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내부 최고존엄 인정합니다.


Nach Italien! 빈과 뮌헨의 일정이 끝나고 베네치아로 이동했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베네치아에선 무슨 공연을 볼 수 있을까 찾아봤다.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극장은 크리스마스 부터 연초 까지 휴가를 갖지만 라 페니체는 이 때 신년음악회를 올린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신년음악회 말이다.

사실 신년음악회에 썩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베를린필 송년음악회 DVD야 재밌게 보았지만 예전부터 빈 신년음악회는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단 왈츠와 폴카에 흥미가 없다. 라 페니체의 신년음악회 역시 영상 클립도 보고 했지만 이런 갈라 콘서트를 굳이 찾아보는 성격은 아니다.

페니체에서도 물론 가능하다면 오페라를 보고 싶었지만 이런 일정에 신년음악회를 해주면 그저 감지덕지일 뿐이다. 거기다 빈처럼 왈츠랑 폴카만 주구장창 하는 것도 아니고 오페라 갈라이니 곡도 내 취향에 맞지 않을까 싶었다. 여름에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아직 프로그램이나 지휘자가 발표되지 않았었다. 아마 가수 두명이 나와있었고 프로그램은 "Va pensiero와 Libiamo nel lieti calici 를 포함한 여러 곡"이라고만 나와있었다. 저 두 곡은 페니체의 도나우와 라데츠키라고 할 수 있다. 음악회의 마지막에 항상 고정 편성. 대신 앵콜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정규 프로그램으로 들어간다. 하긴 어줍잖게 매번 고정 앵콜로 저 두곡을 하면 빈필 따라한다고 욕먹겠지. 찾아보니 페니체 신년음악회는 2004년부터 시작했으니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수수한 외관은 훼이크일 뿐


원래 예정된 가수는 프란체스코 멜리와 마리아 아그레스타였다. 둘다 유명한 가수고 좋아하는 가수라 기뻤지만 멜리는 이미 두번이나 봤기에 다른 유명한 가수가 나왔어도 좋았겠다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참 주제를 모르는 욕심이었다. 나중에 마이클 파비아노로 바뀌었더라.... 그러니까 멜리가 캐스팅 됐을 때 감격하며 기도했어야 하는데ㅜㅜ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지휘자가 발표됐다. 어라 정명훈이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페니체 양반 내가 이탈리아까지 가서 정명훈을 보게 된다는 거요??? 내가 정명훈 참 좋아하긴 하지만... 서울시향 연말 베9도 몇번 보러갔었는데 이탈리아에서까지요??ㅋㅋㅋㅋ 역시 한국인은 연말에 정명훈을 봐야만 하는 그런 뿌리깊은 전통이 있나보다.



그리고 티켓을 사야하는데. 예전에 남아있던 티켓이 지휘자 발표 나고 할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거의 매진이 됐다. 가장 높은 프리미엄이 붙는 1월 1일은 매진이고 내가 보려고한 12월 31일도 시야제한석, 그것도 한두 자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눈앞에서 공연을 놓치나 하고 허망해하며 열심히 구글링을 해봤다. 그런데 A&A티켓이라는 데서 버젓이 신년음악회 표를 팔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데 공홈 티켓가보다 프리미엄을 잔뜩 붙여놨더라. 보아하니 빈, 로마, 베네치아 처럼 관광객들이 음악회를 찾을만한 도시를 골라서 티켓을 파는 회사 같았다. 여행와서 갑자기 티켓 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 미리 사놓고 비싼 값에 파는 게 아닐까 싶었다. 티켓값이 많이 비싸긴 했지만 과감하게 질렀다. 


걱정되는 건 하나. 비행기였다. 뮌헨에서 베네치아까지 기차로 가긴 너무 오래걸리니 비행기를 타기로 했는데, 비행기가 2~3시간 정도 지연된다면 공연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공항에서 호텔에 가고 극장에 가는 길을 몇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다행히 비행기는 제시간에 출발해 무사히 도착했다. 공항에서 베네치아 본섬까지는 수상 버스를 탔다. 바포레토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보트로 공항 - 대운하 까지 가는 수상 버스가 있더라. 공연이 오후 4시라 호텔에 짐만 놓고 바로 다시 나왔다.

