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 세번째 왔다. 2014년 여름, 2017년 여름, 그리고 이번 2017년 겨울. 세번째 방문해서야 드디어 바이에른, 혹은 바예리셰 슈타츠오퍼에서 공연을 볼 수 있게 됐다. 그것도 바로 키릴 페트렌코 지휘로!


페트렌코 지휘를 보기 위해서 참 오래도 기달렸다. 페트렌코가 지휘하는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페트렌코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 본 공연이 바이로이트의 링 사이클이었으니 말이다. 분명 이 사람이 지휘한 음악을 14시간이 넘게 들었는데, 지휘봉 흔드는 모습은 1초도 못 봄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나서 그해 겨울에 베를린에 갔다. 때마침 있는 베를린필 공연 일정이 바로 페트렌코 지휘의 말러 6번이었다. 당시 페트렌코를 베필 상임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때였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반지에 반했던 터라 기대에 부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서 처음 인터넷을 켰을 때 들었던 소식이 바로 페트렌코가 건강 상의 이유로 공연을 취소하고 대신 하딩이 대타를 선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걸 봤으면 베를린필이 페트렌코를 차기 감독으로 위촉할 때 둘의 가장 최근 공연을 직접 본 셈이었을 텐데....

페트렌코가 베필 차기 지휘자가 되고나서 주가가 한껏 뛰어올랐다. 직접 볼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하필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내한 공연이 내 학회 기간이었다. 이렇게 또 한번 놓치게 됐다. 


뭐 페트렌코만 놓쳤나.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공연도 여태 못 봤다. 독일에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극장을 빼면 그래도 메이저 극장은 다 다녀왔는데 이상하게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만 직접 가보지 못했다. 


거기다 작품은 삼부작. 극장의 캐스팅 능력을 과시하기 딱 좋은 작품이다. 삼부작에는 주역급 가수만 하더라도 조르제타, 루이지, 미켈레 - 안젤리카, 공작부인 - 잔니 스키키, 리누치오, 라우레타 등 8명이 필요하다. 순서대로 에바마리아 베스트브룩, 이용훈, 볼프강 코흐, 에르모넬라 야호, 미하엘라 슈스터, 암브로조 마에스트리, 파볼 브레슬릭, 로사 페올라Rosa Feola가 캐스팅 됐다. 이 중 페올라를 제외한 7명의 가수가 탑클래스로 이름을 날리는 가수들인데, 7명 중 코흐를 제외한 6명을 직접 둘오보지 못한 나에겐 저 많은 가수들을 모두 한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너무 덕질 여행으로 보일까봐 덧붙여야겠다. 낮에는 다하우 수용소에 다녀왔다. 신혼여행에 가기엔 좀 그렇지 않냐는 반응도 들었지만 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의도치 않게 전날에는 지나가다 발견한 뮌헨 유대인 박물관에 다녀왔으니 뮌헨에 있는 이틀 내내 독일 내 유대인 억압의 역사를 공부한 셈이다. 아, 뮌헨 유대인 박물관은 작지만 정말 알차게 구성돼있어서 아내와 나 모두 만족해했다. 다하우 수용소에 간 날은 눈비도 많이 와서 수용소의 아픔을 느끼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단정한 무게감이 있다.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은 오페라였지만 그렇진 못 했다. 슈타츠오퍼에서 올리는 신작인데 연출 뭐 걱정할 거 있나 했지만, 로테 드 베어Lotte de Beer의 연출은 예상을 깨고 구렸다. 

연출의 약점은 세 작품을 무리해서 엮어보려는 데서 생겼다. 최근 더블빌 작품을 연출할 때 두 작품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데 치중해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를 헤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 연출 역시 같은 종류의 실패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연출은 삼부작을 하나로 엮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세 작품의 무대를 모두 하나로 통일했다. 세 작품에서 모두 활용할 수 있는 무대는 극히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무대는 브라운관 TV의 내부를 닮은 터널과도 같았다. 무대에는 특별한 장치 없이 책상과 의자 같이 필요한 소품만 몇개 있을 뿐이었다. 

