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이름은 조르당, 이 곳에서 너에게 제대로 된 물맛을 보여주지!



파리에서의 마지막 공연. 


파리 오페라 티켓 오픈 하는날 코지, 미망인, 펠레아스 세 개를 모두 예매하려고 했지만 고민의 고민 끝에 표가 빨리 나가는 코지만 예매하고 나머지는 예매하지 않았다. 펠레아스는 표가 많이 남아서 당일 유스 할인으로 35유로로 티켓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런던과 파리의 숙소비가 워낙 비싸다보니 어떻게든 아껴보려고 티켓값도 최대한 아꼈다. 독일에서 예매 아무것도 안하고 당일날 학생증 내밀면서 티켓 내놓으라고 할 때가 좋았지.....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공연 볼 날이 다가오니 싼 표를 예매한 게 아쉽더라. 거기다 펠메는 연극적이다보니 꼭 가까이서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다른 데서 돈 많이 아꼈는데 그냥 눈 딱 감고 제일 비싼 자리 지를까 생각했다. 유럽에 와서도 티켓 얼마나 남았는지 체크했다. 그러다가 민콥스키에 140유로를 쓰고나서ㅠㅠ 펠메 공연은 나쁜 자리에 앉더라도 무조건 유스 티켓으로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운이 더 좋게도, 표가 너무 안 팔렸는지 당일 현장 매표로 파는 유스 표를 그냥 인터넷으로도 팔기 시작했다! 전날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를 잘못 타 고생해서 힘들었는데 파리 오페라 홈페이지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급 방긋. 오페라 가서 줄 서서 기다리고 하면 미술관도 일찍 나와야하고 밥도 못 먹을 거라 걱정했는데 개이득!

인터넷 찾아보니 오페라 블로거들이 1층 중앙 5~20열 정도를 그나마 들을 만한 좌석이라고 추천해주더라. 내가 앉은 자리는 8열이었다. 


월요일은 오르세가 휴관, 화요일은 루브르를 포함 대부분의 박물관이 휴관한다. 월요일에는 몬테베르디에 어울리는 르네상스 회화들을, 화요일에는 드뷔시에 어울리는 인상주의 회화들을 볼 수 있었다. 오르세에는 유명한 드뷔시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별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어라 싶은 순간이 있음.

또 하나 소개하자면 이 그림! 클덕질을 하면 은근히 미술과도 조금씩 익숙해지는데 이건 카우프만이 아직 뜨기 전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내놓은 슈트라우스 가곡집 표지에 사용된 그림이다. 미술관에서 마주친 순간 바로 알아봤다.


바스티유 극장은 바스티유 역 위에 있다. 출구로 나와서 오페라 극장 어딨지 둘러보면 내가 나온 출구 바로 위에 오페라 극장이 세워져있는 걸 볼 수 있다.


바스티유 까지 오는데 꽤 걸려서 공연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 들어갔다간 음식 제때 안 나올 것 같아서 일부러 한적한 식당을 골랐다.

주문하고나서 구글 맵에서 평점 찾아보니 2점대로 엄청 나쁘더라ㅜㅜ 에효 뭐 어쩌겠나 하고 라자냐를 먹는데 이게 웬 일. 우리나라에서 맛있다고 하는 가게 가서 먹는 라자냐보다 더 맛있었다. 한국 맛집의 라자냐 < 파리 구린 식당의 라자냐 입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예습을 정말 열심히 했다. 그동안 모차르트 오페라에 꽂혀서 펠레아스를 조금 뒷전으로 뒀는데, 다시 본 순간 이 작품은 열심히 예습해야만 하는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느 오페라들과 다른 구성이라는 점도 있지만 작품의 깊이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파리에 가기 전에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지가 걱정이었다. 출국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도 내 머리 속엔 펠레아스를 예습해야한다는 생각만 있었고, 대전에서 올라가는 새벽 기차 안에서도 펠레아스 영상을 감상했다. 파리에서 파리 오페라의 연주로, 그것도 음악감독 조르당의 지휘로 듣는다는 건 이 오페라를 내 레퍼토리로 만드는데 최고의 순간일 것만 같았다. 메테를링크의 원작 희곡도 찾아 읽어보고 (드뷔시는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희곡을 가져다 썼지만 자른 장면이 몇군데 있다) 해설 논문도 찾아보려 했다. 불어-한국어 대본을 전자책에 넣어 대본도 천천히 읽어봤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리브레토는 다른 오페라와 달리 구조가 평이한 문장들로 구성돼있기 때문에 내 불어 수준으로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애플 뮤직에 Opera Explained라는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편도 꽤 잘 정리돼있어 도움이 됐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대본이나 음악이나 미스테리한 작품이다. 그 어느 것도 확실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각각의 문장들은 단순하지만 그 문장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상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대답이 없는 질문도 끊이질 않는다. 작품은 상징주의 그 자체다. 물, 장님, 빛과 어둠, ailleurs (다른 곳) 등 궁금하고 미심쩍은 것들이 연속된다.

