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리에주에 있는 왈롱 왕립 오페라 극장의 공연이다. 예전에도 썼지만 네덜란드가 이름난 오페라 극장이 DNO밖에 없는것과 달리 (로테르담에도 상설 오페라단이 없다) 벨기에에는 꽤나 큰 오페라 극장이 세 개나 있다. 수도 브뤼셀의 라 모네,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랜더스 지방의 플란더렌, 그리고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 주의 주도 리에주의 이 극장이다. 오페라 극장이 많으려면 역설적으로 나라가 잘게 쪼개져야 하나보다. 독일에 오페라 극장이 많은 이유, 특히 베를린에 그렇게 메이저 규모의 오페라 극장이 세 개(최소 두개)나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다. 다르게 말하면 괜찮은 오페라 극장은, 한 문화권 당 하나가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벨기에의 문화적 복합성은 이 점에서 좀 유리하다. 이 정도 크기의 극장이 서로 차로 한시간 거리 정도로 붙어있는 곳은 독일이나, 아니면 벨기에 만큼이나 복잡한 문화구성을 자랑하는 스위스 정도밖에 없을 테다.


다이나믹 레이블에서 이런 극장의 공연을 영상물로 발매해주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공연의 퀄리티를 떠나서 더 많은 공연이 기록돼고 출판됐으면 좋겠다.



리에주 극장 정도면 괜찮은 극장이지! 라고 생각하고 켰지만 생각보다 아쉬운 점이 많이 보였다. 1막의 오케 합주력이라든가 합창단과의 앙상블은 많이 무너졌다. 주역 두명은 잘해줬지만 오빠 레스코가 핵구렸다.


좀 처럼 없는 일인데, 영상을 보면서 작품 자체에 회의가 들었다. 군더더기가 많아보였고 작품이 너무 가벼워보였다. 원래 오페라 코미크에서 공연된 작품이고 원작 소설 역시 통속소설이라곤 하지만 이 오페라는 특별히 얄팍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작품에서 마농과 데그리외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너무나 오락적으로만 쓰였기 때문인 것 같다. 마치 한국 오락영화를 보면 뻔한 캐릭터와 뻔한 장면을 넣어서 진부하게 만드는 것 처럼 말이다. 


1막 처음 시작에 배고프다고 소리지르는 조연 1 2 3 4 5의 이야기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나? 이런 스타일의 정점은 바로 레스코, 마농의 오빠다. 1막에서부터 시덥잖은 노래를 부르고, 2막에서는 부파의 한 장면인 냥 개그캐가 돼있고, 3막 1장에서는 또 아무 맥락 없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구애하는 노래를 부르고, 4막에서는 또 도박 노래를 부른다. 도대체 이 노래는 왜 존재해야하는걸까? 그리고 저 노래를 부르는 배역이 다 레스코여야할 필요가 있나? 마스네가 작곡하면서 바리톤 역한테 쌈짓돈이라도 받았나 싶다. 이 공연에선 짤렸지만 심지어 5막에서도 등장해 잠깐 노래를 부른다.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들이 모두 극의 진행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카르멘 1막에 얼마나 많은 합창이 나오나. 오네긴 2막 생일 파티에도 뜬금없이 트리케의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중요한 노래 부르는 단역으로 치면 장미의 기사의 이탈리아 가수를 빼놓을 수 없을 거다. 


그래도 저 곡들은 극 중에서 나름의 역할이 있다. 카르멘의 합창은 군인, 어린아이, 담배공장 직공들이 섞여있는 세비야의 풍경을 알려준다. 트리케의 노래는 이 잔치가 타티아나의 생일잔치라는 걸 분명히 해준다. 장미의 기사 1막은 부인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음악들은 듣기에도 좋다.


문제는 레스코가 부르는 노래들이 하나같이 다 노잼이라는 거다. 지루하진 않지만 오페레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차라리 오페레타처럼 대놓고 신나면 재밌지만 이건 노래도 동요수준으로 단순한데 반복도 많다. 


글을 쓰며 찬찬히 생각해보면 레스코는 그냥 그 당시 가장 천박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1막에서는 자기 맡은 일도 안하고 도박을 하러 가고, 2막에서는 남의 집에 침입해 협박을 하고 3막에서는 아무 여자에게나 추근대며 4막에서는 도박을 찬양한다. 뭐 원작 소설에서도 이런 인간이긴 한데, 차라리 마농과 데그리외를 파멸로 이끄는 악인으로 표현되면 모를까 이건 너무 가볍다. 오페라 안에서 레스코는 하는 일이 뚜렷하게 없이 그저 분위기 메이커 수준만 되어버린다.



