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발레와 현대 안무의 적절한 타협



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 시즌의 패왕이자 많은 발레단의 효자 수입원이다. 대전에서 한번 (아마도) 유니버설 발레단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발레를 잘 몰랐던 데다가 오케도 없는 MR 반주, 동화 분위기에 무난한 고전 안무라 큰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다를 때 같았으면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갈 일이 없었겠지만 이 시즌에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하는 공연이 호두까기 인형 뿐이었기 때문에 공연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예매했다. 작품 자체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발레다보니 오페라에 비해 예습의 어려움도 없어 아내님께 같이 보러가자고 하기도 좋았다.


베네치아 이후 피렌체, 아시시를 들렸다가 로마로 왔다. 오페라 팬이 로마에 왔으면 어딜 가겠습니까. 산탄드레아 성당! 파르네세 궁전! 산탄젤로 성! 이 토스카 코스로 성지 순례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산탄드레아 성당은 오후라 닫혀 있었고, 볼 게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파르네세 궁전까지 걸어가자고 하기엔 사람으로서 염치라는 게 있었다. 사실 산탄드레아 성당 역시 굳이 찾아가자고 할 염치가 없었다. 그냥 혹시 근처에 있으면 갈까 싶어서 찾아봤었을 뿐. 그런데 우리가 지나가면서 들어갈까 했던 성당이 바로 토스카에 나오는 그 성당이었다. 하하 오페라 시간도 헷갈려서 놓친 사람인데 성지 순례라고 잘 했겠습니까..... 

그래도 산탄젤로 성은 워낙 유명한 관광지이니 함께 가자고 할 수 있었다.



오페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익숙한 칼을 뽑은 대천사 미카엘의 상  

바로 산탄젤로 성 꼭대기에 있다. 


올라가면 로마의 수많은 성당들이 보인다. 당연히 산피에트로 대성당도 보이는데 그 각도에서는 인물사진만 잔뜩 찍고 정작 풍경샷은 안찍음ㅠㅠ


성지 순례 기념 샷.

아내님이 나한테 카바라도시 처럼 총맞는 컨셉 사진 찍어보지 않겠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씹덕처럼 보일까봐 자제했습니다...


로마에 오가는 날짜 빼고도 온전히 4일은 있었지만 결국 산탄드레아 성당과 파르네세 궁은 못 가봤다. 로마에 또 볼걸 남겨놔야 다음에 또 가지 않겠습니까. 



로마 오페라 극장은 건축가 도메니코 코스탄치의 이름을 따 코스탄치 극장이라고도 부른다. 마침 로마 박물관(Museo di Roma)에서 오페라 극장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공연 보기 전날 시간이 남아 전시를 봤다. 오페라 극장에서 사용한 여러 의상이나 소품, 스케치 등을 전시해놓았다. 로마 오페라의 가장 큰 자랑은 바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초연과 토스카 초연이다. 그 외에 잔도나이의 줄리에타와 로메오도 로마 극장에서 초연했다. 1880년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메이저 극장 치고 주요 작품 초연이 많지는 않다. 


극장이 있는 광장은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의 이름을 땄다.


토스카 하면 떠오르는 2막의 그 빨간 드레스나 마리아 칼라스가 입은 투란도트 옷 등 다양한 의상이 전시돼있었다. 느낀 건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 치고 상당히 현대적인 디자인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호두까기 인형도 이런 스타일이지 않을까 기대가 됐다.


당연하지만 결혼 준비랑 논문 때문에 바쁜데 공연 예습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예매는 해뒀지만 안무가가 누구인지, 안무 스타일이 어떤지, 호두까기 인형 다른 안무는 어떤 느낌인지 미리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 






라 페니체를 보고 왔기 때문에 극장 내부에 들어섰을 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안 예쁜 건 절대 아니고. 무게감 있으면서 세련된 극장이었다. 전형적인 말굽형 극장으로 페니체보다는 조금 컸지만 요즘 지어지는 극장들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다. 흰색에 가까운 금색과 옅은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 극장이었다.


안무는 줄리아노 페파리니Giuliano Peparini가 맡았다. 두 시즌 전부터 이 프로덕션으로 올리고 있었다. 찾아보니 이 안무가는 태양의 서커스나 프랑스 뮤지컬 <1789 바스티유의 연인들> 등에서 안무를 맡았다. 전형적인 발레 안무가이기 보다는 대중적인 장르에 어울리는 감각이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었다.

지휘자가 유광 셔츠를 입은 게 아니다. 땀으로 아예 샤워를 했다. 