그렇기에 해석의 폭도 다양했다. 작품의 제목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이지만, 미스테리한 면으로 보자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은 단연 멜리장드다. 난 개인적으로 멜리장드가 과연 펠레아스를 정말 사랑한걸까 하는 의심도 든다. 1막 1장부터 나오는 왕관도 있지만, 4막의 사랑의 이중창에서 실제로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건 펠레아스가 일방적이다. 


펠레아스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길게 할 기회가 있을 테다. 중요한 건 내가 이 공연 전에 펠레아스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고 싶은 욕망에 가득차있었다. 그만큼 공연에 대한 내 기대도 최고조였다. 


하지만 내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한두가지 부족한 게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원래 3층 정 가운데서 한번 찍으려고 했는데 단차가 너무 심해서 고소공포증 증세가 나타났다. 저 난간 근처로 못감ㅠㅠ


여기가 프랑스의 세종입니까?

바스티유가 음향 구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 몰라도 그냥 들어가면 느낄 수 있다. 아 여기는 음향이 구리겠구나. 도쿄의 오차드 홀이 생각났다. 1층의 광활한 폭, 홀의 어마한 높이, 거대한 벽의 무시무시함 까지 모든 게 이 곳에서 음향에 대해 눈꼽만큼이라도 기대하지 마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바스티유 광장에 새로운 오페라를 지으며 모든 이들을 위한 오페라를 표방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참담한 음향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드뷔시를 한다구요?


여기에 내가 경험해본 최악의 관객들.

아니 난 프랑스 애들은 DNA에 드뷔시가 있는 줄 알았지. 다 쳐 자더라. 내가 벌써 서울로 돌아왔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옆에서 쌔근쌔근 자는 소리도 들리고, 온 오페라 극장이 기침 소리로 가득했다. 진짜 분당 기침소리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보통 기침 좀 하는 거 가지고 뭐라 안하는데, 가뜩이나 조용한 작품에 거대한 기침이 계속 나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바흐트랙 찾아보니 2015년 공연 리뷰에서도 겨울 감기 때문인지 기침이 너무 많았다고 성토하는 내용이 있다. 작품이 조용해서 기침 소리가 더 튀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정말 입도 안 가리고 내는 듯한 큰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이것 말고도 물건은 왜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지, 마지막 장면엔 무슨 릴레이로 떨어뜨리더라. 조르당 지휘에 맞춰서 객석에서 우당탕탕 효과음이 나는 게 황당할 지경. 니들 솔직히 말해봐 이거 의도적인 테러 맞지??? 분명히 1부 시작할 때는 내 앞 줄들이 다 차있었는데 인터미션 지나니까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있다. 프랑스 사람들도 드뷔시는 버티지 못했다.


공연 퀄리티도 노답이었다. 이런 극장이 세계적인 오페라단의 메인 극장이라니. 가수들은 다들 홀을 채우기 위해서 소리를 내질렀고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피사로니의 골로는 노래가 아니라 악을 지르는 것 같았고, 아르켈 역을 상당히 자주 맡은 프란츠요제프 젤리히Franz-Josef Selig도 소리가 깨질 만큼 성량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피사로니 좋아해서 상당히 기대하면서 들었는데 원래 성량이 큰 가수가 아니다보니 더 무리하는 것 같았고 목소리도 메마르고 표현 역시 당최 몰입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빈말로라도 성공적인 롤 데뷔였다고 말하기 힘들테다. 당연하지만 가수들 딕션은 하나도 안 들렸다. 이뇰드 역의 조디 드보Jodie Devos도 극장의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마 펠레아스 역의 에티엔느 뒤퓌Etiennes Dupuis와 멜리장드 역의 엘레나 찰라고바Ellena Tsallagova가 무난한 노래를 들려줬지만 이 끔찍한 홀에서 제대로된 감흥을 전달하기란 너무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로버트 윌슨의 연출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충 이럴 거라고 짐작은 하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하더라. 펠메의 해석 관점은 이들을 얼마나 인간적인 인물로 바라볼 것인가에 있다. 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물이라는 관점에 서있다. 읽을 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이지만 그들을 인간의 감정으로 설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윌슨은 모든 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의상이나 무대나 일본 풍이었다. 가수들의 동작은 인형극 같이 딱딱하고 불확실했다. 연출은 매우 정적이었고 상징적이었다. 그리고 난 이런 연출 정말 싫어한다 흐그흑 직접 보면 뭔가 더 멋있지 않을까 했는데, 안 그래도 정적인 오페라를 더 정적으로 만들었다. 멜리장드가 빠뜨린 반지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건 괜찮았지만 구체적인 메시지가 없었다. 미니멀한 무대 역시 아름답긴 하지만 이 작품의 어려운 점만 더 부각시킨 셈이됐다.