이 작품에 묻어나오는 가장 ‘오락’적인 부분은 바로 3막 1장에서 마농을 위해 거리 오페라 발레를 펼치는 장면이다. 음악 자체도 대놓고 비꼬는 것처럼 유치하게 프랑스 바로크의 춤곡을 흉내낸다. 차이콥 <스페이드 여왕>에서 나오는 모차르트 풍 무도회 장면이 이렇게 싫진 않았는데 이상하다. 일단 음악이 경박하고 오페라의 발레단이 한낱 돈 많은 귀족이 여자에게 부를 과시 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 나온다는 것도 날 짜증나게 했을 테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부분이 많을까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으면 마농과 데그리외 역 가수가 쉬지 않고 노래하느라 죽어나가야 한다. 이 둘 말고 다른 사람이 노래하며 시간을 좀 떼워줘야하는데 마농 이야기에는 적당한 악역이 없다. 마농과 데그리외를 찢어놓는 것이 한명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트라비아타 처럼 아버지가 와서 모든 계획을 꾸미지도 않고, 카르멘 처럼 에스카미요라고 하는 분명한 연적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배경이 이국적이지도 않아 신기한 합창 같은 걸로 분량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푸치니와 일리카 등이 똑똑했던 건 이야기의 큰 악역을 한명으로 한정지은 점이다. 반면 마스네의 작품에선 그 악역을 레스코, 데그리외의 아버지, 기욤, 브레티니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나눠맡는다. 그러니까 레스코가 저렇게 쓸 데 없는 아리아나 부르며 시간을 떼우고 있는 거일 테다.



전반적으로 화려한 볼거리와 사치스러움이 너무 많아 알러지 반응이 왔다. 여기에 19세기 음악으로 18세기의 음악 어법을 흉내내는 것에서 오는 진부함도 한몫했을 테다. 오페라 보면서 이렇게 제끼고 싶은 게 많은 작품도 처음인 것 같다. 보통 극 진행이랑 상관이 크게 없는 부분은 음악이라도 좋기 마련인데 어째 여기서는 그런 장면들이 다 음악이 하나 같이 구리다. 1막 첫장면에서 식사 대령할 때 나오는 그 트라이앵글 소리는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싫다.



연주의 아쉬움도 이런 현상에 한몫했을 테다. 같은 날 다음에 본 빈 슈타츠오퍼에서는 그래도 레스코가 이 정도로 싫진 않더라. 리에주 공연의 레스코는 정말 개그캐도 아니고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이 멍청한 노래만 하고 있다. 반주는 전반적으로 괜찮지만 3막 1장에 반복되는 진부한 3:1:2 리듬 음형이 뭉개지면서 듣고 있기 메스꺼웠다. 제대로 연주해도 의미없이 화려한 느낌만 내는 음악인데 거기다 리듬까지 틀리면 일종의 고문이 된다.



주역 가수 두명은 꽤 훌륭하다. 마농보다는 데그리외 역의 리베라토레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찌르는 느낌의 목소리가 훌륭한 테너다. 그 외에 기욤 역의 테너가 목소리가 사악해 역할과 잘 어울렸다.


연출은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섞여있다. 전반적으로 무난한 무대 디자인이지만 가끔 깨는 장면들이 있다. 2막에서 마농의 심경변화야 말로 이 작품에서 마농을 어떻게 해석해내냐 중요한 갈림길이 될텐데, 너무 대놓고 나쁜 인간으로 만들었다. 데그리외가 잡혀가자마자 표정이 싹 바뀌며 브레티니가 입혀주는 코트를 쿨하게 입고 나간다. 근데 그 코트가 무슨 극세사 이불 기운 옷 처럼 생겨서 더 우습다. 이미 충분히 나쁜년으로 묘사되는 마농을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저렇게 매몰차게 버려놓고 바로 다음 막에 데그리외 찾으러 가는 거 너무 웃기지 않나.


오페라 서주를 데 그리외가 죄수가 된 마농을 쫓아다니는 시간으로 설정해 전체 이야기를 일종의 플래시백처럼 만들어놨다. 실제로 소설 역시 르 아브르로 끌려가는 마농을 데 그리외가 쫓아다니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페라 피날레에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무대 위의 거대한 마농 레스코 책이 펼쳐지며 이전 무대들을 보여준다. 행복했던 과거가 직접 무대에 보여지는 점도 좋고 그게 책의 한 챕터들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는 이 뒤로도 바뀌었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 영상 리뷰에서 하겠다. 이 공연에 대해 짧게 줄이면 괜찮은 장면이 몇개 있는 평범한 연출이고, 연주의 퀄리티는 역시 다른 메이저 극장에 비하면 아쉽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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