이탈리아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이제 마음을 비웠다. 지휘자는 키로프 발레단 솔리스트 출신의 부모를 두었으니 태어날 때부터 발레 전문가였을 테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이탈리아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해볼 순 없었다. 서곡부터 현악기의 음이 명확하지 않더니 막이 오른 첫곡에서부터 부드러운 퍼스트의 멜로디는 대충 뭉개졌다. 오케스트라 피트의 음향도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아 금관의 소리만 너무 두드러지고 현악기의 소리를 듣기에는 전반적으로 잔향이 심한 편이었다. 

반주의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안무는 상당히 즐거웠다. 1막에는 프리츠 이외에 한명의 악동을 더 추가해 무도회 내내 갈등이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둘의 큼직큼직한 움직임은 음악과도 잘 어울렸고 워낙 역동적이라 보기에도 즐거웠다. 



막의 내용도 바꿨다. 1막의 전투 장면은 2막으로 넘어갔다. 왕자가 나타날 일이 없으니 눈송이 왈츠 장면은 마리와 프리츠의 베개 싸움으로 깃털이 휘날리는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 마리와 왕자의 꿈나라는 2막에서 시작. 전투 장면은 디베르티스망 앞에 들어갔다. 1막에 추가했던 악동 일당들이 쥐 분장을 하고 와서 마리와 왕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연출했다. 재밌는 건 왕자가 이 패거리들을 때려잡긴 커녕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다가 드로셀마이어의 경호원들이 와서 처리해주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위기의 여자를 구출해주는 왕자님 클리셰를 깨버렸다.

디베르티스망은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게 느껴졌다. 각각의 춤이 이어질때마다 무대 구조를 적당히 바꾸고 프로젝션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완전히 다른 분위기들을 만들어냈다. 안무의 스타일 역시 춤마다 크게 달랐다. 스페인 춤에서 여자가 투우사 복장을 입고 나오고 남자가 화려한 치마를 입고나오는 과감한 크로스를 시도했다. 이 장면 보면서 안무가가 게이가 아닐까 싶었는데 구글 연관 검색어에 è gay, est gay 가 나오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루하기 쉬운 아라비안 댄스도 오묘한 느낌을 잘 살려줬다. 중국인의 춤에서 일본풍의 그림이 나오는 건 너무 전형적인 서구인의 시각이라 씁쓸하긴 했지만. 꽃의 왈츠는 비교적 얌전했는데, 30명이 넘는 무용수들이 무대를 꽉 채워서 같은 동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의상 하나하나를 정말 잘 살려냈던 것도 무용을 살려냈다.

현대 스타일을 많이 쓴 디베르티스망과 달리 파드되는 고전발레 스타일을 따랐다. 이 때 되니까 의상도 갈아 입더라. 안타깝게도 주역 무용수 중 왕자의 경우는 불안불안 해보이는 부분도 있었고 전반적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마리 역의 발레리나는 우아한 몸동작도 좋고 턴도 아름다웠다. 아다지오에서는 투티가 터질 때 리프트 동작으로 포인트를 줬는데 문제는 이 리프트에 올인 하느라 앞뒤로 동작들이 너무 얌전해졌다는 건 좀 아쉬웠다.


그 뒤로 이어지는 피날레에는 다시 마리의 집으로 배경이 바뀌고 마리가 꿈속에 나왔던 왕자가 드로셀마이어의 조카라는 걸 알게 되고 둘이 만나는 걸로 마무리 됐다. 이때 잠깐 프리츠가 잠 깨면서 추는 춤이 왕자 춤보다 멋있었던 게 함정.


지금까지 발레 보면서 춤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장면들이 꽤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발레 후기 써주시는 다른 블로그 이웃분들 눈팅하면서 발레에 대한 눈이 조금 더 발전한 것도 있었던 걸까. 여기에 기본적으로 안무가 참 대중적인 스타일로 잘 짜여져 있었다. 호두까기 인형의 단순한 줄거리 안에서도 극이 멈춰있지 않고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도록 신경썼던 점도 효과가 있었다. 





커튼콜 마지막에는 은퇴하는 단원에 대한 감사인사가 있었다. 기억나지 않지만 20년이 넘었다고 했나? 여하튼 근속 기간이 발레 단원 치고 상당히 길어서 놀랐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은 여전히 물음표이지만, 이 정도 수준의 안무와 연출로 호두까기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하긴 로열 오페라도 발레 반주할 때 오케스트라가 개판이었던 걸 생각하면, 사골 레퍼토리라 그나마 좀더 괜찮게 뽑아준 것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음악을 논외로 하면, 내가 본 발레 공연 중 가장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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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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