여기에 조르당이 방점을 찍는다. 코지 판 투테에서 큰 실망을 안겨준 조르당이었기에 제발 이번엔 잘해라 라는 마음으로 봤다. 솔직히 파리 오기 전까지 조르당 빠에 가까웠었다. 빈 슈타츠오퍼 차기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도 내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며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아무리 드뷔시가 물 같고 이 작품이 물에 관련된 오페라여도 그렇지, 무슨 물에 몇시간 담궈논 것 같은 종잇장처럼 흐물흐물 한 소리를 들려주는 건 뭘까. 이 작품에도 분명 선율이 존재하고 라이트모티프가 존재하며 다양한 분위기 전환이 있다. 이 곡을 자주 공연한 드뷔시의 대가 잉겔브레슈트의 해석은 이 작품이 얼마나 극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잉겔브레슈트의 해석이 호수 위에 거친 물결을 만들어내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조르당의 접근은 "절대 관객분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돼"였다.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흐리멍텅해서 축축 처지는 게 한번 쥐어짜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순간순간 탁월한 장면들은 있었다. 멜리장드가 반지를 빠뜨리는 순간, 동굴에서 달빛이 들어오는 순간에 나오는 하프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반전은 감탄이 나왔다. 조르당이 절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그냥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거지.

사실 조르당의 프레이징 스타일은 대부분의 선율을 아주 조심스럽고 변태감성으로 앞뒤를 늘리는 데에 있다. 근데 그 변태감성이 드뷔시랑 만나면서 필터가 중첩된 효과가 나왔다. 음악의 구조가 전달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극적인 긴장감도 없었다. 음표 하나하나의 울림, 그리고 바스티유라는 악조건 안에서 들어줄만한 드뷔시 사운드를 유지해내려는 것 같았지만 넓은 시간  오케스트라를  정말로 원하는 스타일을 제대로 완성했다면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었겠지만,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절대 그렇게 따라가지 못했다. 전혀 집중력이 없었다. 뉴 프로덕션도 아닌데 첫 공연이라 그런지 연습 상태가 아주 꽝이었다. 앙상블은 흐트러지기 일수였고 연주에는 초점이 없었다. 


자괴감. 인터미션 이후 격정적인 내용이 이어지는 4막에서는 뭔가 달라질까 했지만 역시 별일 없었다. 사랑의 이중창 장면이 이렇게 노잼이었나. 터질 듯 터질 듯 했지만 결국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골로의 압살롬! 장면도 피사로니의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연기가 좋은 가수라 골로도 잘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바스티유에서 롤 데뷔를 하는 건 영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아르켈의 독백은 방향성 없이 흐느끼다가 제일 마지막 중요한 말만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쓸데 없는 일은 없다랑 내가 신이라면 동정심을 느꼈을 거다라는 대사. 딱 그 대사 부르기 전에는 호흡 제대로 챙겨서 각잡고 부르고 각잡고 반주하는 게 느껴졌다. 


커튼콜 때 현자타임 와서 사진이나 열심히 찍었는데, 다 찍고나니 중앙블럭 앞줄에서 이게 무슨 민폐짓인가 싶다. 내가 여러장 찍는다고 궁금해할 사람도 없을 것 같고. 혹시 조르당 얼빠 계시면 연락주세요. 사진 100장쯤 찍은 듯... 피사로니 얼빠도 환영합니다만, 저렇게 새하얀 분장한 피사로니 사진을 찾으실 분은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이런 극장에는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다. 미망인을 예매했다면 저 윗층 어딘가였을 텐데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덧. 인터미션 때 당을 보충하려고 로비 바에서 마카롱을 사먹었다. 3개에 7.5유로인데 진짜 꿀맛... 바스티유 가면 마카롱 꼭 드세요. 세 개 바로 다 흡입함ㅠㅠ 

마카롱 사는데 옆에서 영어로 이야기하길래 누구지 하고 쳐다봤는데 토마스 햄슨ㅋㅋㅋㅋㅋㅋ 사위 롤 데뷔에 내일 자기 미망인 공연도 있고 해서 찾아 온 것 같다. 순간 놀래서 진짜 "오 마이 갓, 미스터 햄슨!"이라고 말하니 햄슨이 웃으면서 땡큐 해줬다. 사진 같이 찍자고 할까 했지만 햄슨 미망인 버리고 헨트로 튀는 주제에 차마 스스로 팬이라고 말하기도 뻘쭘해서 용기를 잃었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장면. 


조르당이 내한 공연 때 얼마나 변태같은 해석을 들려줄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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