빈이랑 뮌헨에서 힘들었던 건 먹는 것이었다. 아내님은 그 전날 뮌헨에서 시킨 시저 샐러드가 향이 센 치즈 범벅에 앤초비까지 들어있어 먹는 건 고사하고 냄새를 맡는 것까지 힘들어 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로 갔으니 먹을 것에 대한 기대가 꽤 컸다. 점심을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어서 무얼 먹을까 고민하던 차에 골목에서 간이 파스타집을 발견했다. 그냥 선택한 파스타를 즉석에서 삶아서 선택한 소스를 뿌려서 주는 가게. 그런데 맛있다. 다른 토핑도 없는데 그냥 맛있다. 극장 내부의 바에서 시킨 카푸치노도 정말 맛 있어서 둘다 감동하며 마셨다.

극장에 가서 바로 티켓 창구로 갔다. 좌석번호까지 받긴 했지만 혹시나 그 티켓 사이트가 관광객 등쳐먹는 사기가 아닐까 걱정도 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티켓이 온전히 있더라. 다른 관광객이 극장 내부 투어를 하려고 들어왔다가 공연이 있어서 안된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페니체 극장은 따로 오페라를 보러 오지 않아도 내부 구경을 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아보였다. 


극장 로비에서 한참 사진을 찍다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헉.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객석 1층의 중앙출입구에 있는 커튼 너머로 보이는 극장 내부는 정말 별세계의 것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극장을 본 적이 없다. 퀴빌리에나 가르니에 들어가서도 입이 벌어졌지만, 페니체는 그냥 클라스가 다르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단 퀴빌리에나 가르니에처럼 조명이 어둡지 않고 극장의 내부 색 역시 훨씬 밝은 색채를 사용했다. 대체로 오페라 극장들의 색상 조합이 붉은색, 흰색, 금색 계통을 사용하는데 비해 페니체는 흰색과 금색, 여기에 청록색과 초록색을 더했다. 여기에 신년음악회에만 등장하는 꽃장식이 프로시니엄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색채 감각은 찬미해야 마땅하다.


이 꽃장식들 다 생화입니다.


우리 자리는 박스석1층, 그것도 중앙에서 두번째 박스인데다 첫번째 줄이었다. 편하게 공연을 보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최적의 자리였다. 압도적인 화려함에 우리 둘은 그저 넋을 놓고 구경하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우리 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객석을 돌아다니다보니 체감상 이탈리아어보다 독일어가 더 많이 들리는 느낌이었다. 우리 박스에 같이 앉은 중년 부부도 독일인이었다. 아니면 오스트리아..?  이야기하는 거 듣고 독일이라는 걸 알았는데, 잠깐 지나가려고 내가 비테 쇼ㅣㄴ이라고 말하니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셔서 순간 내가 못할 말을 한건가 하고 당황했다.

공연이 시작하고 정명훈이 입장했다. 라 스칼라 내한 이후 처음 보는 거다. 첫 곡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이었다. 왜 하필 7번이나 8번도 아닌 9번일까 안타까웠지만 별 수 있나. 

그렇게 시작한 드9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좋은 연주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오케의 한계가 뚜렷해보였다. 이탈리아 오케스트라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현악기는 1악장 도입부의 싱코페이션 어택을 계속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정말 이게 최선입니까ㅠㅠ 목관은 1악장이나 3악장의 텅잉이 불분명했다. 어떤 사람은 길게 내고 어떤 사람은 짧게 내고 기본적인 통일도 이뤄지지 않았다. 4악장에서 호른이 죽어나는 장면에서는 역시나 또한번 한계를 보여줬다. 전체적인 블렌딩도 부족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목관의 소리가 유독 작아 목관 나오는 부분만 비정상적으로 작게 들렸다. 현은 대체로 거칠었고 금관의 어택 역시 명확하고 자신감있지 않았다. 정명훈과 함께한 전성기 서울시향이 이것보다 훨씬 나을 거다.

