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다 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끝나면 파리로 옮겨와서 공연하는 팀이 꽤 있다. 쿠렌치스도 그렇고 민콥스키도 비슷한 케이스다. 


원래는 이 공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 시간 계획은 라디오 프랑스 단원들이 르노 카퓌숑과 도흐나니와 멘델스존 옥텟을 하는 것을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오페라 매거진을 읽으면서 칼라스 서거 40주년을 맞이해 파리에서 칼라스 특별 전시가 9월 16일부터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칼라스는 말년에 파리에 살았다). 그래서 전시장이 어딘지 찾아보니 La Seine Musicale 였다. 전시 예매하려고 홈페이지를 찾아보는데, 9월 15 ~ 17일에 민콥스키 모차르트 레퀴엠 공연이 있다고 나와있었다. 세상에! 바로 영상으로도 발매되는 바르타바스와의 협업으로 꾸민 승마 모퀴엠이었다. 이전에 공연한 다비데 페니텐테도 영상으로 나와 구입했었(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르노 카퓌숑이냐 민콥스키냐 고민하던 와중에 몇장 남은 표가 다 매진이 됐더라. 이상하게 매진된 공연이면 괜히 더 보고싶고 그런거 있지 않나? 거기다 칼라스 전시도 볼 겸 가보고 싶은데, 이 공연장 역시 2017년에 지어진 핫한 신상 공연장이었다. 이게 또 신삥 공연장이라면 한번 가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코지 - 티토 - 마적 이라는 모차르트 최후의 세 오페라를 연달아 들었으니 레퀴엠으로 이어주는 게 또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세상에 표가 없어서 못 보는 공연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지어냈다. 보려는 자에게 다 길이 생기나니... 공연장에 메일 보내니 다른 티켓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장 규모가 거의 세종 후드려팰 사이즈라 취소 표가 안 생길 수가 없다. 기다리면 팔겠지. 바그네리안 킴님의 선례를 본받아 전자책 리더기에 Je cherche un billet pour le concert 라고 적어서 가져갔다. 원래 아침 공연 끝나고 이동하면 전시 둘러보고 나서 표를 구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점심 레스토랑 찾느라 거의 1시간을 써서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 



라 센 뮈지칼르는 행정구역상 파리에 있진 않다. 파리 교통에서 존2에 해당하는 위치로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센 강에 있는 섬에 지은 건물이다. 

이날 이 건물을 얼마나 많이 뺑뺑이 돌았는지 이야기하자면 좀 길다. 여기 갔더니 저기 가래고 저기 갔더니 어디로 가라고 하고. 공연 출입구가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20분간 고생하며 확신하고 나서 전자책 리더기를 들고 서 있었다. 사실 계획은 자신 있게 짰지만 주헤 카르테 직접 해본 거 처음이었다. 뭐 매표소에 줄 오래 기다리는 건 해봤지만 팔 사람 기다리는 건 처음이었음. 한 5분쯤 지나니까 그냥 공짜로 편하게 르노 카퓌숑 볼 걸 그랬나 후회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한 아저씨가 자기 아내 표인데 못왔다고 사겠냐고 물어봤다. 오오오 역시 되는구나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표를 확인하니 140유로.... 내가 처음 고민했던 시야장애석은 20유로였는데... 그런데 더 기다려도 표가 나올지도 모르겠고 (옆에 다른 아주머니도 표를 구하셨다) 지금 표를 사면 칼라스 전시를 대충은 훑어볼 수 있겠더라. 그래서 표를 사고 급하게 칼라스 전시를 보러갔다. 분명히 아까 다 한바퀴 돌았던 곳들인데 또 15분간 건물을 돌았다. 건물 동선이 아주 개판이다. 표 파는 곳이라고 써져있는데 거기로 가면 표 파는 곳 뒷문이 나온다;; 전시회 표를 사려면 공연 입장에서 장애인 출입구로 들어가야됨;; 그리고 같은 건물에서 하는 행사인데 전시회 보고 공연을 보려면 그 거대한 건물을 정확히 반바퀴 돌아야 한다. 어메이징 파리..


짤막하게 전시회 후기를 쓰자면,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게 아쉬웠다. Maria by Callas. 마리아 칼라스 본인이 직접 말한 '나는 마리아라는 개인으로 살고 싶지만 칼라스라는 예술가로서 살 수밖에 없었다'(정확하지 않음)라는 말에서 따온 제목이다. 칼라스의 삶을 따라 영상 자료와 인용구 들로 벽을 가득 채워놨다. 전시장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음악가 전시이다보니 오디오 가이드가 기본 제공이었다. 젠하이저 헤드폰을 줬는데, 돌아다니면서 가이드를 기계에 가져다 대면 자동으로 관련 오디오가 나왔다. 특히 영상 같은 경우는 프로젝션 중인 영상과 싱크를 맞춰 오디오가 재생되도록 신경썼다. 옛날 공연 포스터 등도 많이 있고 그때 그때 맞는 칼라스 녹음들이 상당히 많아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전시였다. 

전시 마지막 순서에는 파리 샹젤리제에서 복귀를 염두에 두며 리허설을 하는 칼라스의 사진과 녹음이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노래를 부르고, 전성기가 지나갔음을 잘 알았을 텐데도 그렇게 다시 한번 리사이틀을 하기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칼라스의 장례식 장면 영상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브라보! 라고 외쳤다는 설명이 있었다. 장례 행렬에 박수에 브라보라니 무슨 패드립인가 싶겠지만, 그런 아이러니한 행동을 했던 팬들의 마음이 백분 이해가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티스트에게 보내는 마지막 박수라니. 괜히 먹먹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또한번 저 거대한 건물 주위를 뛰어다니며 겨우 공연장에 들어갔다. 



