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에 왔으니 가능하다면 엘프필하모니를 보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혹시 오페라 일정과 맞물려 볼 수 있는 공연이 무엇이 있나 찾아봤다. 그랬더니 일요일 아침 11시에 나가노가 구레의 노래를 지휘하는 공연이 있었다.


엘프필 공연답게 표는 당연히 매진이었다. 하지만 매진인 공연도 공연 90분 전에 티켓 부스에서 남은 표를 판매하며 이렇게 해서 공연을 봤다는 후기들도 몇개 읽었다. 그렇기에 표도 못 구한 공연이었지만 일찌감치 보는 걸로 확정하고 일정을 짰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정 고민을 많이 했었다. 사실 라이프치히에서 일요일 오후 5시에 공연하는 <그림자 없는 여인>을 꼭 보고 싶었다. 그런데 구레의 노래 공연이 오후 1시 15분에 종료 예정이었고 끝나자마자 기차를 타도 5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두 공연 모두 거대한 스케일 때문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공연에 관해서라면 정신이 좀 나갔다는 걸 그때 다시 한번 실감했는데, 구레의 노래 마지막 몇분을 버리고 빠져나와 택시를 타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구글 지도로 확인해봤다. 그 때는 구레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보기도 전이었다. 작품을 알았다면 작품의 마지막을 놓친다는 건 차마 상상도 못했을 테다.


요새 가장 핫하다는 엘프필하모니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과 실연으로 접하기 정말 어려운 거대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이 공연은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출연진 역시 내가 보는 공연 중 가장 탄탄하다. 구레의 노래와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나가노가 지휘를 맡고 독창으로 나오는 토르스텐 케를, 도로테아 뢰쉬만, 클라우디아 만케, 빌헬름 슈빙함머, 전설적인 안야 실랴 까지 모두 탁월한 이름값을 자랑한다. 쉽게 말해 남들한테 제일 자랑하기 좋은 공연 아닌가!


그래서 구레의 노래 예습에도 꽤 공을 들였다. 블로그에 정리하진 못 했지만 악보도 한번 살펴보고 음반도 가장 다양하게 들어봤다.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어느정도 감상 포인트와 매력을 확실하게 찾았다.


이제 표만 구하면 완벽했다. 엘프필하모니에서는 공연 시작 90분 전에 남은 티켓을 판매한다. 매진인 공연들에 어떻게 티켓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판매되는 티켓 사정은 그날그날 다른 것 같다. 표가 얼마나 남을지 몰랐으니 일단 되도록 일찍 가기로 했다. 공연은 아침 11시, 티켓 판매는 9시 30분이었으니 8시 30분 까지 도착하기로 결정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엘프필을 찾아가면서 처음 발견한 모습. 


일본 신국립극장에서는 티켓 판매 4시간 전 부터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경험상 유럽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런던이나 베를린이나 당일 티켓을 구하는데는 판매 시작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상위권에 들 수 있었다. 


엘프필에 도착했을 때 내 앞에는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티켓 기다리는 줄이냐고 물어보니 마지막 아저씨가 친절하게 내가 다섯 번째라고 일러줬다. 안심이다. 새 공연장에 와서 티켓을 구할 때 제일 걱정되는 것 중 하나가 줄을 설 위치를 찾는 것이다. 티켓을 기다리는 사람들끼리는 모종의 동지애가 싹트기 마련이다. 어차피 순번은 정해졌으니 서로 경쟁 상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덧 주위에서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서로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당연히 다들 독일어로 이야기한다. 나는 나도 이야기에 끼고 싶다는 간절한 표정으로 옆의 아저씨들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경청했으나 맞은편 아저씨는 나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대충 이해한 이야기로는 엘프필에서 티켓 가격이 비싼 경우는 안네 소피 무터나 데이빗 가렛 같은 독주자가 올 때였다, 잘츠부르크에서 폴리니와 브렌델 리사이틀을 5유로에 봤었다 등등.. 


옆에 있던 아저씨 중 한명이 화장실에 간틈을 타 다른 아저씨에게 말을 붙여봤다. 아저씨는 이것저것 재밌는 썰을 많이 풀어줬는데, 제일 인상적인 건 저번주에 있었던 다음 시즌 티켓 오픈이었다고 한다. 엘프필이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시즌 티켓을 구하는 게 전쟁이었다고 한다. 대충 십수 군데 정도의 지정된 티켓 오피스에서 정해진 시간에 티켓을 오픈하는데, 본진인 엘프필 오피스에서는 오픈 전날 저녁 9시 반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해 줄이 건물 밖을 넘어 다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이 엘프필에 오고 싶어할 만큼 인기가 많아서, 농담 삼아 “엘프필 청소하는 모습을 티켓 오픈해도 매진될 거다”라는 말까지 있단다. 