오케의 기량 때문인지 해석 역시 정명훈 답지 않았다. 정명훈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렇게 심심했던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명훈 특유의 아고긱 같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한국에서 했던 충드9 공연이 아주 좋았다는 걸 보면 여기서는 오케 수준에 맞춰서 적당히 한게 아닐까 싶다. 애초에 오케스트라 입장에서도 1부 교향곡은 그냥 시간 때우기 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주는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이 극장에서 바라보는 오케스트라는 정말 아름다웠다. 1층의 수많은 관객 너머로 꽃으로 장식된 프로시니엄이 있고 그 안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마치 화려한 액자 안에 있는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8K UHD화질로 말이다. 그 전자상가 가면 TV 색감 강조하려고 HDR의 엄청 화려한 영상을 틀어주는데 마치 그런 걸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이상하리 만치 깊이감이 느껴졌다. 객석의 불이 상당히 밝았기 때문에 1층의 수많은 관객들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데다 화려한 프로시니엄 때문에 깊이감 쩌는 3D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커튼콜 때 정명훈 사진을 찍는데 무슨 화보 장면 처럼 찍힌다.

영상에서 보는 것과도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영상에서는 그냥 금빛 예쁜 홀이구나 싶은데, 직접 보면 그 세세한 색채감이 끝내준다. 이건 진짜 눈으로 봐야한다. 


홀이 이렇게 예쁜데 오케가 연주 좀 못하면 뭐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인터미션 때 얼른 사진이나 많이 찍어야지!! 신년음악회 영상에서 괜히 홀 여기저기 많이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이날 공연은 중계되는 건 아니었지만 열심히 찍더라. 박스석 말고 1층에 앉았으면 아마 짜깁기하면서 이날 객석 화면을 쓸때 내 모습이 찍혔을지도..?  너무 여기저기 다녀서 감상에 지장이 갈정도긴 했지만 이해해주기로 했다. 


기대를 놓고 편한 마음으로 2부를 듣는데 이게 웬걸. 방금 전이랑 같은 오케스트라 맞나요?? 너희 아까 이런 앙상블 안 됐잖아?? 드보르자크에서 안되던 텅잉이 왜 베르디랑 로시니에선 갑자기 되는거죠ㅋㅋㅋㅋㅋㅋ 이미 카르멘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더니 <트라비아타> 투우사 합창에서는 아주 날아다닌다. 여기에 합창단의 실력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런 게 바로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의 합창단이구나. 라 스칼라 합창단만 잘하는 건 줄 알았는데 페니체도 상당한 수준을 보여줬다. 음정도 깔끔하고 거기다 칼딕션이 뭔지 보여준다. 이탈리아어 상대적으로 딕션이 쉽다고 해도 역시 네이티브 합창단은 다르다. 이날 공연에서 하이라이트로 꼽을만 했다.

<호프만> 뱃노래 역시 편안하고 감미로웠다. 베네치아에서 듣기 참 좋은 음악 아닌가. 그리고 기대 안하던 마이클 파비아노가 등장했다. 첫곡은 만토바 공작의 퀘스타 오 퀠라.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일단 파비아노가 생각보다 꽤 잘 불렀다. 공작 다운 쾌활함과 열정이 가득 담긴 노래였다. 둘째로 극장의 음향이 가수의 노래를 듣는데 완벽하게 어울렸다. 자리의 방향이 좋아서인지 가수가 꽤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아주 뚜렷하게 잘 들렸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문화회관들 처럼 건조한 쌩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잔향이 소리를 어지럽히지도 않는 환경이었다. 