세 작품을 공통되게 표현할 수 있는 무대라는 건 곧 각각의 작품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는 것과도 같다. 출연진의 의상이 바뀐다고 해도 주도적인 이미지가 바뀔 순 없다. 삼부작의 분위기가 각각이 꽤나 다른데 이걸 같은 무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신감일까 오만일까? <외투>에서는 흑백의 모노톤 분위기에서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안젤리카> 부터는 무성의해보였고 <스키키>부터는 좁은 무대가 답답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스키키>는 다른 연출에 비해서 웃음 포인트를 찾기도 힘들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연출가의 지시로 추정되는데, 이 공연에선 <외투>와 <안젤리카> 사이의 휴식을 생략했다. 인터미션 없이 2시간을 연달아 공연한 것이다. 그러면서 <외투>의 시작과 끝, 그리고 <안젤리카>의 시작을 거의 같은 장면이 되도록 바꿨다. <외투>의 시작은 조르제타 부부의 아이 장례식이었고 결말은 루이지의 장례식 처럼 보인다. 실제로 루이지의 시신을 운구했는지 아니면 다른 관을 운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튼 마지막 부분에 장례식 추도객들이 첫장면과 같은 구도로 서있는 것으로 <외투>가 끝나고 바로 <안젤리카>가 시작하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억 상으로).

<안젤리카>의 장례식이 누구의 장례식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터미션이 없이 바로 <안젤리카>가 시작한다는 것에 일단 충격을 먹었다 (인터미션에 아내에게 <안젤리카> 줄거리를 설명해줄 계획이었는데!). 

삼부작의 각 작품은 극의 시작보다 전에 누군가의 죽음이 발생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외투>에서는 1년 전 쯤 조르제타와 미켈레의 아이가 죽었고 <안젤리카>에서는 역시 수도원에서 비안카 수녀가 죽은지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는 물론 안젤리카의 아이가 2년 전에 사망한 것이 있지만 이는 극중 인물 중 공작 부인만 아는 내용이니 성격이 조금 다르다. <스키키>의 경우는 가장 명확하다. 바로 부오소 도나티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이 프로덕션에서 <안젤리카>에서 처음 장례행진은 누구일까? 곰곰히 생각해보고 나서야 떠올린 거지만 안젤리카와 아이를 낳은 남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리브레토 상 아이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정황 상 살아남았으리란 보장도 별로 없다. 하지만 장례식 때 슬퍼하고 이후 머리가 잘리고 수녀원에 보내지는 듯한 시퀀스가 있는 걸 보았을 때,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귀한 집 따님을 잘못 건드렸다가 골로 간걸 지도...

이런 연결이 맘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일단 인터미션이 사라져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을 기회가 날아갔다는 거 안젤리카가 수녀원에 들어오던 시점을 극의 시작으로 삼아서 극 내내 안젤리카가 극도로 불안해보이기 때문이었다. 안젤리카가 아무리 강제로 끌려왔다지만 수녀원 생활 7년하며 성모 마리아를 모신 몸인데 극 내내 그런 느낌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공작 부인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화가 나니까 의자를 집어던지고 지팡이를 뺏어서 때릴 기세더라. 배경이 수녀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이라고 해도 믿었을 듯.

이 작품의 매력은 모든 욕구를 억제하고 감정을 제어하는 것이 미덕인 수녀원에서 주인공이 수녀와 어머니의 두 가지 모습에서 갈등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안젤리카가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자살을 감행했을 때, 수녀로서 뒤늦은 후회를 하며 처절한 절규를 하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세상에 어떤 오페라 주인공이 자살 선택하고 그렇게 후회하더냐. 안젤리카가 신실한 수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리브레토 역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짧은 작품의 1/5 정도를 오로지 수녀원의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다. 제노비에파 수녀가 태양이 샘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고 하는 장면을 보자. 수녀들은 이 '기적'이 일년에 오직 3일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른 날에는 일과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해가 너무 높게 떠있거나 혹은 낮게 떠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하루 일과가 365일 항상 같은 시간에 끝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이 연출에서 이런 수녀원 생활은 거의 표현돼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애초에 안젤리카는 다른 수녀들과 달리 머리를 감추지도 않았다. 안젤리카는 정신병원에 격리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성모 마리아의 이름은 오로지 자기 이모와 다툴 때만 사용하는 인물이었다. 도발적인 해석이지만 설득력은 크지 않았다.