1시간 쯤 기다리니 티켓 오피스가 문을 열었다. 원래 이 시간에 티켓이 없으면 순번을 나눠준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티켓이 많이 남아있었다. 옆의 아저씨가 오늘은 프로그램이 인기가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네??? 구레의 노래를 하는데요?? 아무리 스케일이 거대해도 독일에서도 쇤베르크는 쇤베르크인가보다. 


자리도 꽤 좋은 자리들이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맨앞자리를 골라주고 그 다음에는 1.5층 사이드를 보여줬지만 작품의 규모가 있다보니 2층으로 달라고 했다. 엘프필이 대체로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짧은 편이고 음향이 좋아 무대 전면쪽이면 어디든 괜찮다(라고 그 아저씨가 설명해줬다). 티켓을 손에 얻으니 기분이 짜릿했다. 세상에 표 없어서 못 보는 공연이란 없다를 다시 증명해냈다.

공연까지 한시간도 넘게 남았으니 신나는 마음으로 엘프필하모니를 구경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티켓 바코드를 찍어 개찰구를 통과해야한다. 올라가면 인터넷으로만 보던 그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한다. 입구에 좁은 에스컬레이터만 있으니  공연 시작과 끝에 꽤나 혼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연장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입장 방식이었다.


메인 로비로 올라가니 넓고 밝은 로비가 펼쳐져 있었다. 여느 로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로비가 상당히 높은 층에 위치하고 있고, 함부르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야외 발코니가 건물 4면을 모두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연장이면서 동시에 야외 전망대이기도 한 셈이다. 어제와는 달리 이날 공연 시작 전에는 구름이 많이껴 우중충한 날씨라 이제 좀 내가 알던 함부르크 같았다. 크레인이 곳곳에 펼쳐져있고 폭풍우가 곧 몰아쳐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사실 내가 기대하고 온 광경은 멀리서 바라본 엘프필의 위용이지, 엘프필에서 본 함부르크 광경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감흥이 있진 않았다. 










 공연장 내부는 기대했던 대로 화려하며 우아했다. 비대칭으로 무대를 둘러싼 객석의 모습은 이게 바로 21세기라고 외치는 듯 했다. 천장에 달려있는 구조물은 공학수업 교재 표지로 쓰일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음향엔 좋겠지. 


벽면 역시 거칠고 곰보마냥 움푹움푹 패여있는 패턴으로 구성돼있다.


내가 앉은 자리.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핫한 ‘신상’ 공연장은 독특한 자태를 자랑했고 난 오케스트라가 내려다보이는 2층 객석에 있었다. 함부르크가 자랑하는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있었고 가히 드림팀에 도전한다고 할 수 있는 캐스팅, 여기에 구도자 나가노가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간과한게 있었다. 아침 11시는 구레의 노래를 연주하기엔 참 좋지 않은 시간이다. 


전날 <한여름밤의 꿈>이 저녁 10시 30분이 넘어서 끝났기에, 관객인 나도 자고 일어나자마자 다시 공연을 보러 오는 게 쉽지 않았다. 하물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어떻겠는가. 물론 어제 공연에서 연주한 단원의 수가 많지 않지만 오늘 곡이 곡이다보니 모두 참가해야했을 테다. 어제 트럼펫 수석을 맡아 퍽의 음악에서 다양한 솔로를 소화했던 주자는 오늘도 트럼펫 수석을 맡았다.


그래도 프로 연주자들이고 빡빡한 스케줄에 익숙해진 베테랑들인데 아침 11시에 저 정도라고 실력 발휘를 못하진 않을거다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틀렸다. 첫 시작부터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현악기는 자신이 없었고 템포가 변할 때 티가 날 정도로 앙상블이 무너졌다. 차라리 화려한 투티에서는 단단한 앙상블을 보여주지만 조용하며 관능적인 부분에서는 긴장감이 툭툭 끊겼다.


구레의 노래 악보를 보았을 때 그 스케일에 경악했다. 5관 편성으로 악보 끔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봄의 제전 악보도 이렇진 않다. 이 악보에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음표들을 하나의 음악으로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구레의 노래가 음반마다 차이가 큰 것도 이 수많은 음표 중 무엇을 강조할 것인지 너무나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나가노는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이 무너지지 않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프레이징이나 관객을 흡입시키는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큰 재앙만 피하고자 하는 연주였다. 활력도, 차분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가노가 대단한 폭발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듣던 구레의 노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에 아티큘레이션 처리 역시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예컨데 오자와는 극단적으로 금관을 강조하는 등 선율선과 음표들을 확실하게 살리는 편이고 길렌은 과장이 없지만 단단하며 치밀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반면 나가노의 지휘는 오케스트라 탓도 있겠지만 무겁고 두루뭉술했다. 