140유로 줬으니 자리는 좋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좋더라ㅋㅋㅋ 생각보다 훨씬 앞이었다. 저 뒤에 앉았으면 뭐가 보였을까 싶었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가까이 앉아봤자 보이는 건 말밖에 없는데? 말 얼빠 짓이라도 해야하나?


그렇다. 그 자리에 앉으면 말 얼빠가 될 수 있었다. 여러분 말 앞다리 사이에 있는 갑바 근육 보고 감탄하신 적 있나요.  어셔들이 공연 이름을 이야기할 때 민콥스키보다 바르타바스를 먼저 이야기하는 게 이유가 있었다. 이날 공연의 주역은 민콥스키가 아니라 바르타바스 연출의 베르사유 승마 예술 아카데미였다. 처음엔 헷갈렸는데, 바르타바스는 사람 이름이고 (예명같은 거인듯?) 바르타바스가 감독으로 있는 단체 이름은 베르사유 승마 예술 아카데미다. 

잘츠부르크 공연과 다른 점이 있다면 파리 오페라 소속 어린이 합창단인 메트리즈 데 오드센 Maîtres des Haut-de-Seine 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합창단 인원이 150명이라고 공연 정보에 나와있다.


공연장이 정말 크다. 덕분에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이나 솔로나 모두 마이크를 썼다. 애초에 세종만한 홀을 41명의 루브르 음악가들 소리로 채울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마이크는 아마 당연히 쓸 거라 생각했다. 펠젠라이트슐레에서 공연할 때는 어땠을지 궁금하네.

 베르사유 승마팀의 기교라고 한다면, 말을 음악에 맞춰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이게 만들며 동시에 말 위에서 고삐도 잡지 않은 채로 다양한 자세를 취하는 것에 있다. 문제는 생각보다 이들의 기교가 아주 화려하거나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야 말이 음악에 맞춰 동선을 짜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신기하지만, 당연히 점점 단조로워지는 감이 있다. 무슨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말 타면서 활을 쏜다거나, 말 위에 두발로 선다든가, 말이 허들을 넘는다든가 하는 건 없다. 


오히려 가장 멋있는 것은 디에스 이레에서 말이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전력질주를 하고 기수가 팔을 하늘로 쭉 뻗는 모습이었다. 비교적 단순한 동선이지만 음악에 어울리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질주하는 말의 모습과, 그 위에 마치 발키리라도 되는 냥 숭고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수의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우라가 있었다. 여성 기수들이 머리 길이까지 맞춘 것도 연출의 일환으로 보인다.  콘푸타티스에서 가운데 소년 합창단 단원 몇명을 세워놓고 빠른 부분에선 말들이 크게 원을 돌다가 조용한 부분에서 천천히 소년 합창단 한명 한명 주위로 도는 연출 역시 인상적이었다.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상투스 앞이었다.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말이 혼자 등장했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얼마 있다가 부활한 듯 다시 일어나서 유유히 퇴장했다. 기수 없이 해낸 부분이라 어떻게 한 건지 더 신기했다. 사람이 그렇게 쓰러졌다 일어났으면 당연히 아무 감흥도 없겠지만 말이 그러니까 정말 종교적인 기적이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와 저게 가능해???

하지만 저 방송 중계 영상에서도 보이듯, 사실 말들의 움직임만 계속 보고 있는 건 그렇게 흥미진진한 일은 아니다. 승마 학교에서 하는 쇼야 원형 마구간에서 하니 자기 눈앞에서 말이 지나가는 걸 계속 보게 되지만 이 큰 공연장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괜히 저 중계에서 민콥스키 모습이나 연주자들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 보고 신기해하는 것도 처음 몇분이지 한 곡 내내 똑같은 패턴으로 무대 돌고 있는데 계속 재밌긴 힘들다. 영상 처럼 전체 그림의 일부라면 괜찮지만 이날 합창단 포함 모든 음악가들은 피트에 들어가고 무대에는 말과 기수들밖에 없었다. 기수들의 기술적인 기량이야 분명 뛰어나겠지만 그들의 능력을 다채롭게 보여줄 만큼 준비가 착실한 연출이 아니었다.


차라리 영상으로 보니까 연주가 좀더 괜찮게 들린다. 하지만 파리 연주에서 나온 소년합창단은 당연히도 잘츠부르크 합창단 보다 음정이나 표현이 깔끔하지 못 했고 스피커로 듣는 소리 역시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다. 민콥스키의 해석 자체도 영적인 고양감 보다는 음향적인 쾌감과 다소 라모 스타일의 연주인데 음향 문제로 그 장점이 다 죽어버린 것 같다.

아! 레퀴엠이 끝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데, 민콥스키가 무대로 걸어나가 지휘를 시작하더니, 오케스트라 반주로 기수들이 아베 베룸 코푸스를 직접 불렀다. 기수들 역시 모차르트의 음악을 단순히 배경음악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음악 자체를 위해 공연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면서 말 위에서 노래하며 차분히 마무리 하는 장면을 만들어줬다. 생각보다 노래도 잘하고, 한 시간의 공연 동안 기수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발키리 같은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세상 노래가 아닌 듯한 아우라가 있었다. 오히려 떼창단 노래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게 함정. 공연 끝나고 커튼콜인줄 알고 사진 찍었는데 졸지에 공연 중간에 사진 찍은 셈이 됐다. 


연출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고, 140유로가 조금 과하긴 했지만 한번쯤 직접 볼 만한 공연이었다. 열심히 까놓고 이러니까 좀 이상하네. 사실 140유로가 아니라 20유로 주고 봤으면 말이 달라졌겠죠. 하지만 제가 본 공연은 140유로였으니 140유로 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다고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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