가장 구린 장면은 끝나는 장면이었다. 연출가의 '작품엮기 병'은 여기서 가장 잘 드러났다. <외투> 피날레에서 루이지의 시체를 무대에 고정시킨 채로 무대 중간 부분을 통째로 돌려버렸다. 그러니까 관객 입장에서 Z축을 축으로한 회전을 시켜 무대 바닥에 있는 시체가 무대 천장을 지나 360도 회전하게 만든 것이다. <안젤리카> 마지막에는 아이의 환영이 십자가에 달려 공작부인과 함께 등장했다. 이미 이 비주얼 부터 신성한 환영이라기 보단 스릴러 느낌이라 이상했다. 설상가상으로, 설마설마 했는데 이번에도 또 무대가 <외투>피날레랑 똑같이 돌아가더라. 이게 바로 작품 간에 "통일성" 같은 걸 끼얹는 연출인가요?????

연출가도 같은 전략을 세번 우려먹는 삼연벙은 사람으로서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는지 <잔니 스키키>에서는 그 회전을 유머로 승화시켰다. 부오소 도나티의 시신이 있는 침대를 마찬가지로 360도 돌리는 걸로 막을 시작한 것이다. 피식잼 인정합니다. 

아까 '가장 구린 장면'이라고 썼는데 그건 <안젤리카>에서 제일 구렸다는 거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구린장면은 <잔니 스키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왔다. 스키키가 단테 이름을 꺼내며 관객들에게 오늘밤 즐거우셨냐는 대목에서 삼부작 등장인물 전체가 무대 위로 등장해 도열했다. 와... 이게 정녕 독일의 연출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반지> 피날레 장면이라도 되는 줄 아시나. 마지막 장면에 등장인물들 다 같이 쏟아지면 세 작품이 초싸이언 합체라도 할 수 있나요. 아내님도 이런 장면들을 포함해 연출 전반적으로 한국에서 본 국립오페라단 공연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국오 의문의 1승


내 자리가 무대가 한눈에 다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연출가가 정면에서 바라보는 뷰만 생각하고 연출한 것 같아 내가 더 평에 인색한 것도 있다. 하지만 저런 시도들이 설득력을 가질 만큼 디테일한 분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품 안의 디테일을 찾아 끌어올리는데 집중하지 않고 괜히 작품 간의 연결고리만 인위적으로 끼어넣으려고 하니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카발/팔리 조합이나 팔리/외투 처럼 별개의 작품을 같이 공연하며 연결고리를 넣는 시도는 이 두 작품을 한번에 공연하는 것에 대한 명분 만들기 같은 것으로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왜 삼부작에서 까지 이럴까? 각각의 작품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될 텐데 말이다. 공통점을 찾아내서 적당히 강조하는 것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왜 없는 연결 고리를 인위적으로 넣으려 애쓰냔 말이다.


연출은 실망스러웠지만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외투>에선 딱히 좋아하지 않는 볼프강 코흐가 아쉽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에바마리아 베스트브룩은 무거운 소프라노 역에서는 현역 세손가락 안에 꼽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는 가수였는데 기대한만큼 잘해줬다. 노래톤과 성량은 기본이고 연기나 프레이징이 물흘러 가듯 자연스러웠다. 제일 놀랐던 건 루이지 역의 이용훈이었다. 이름과 활약상은 많이 들었지만 정식 발매된 영상물이나 음반으로 들어본 적이 없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잘 안 왔다. 유튜브에 있는 영상들은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직접 들어보니 입이 딱 벌어지는 가수였다. 유튜브에서 들을 때는 목소리가 약간 답답한 느낌이 있었지만 직접 들을 때는 화끈하게 내주면서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약간 과장된 표현을 종종 했는데, 그 정도 감정의 폭을 표현해낼 수 있는 기량이 됐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연기 역시 거친 느낌을 잘 살려줘서 짐승남 루이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안젤리카>에서 에르모넬라 야호는 모범적인 목소리로 강렬한 연극 표현을 보여줬다. 이 스타 캐스팅 중에서도 박수를 가장 많이 받은 가수로 기억한다. 부담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극장 전체를 울려냈다. 미하엘라 슈스터는 이런 악역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가수다. 적당히 사악한 목소리와 몸에 벤듯 자연스러운 몸짓, 그리고 가사 소화력은 이보다 더 나은 가수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잔니 스키키>의 가수는 대체로 무난했다. 암브로조 마에스트리는 훌륭한 부파 가수라는 것 이외에 큰 인상은 없었다. 기대했던 파볼 브레슬릭은 내가 좋아하는 리누치오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리누치오는 패기 넘치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의 캐릭터라고 보는데 브레슬릭은 그러기엔 목소리가 너무 얌전한 편이다. 고통받고 고뇌하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리는데 눈치없을 만큼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조금 어색했다. 이런 역할에 잘 어울리는 가벼운 이탈리안 테너들은 흔하다 보니 더 아쉬운 것도 있다. 라우레타 역의 로사 페올라는 무난하게 잘해줬다. 



