55분까지 있다가, 그래도 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뛰어갔다. 이렇게 개혁교회 공연은 두 번 다 전력 질주로 갔다.


바흐의 코랄 칸타타 두 곡(99번, 8번)을 연주하는 공연이었다. 역시나 프로그램에 가사가 나와있었지만 급하게 뛰어오느라 프로그램을 못 샀다. 여태 한문장도 제대로 이해못할 오페라 프로그램은 꼬박꼬박 샀으면서 꼭 이런 건 놓친다.


게반트하우스 합창단과 파울리너 바로크 앙상블이 노래하고 바흐 콩쿨 우승자인 테너 파트릭 그랄Patrick Grahl 등이 독창을 맡았다. 반주도 좋고 합창도 좋고 독창도 좋았지만 보노미니의 첼로와 전날 복스 루미니스의 빛나는 소리를 들은 뒤라 큰 감흥까진 없었다. 하지만 작은 교회에서 단아한 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 보내기 참 좋더라. 독일 사람들에게 이런 공연은 우리 집 근처에서 도립 국악단이 토요 상설 공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공연이 1시 45분 쯤 끝났다. 2시가 좀 넘어서 함부르크에 가는 기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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