농부와 광대의 노래를 빼면 독창자들이 모두 무대 왼편에서 내 쪽을 바라보며 노래하니 충분히 잘 들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가노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제어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작은 소리를 내는 것도 집중력이 필요한 법이다. 연주에는 숨을 멎게 하는 피아니시모가 사라져있었다.


발데마르를 부른 테너 토르스텐 케를은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를 부를 때 직접 보았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장점과 단점을 보여줬다. 헬덴테너로서 적합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지만 성량은 충분하지 못했다.


다른 가수들은 모두 훌륭했다. 모차르트 소프라노로 익숙한 도로테아 뢰슈만은 잘츠부르크에서 피에라브라스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 이번에도 기대했었다. 토베는 원래 바그너 가수들이 자주 맡는 역할이지만, 그 경우 데보라 보이트 처럼 경박하게 들리기도 한다. 뢰슈만은 고급지면서 부드러운 소리를 들려줬다.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라는 인상이 강해서 성량을 걱정했는데 케를 보다 훨씬 크더라. 마지막 고음 역시 깔끔하여 성스러운 느낌까지 났다.


숲비둘기 역을 맡은 클라우디아 만케는 차분하고 어두운 음색으로 잘 어울렸고 농부 역의 빌헬름 슈빙함머와 클라우스 역의 볼프강 아블링어슈페르하케 역시 깔끔하게 잘 해줬다. 안야 실랴는 종종 노래하는 목소리까지 섞어가며 열연했지만 중간중간 오케스트라에 많이 묻혔던 점이 아쉬웠다.


아무리 가수들이 잘해줘도 오케스트라 불안정하다면 흐름이 툭툭 끊길 수밖에 없다. 실연의 한계로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밸런스 역시 불만족스러웠다. 폭풍감동을 받을 수 있길 기대하고 왔건만 내 앞에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펼쳐져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침 11시 구레의 노래는 그냥 다음날 저녁 공연을 위한 리허설일 뿐이었다.


그렇게 절망하던 와중 합창단이 등장했다. 묵직하고 안정적인 소리가 나오면서 무대의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빠른템포로 진행되는 다성부 합창도 흔들리지 않고 무섭도록 질주했다. 합창단의 인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소리가 깨지지 않으면서 꽉찬 소리를 냈다. 

결국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합창이었다. 사랑과 죽음을 뛰어넘는 태양의 등장처럼 오로지 합창만이 이 순간을 구원해낼 수 있었다. 합창단이 노래하는 아름다우며 굳건한 고음은 황홀했다. 나가노의 균형잡힌 밸런스는 합창에서 힘을 발휘했다. 자극적이지 않으며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마지막 음표가 끝나는 순간까지 고조시켰다. 곡이 끝나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다른 리뷰를 찾아보다가, 함부르크 슈타츠오케스터가 몇달 전 엘프필에서 연주한 말러 8번에 대한 리뷰가 있었다. 원래 나가노가 지휘하기로 했지만 아파서 인발이 대타를 뛰었다고 한다. 이 리뷰에서 "엘프필하모니는 마술 상자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리뷰는 대체로 말8 공연에 특별히 설치한 조명 구조물을 까는 내용이었지만, 저 표현이 딱 내가 느낀 점이었다. 저 아름다운 무대를 보고 있으면 어떤 공연을 들어도 아름다운 음악을 쏟아질 것 같지만, 엘프필도 그냥 공연장일 뿐이다. 마지막 합창단이 오케스트라를 들어서 하늘로 승천하는 듯 했지만, 전반적인 아쉬움에 씁쓸함이 남았다. 아침 11시여도, 첫공이라도 대충하진 않겠지 했는데, 매일 밤 10시가 넘어서 까지 일하는게 직업인 극장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아침 11시는 새벽과도 같은 시간인가 보다. 이렇게 할 거면 팔고 공연 하질 말던가!!! 라는 원망도 잠깐 들었지만, 공연장 대청소로 티켓을 팔아도 매진될 것 같은 엘프필에서 구레의 노래를 돈 받는 공개 리허설로 해주기만 해도 감지덕지 받아들여야 되나 싶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구름이 걷혔다. 지하철 역으로 다시 돌아오며 사진을 찍었다. 창문의 저 오묘한 패턴과 물결 모양의 천장 모양은 참 고급스럽다. 


공연의 감동은 공연장, 작품, 지휘자, 가수,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공연으로 만나자 엘프필. 나가노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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