페트렌코의 지휘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빈 슈타츠오퍼에서 무언가 조잡한 밸런스 듣다가 페트렌코의 완벽하게 조탁된 음향을 만나니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들으면서 느낀 페트렌코의 음악적인 특징이 몇가지 있다. 첫째, 전반적으로 텐션이 높다. 완전히 힘을 뺀 상태로 편안하게 쭉 가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 <외투>나 <안젤리카>의 도입부 처럼 나른하거나 나긋나긋한 부분에서도 오케스트라에 대한 통제를 잃지 않는다. 프레이징을 위한 미세한 다이나믹 변화를 조금도 놓치지 않는다. 파파노 역시 오케스트라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가져가지만 그의 음악 진행은 비단결처럼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좋게 말하면 모범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놀라운 것이 없는 진행 말이다. 하지만 페트렌코의 진행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대체로 자신만의 흐름을 관철시켰다.

그 다음은 바로 반주가 극의 내용에 아주 깊게 간섭한다는 것이다. 일단 페트렌코 반주의 다이나믹 폭은 상당히 거대하다. 특히 쥐어짜내는 듯한 투티 포르티시모의 폭발력은 바이로이트 때도 느꼈지만 페트렌코의 특별한 사운드라고 느껴질 만한 힘이 있다. 페트렌코는 이 능력을 적재적소에 발휘한다. 몇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외투>의 프루골라 노래는 처음 들을 때 뜬금없이 들리기도 하지만, 이 노래는 조르제타의 중요한 안티테제라 할 수 있다. "심장(염통) 한 조각에 만족하며 사는 게 사랑 때문에 자기 심장 파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라는 마지막 외침은 조르제타의 바람과 정 반대다. 페트렌코는 이 부분을 대담한 루바토와 쥐어짜내는 듯한 강렬함으로 처리했다. 프루골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페라의 다른 부분과 대비될 만큼 격정적인 아티큘레이션 처리도 인상적이었다. <수녀 안젤리카>에서 처음에 수녀들이 혼나는 장면에서 오스미나 수녀가 장미를 숨겨 가져온 것으로 지적당한다. 이 때 오스미나 수녀는 Non è vero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페트렌코는 이 부분에서 나오는 현악 반주를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연주했다. 원래는 별 생각 없이 지나가게 되는 장면이지만, 반주가 이렇게 강조해주니 오스미나 수녀의 짧은 반항이 이 엄격한 사회에서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안젤리카가 공작 부인과 다투면서 "내 아들 만큼은 성모에게 봉헌할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친 뒤의 반주 역시 고통스러울 만큼 감정을 쥐어짜냈다.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있는 가사를 강조하기 위해 반주로 분명한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준 것이다. 페트렌코의 극적 센스가 남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연주였다.

그러면서도 오케스트라의 균형이 전혀 깨지지 않는 것 역시 놀라운 점이었다. 과연 이 오케가 내한 공연때 기량이 모자라다고 까인 그 오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들을 위한 변명을 궁리해보자면, 다른 공연장으로 투어를 가는 것이 다른 콘서트 오케스트라에 비해 확연히 적기 때문에 새로운 극장 음향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뭐 뮌헨 공연에서도 거창한 삑사리로 시작한 거 생각하면 단원 기량이 후달리는 게 사실일 것 같긴 하다.

뮌헨에서 페트렌코 인기는 대단했다. 페트렌코가 입장하거나 커튼콜에 나왔을 때 환호는 확실히 컸다. 내 옆에 앉은 아저씨도 열혈 팬인지 열심히 브라보를 외치셨다. 커튼이 완전히 내리고 난 뒤에도 주역과 지휘자는 두번이나 더 나와서 박수를 받았다.

 



연출까지 완벽했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나. 페트렌코의 오페라를 또 볼 기회가 생기길 바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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