파비아노 잘하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결국 마지막 고음을 제대로 못냈다. 저번에 봤던 보엠에서도 하이C를 망쳤는데 이번에도 결국 마지막 고음을 망쳤다. 

마리아 아그레스타는 실망이 컸다. 이 공연 이틀 전인가에는 아파서 못 나왔다고 그러던데 이날도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을까. 찾아보니 이 바로 전날까지 대타인 세레나 파르노키아가 공연을 대신 섰다. 아그레스타 입장에서 메인 공연인 1월 1일 이전에 리허설 삼아서라도 

무대에 서보고 싶었을 수 있다. 오 미오 바비노 카로는 바로 전날 들은 곡이었으니 더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목소리도 두터워서 곡에 잘 안 어울리고 어떤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느낌? 비브라토도 심해서 음정도 불안했다. 


그 뒤로 폰키엘리 시간의 춤과 로시니 알제리의 이탈리아인 서곡이 이어졌다. 정명훈의 로시니는 아마 처음 듣는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더라. 듣고 있으니 이게 바로 신년음악회 듣는 맛이구나 깨달았다. 주옥같은 명곡들을 이렇게 좋은 오케스트라(1부와 2부 오케스트라는 아마 다른 오케였을 거다)로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프로그램 공연을 별로 안 좋아했던 건 프로그램이 구려서가 아니라 이런 프로그램일 수록 퀄이 떨어지는 공연이 많아서였던 것 뿐이었다.


그 다음에 다시 파비아노와 아그레스타의 푸치니 아리아 쇼. 각각 네순 도르마와 운벨디를 불렀다. 파비아노가 알프레도랑 로돌포 하던 목소리로 어떻게 네순 도르마를 부르려나 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목소리 갈아넣는 열정이 느껴지는 노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좋았다. 하지만 역시나 고음 불가 병은 고쳐지지 않았는지 빈체로에서 제대로 목소리 뒤집어졌다. 관객들은 참 아량이 넓어서 브라보 까지 여럿 터져나왔다. 아그레스타의 어느갠날은 바비노 카로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불안했다. 오히려 정명훈의 반주가 더 빛나는 순간이었다. 선율이 아름답게 흘러가기 위해 전체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다듬는 능력이 탁월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나비부인 전막은 어떤 모습일까. 

사이에 들어간 오텔로의 3막 발레. 오텔로에 발레가 있었나?!?! 삭제되는 게 보통이지만 들어가 있다. 3막의 어둡고 폭력적인 흐름에 잘 어울리지 않아 자주 생략되는 것 같다. 베르디 악보에는 꿀이라도 발라져있는지 오케는 역시나 1부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은 것은 고정곡 두 곡인 히브리 합창과 브린디시. 히브리 합창은 신파적이지 않고 오히려 희망에 가득찬 기쁨의 노래 같았다. 합창단의 또렷한 음정과 강렬한 음색을 즐길 수 있었다. 반대로 브린디시에서는 가수 두명이 정신줄을 놓는지 음정까지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도대체 왜 그러시나요... 앵콜로 브린디시를 한번 더해줬는데 음정 틀린게 조금 더 나아졌다. 가수 두명 빼고 합창단이랑 오케만 연주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이렇게 복기하면서 쓰니까 구린 공연인 것 같지만, 그런 극장에서 보면 별로인 노래도 아름답게 들린다. 사람이 한없이 너그러워짐. 쟤네들이 노래를 못하는 건 상관없다. 하하하 제가 언제 가수들 노래 잘하는 것만 듣고 다녔나요. 극장이 예쁘면 다 용서가 됩니다. 이 공연은 배경음악 틀어놓고 극장을 구경하는 거죠. 비싼 티켓을 사니까 극장 구경할 때 가수들이 배경음악도 불러주네요 ^^  아내님도 공연 끝나고 여기 더 있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관객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진을 찍었지만 극장 측은 내보내려고 조명을 서서히 끄더라ㅜㅜ 


여러분 페니체 꼭 가세요 두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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