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더블빌.



표지에 푸치니 <잔니 스키키>만 박혀있지만 사실 라흐마니노프의 <인색한 기사>도 수록돼있다. 표지 제일 밑에 작은 글씨로 써져있고, 뒷면 Extra Features 리스트에도 Rachmaninov The Miserly Knight 라고 써져있다. 아무리 인지도 차이가 난다지만 이렇게 엑스트라 취급 해도 되나요ㅠㅠ


<잔니 스키키>와 <인색한 기사>는 비슷한 점도 있고 대비도 뚜렷하다는 점에서 비교하기 흥미로운 작품이다. <잔니 스키키>는 돈 많은 부자가 죽어 유산 때문에 생기는 유쾌한 희극이지만 <인색한 기사>는 돈만 아는 아버지가 아들이 자신의 돈을 탕진할까봐 전전긍긍해 하다 일어나는 비극이다. 유산에 얽힌 이야기가 상반된 분위기로 풀어진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때문에 카브 & 팔리, 팔리 & 외투 처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아니라 상반된 작품을 붙였으면서도 오히려 두 작품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두 작품에 단순히 희극과 비극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잔니 스키키>는 오페라 중에 손꼽을 만큼 연극적인 작품이다. 극의 진행이 멈추는 아리아는 거의 없으며 사건의 템포가 매우 빠르며 흥미진진하다. 반대로 <인색한 기사>는 비슷한 길이이면서 일어나는 사건이 매우 적다. 

<인색한 기사>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들은 창시합과 궁정 생활에 빠져 빚을 지지만 돈 많은 아버지 남작은 돈을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들은 유대인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고, 유대인은 돈을 빌려줄 순 없고, 남작을 독살해 유산을 얻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다. 아들은 패륜을 부추긴다며 유대인을 쫓아낸다. 아들은 공작에게 가서 사정을 하소연하고, 공작은 아버지를 불러 대면시킨다. 남작은 아들이 자기 돈을 노려 자신을 죽이려한다고 말하고 아들은 억울하다며 분노하며 달려든다. 남작은 아들의 행동에 놀라며 결국 죽는다. 

<인색한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 줄거리 요약에 들어가지 않는 2장이다. 2장은 남작이 자신의 금고를 채우며 탐욕스럽게 부르는 노래로 채워져있다. 남작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며 오로지 남작의 독백만 등장하는 장면이다. 1장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고, 3장에서의 비중 역시 크지 않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어려운 역할인 이유가 바로 2장의 바그너스러운 독백 때문이다. 남작은 돈을 모아둔 상자에 열쇠를 꽂아 열어보곤 그 황금의 광휘에 취해 쾌락을 느낀다. 해설은 이 부분이 성애를 연상시킨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잔니 스키키>의 템포와 <인색한 기사>는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등장인물의 면면 역시 차이가 크다. <잔니 스키키>는 짧지만 독창자 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작품이다. 세어보니 총 15명이나 된다. 이보다 네 배나 더 긴 <발퀴레>에서 등장하는 가수의 수가 14명이다. 반면 <인색한 기사>는 합창단 없이 다섯 명의 인물만 나온다. 그 중에 여자는 한명도 없다. 내가 아는 오페라 중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작품이다. 참고로 여자만 등장하는 오페라로는 역시 단막 작품이며 <잔니 스키키>보다 앞서 공연되야하는 <수녀 안젤리카>가 있다.


유롭스키는 <인색한 기사>에서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건 절대 아니다. 전주곡은 물론 1장 시작부터 아주 명확하게 라흐마니노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독특한 리듬과 음형을 라이트모티프로 삼아 극 내내 활용하는데 교향곡 2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스타일이다.

원래 라흐마니노프는 <인색한 기사>의 타이틀롤인 남작 역을 샬리아핀에게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샬리아핀은 예술적 견해의 차이로 이 역할을 사양한다. 유롭스키는 '예술적 견해 차이'는 핑계일 뿐이고, 샬리아핀이 이 역할을 포기한 이유는 음역이 자신에게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 역할은 베이스가 부르기에는 너무 높고, 바리톤이 부르기에는 너무 낮은 역할이라고 한다.


공연의 완성도는 빼어난다. <잔니 스키키>가 원래도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애나벨 아든Annabel Arden의 연출은 유머포인트가 확실히 잘 살아있다. 알레산드로 코르벨리는 협잡꾼 같은 스키키가 아니라 매력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인색한 기사> 역시 세르게이 라이퍼쿠스Sergei Leiferkus가 무난하게 잘 해주고, 아들 역을 맡은 리처드 버클리스틸Richard Berkeley-Steele도 러시아 작품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유롭스키의 지휘는 런던필에서 안정적이고 세련된 사운드를 뽑아내는데, <잔니 스키키>에서보단 <인색한 기사>의 반주가 더 인상적이었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