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제목 표기가 골치 아픈 작품이다. Feuersnot는 불의 필요, 불의 결핍이란 뜻인데 둘 다 어색한 표현이다. 수입사에서 정한 '사라진 불'이라는 표기는 조금 다른 표현이긴 해도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라 마음에 든다. 


알슈의 오페라 중 살로메 이전 두 작품은 듣보 취급을 받는다. 군트람과 사라진 불인데, 군트람은 얼핏 들어본 적은 있지만 사라진 불은 제목조차 처음 들어본 작품이다. 

아트하우스가 이것 저것 여러 영상물을 내놓고 있는데 이탈리아 극장에서 하는 슈트라우스 초기작이라니, 참 신선한 조합이다. 마이너한 작품이라도 알슈 팬들이라면 살 것이라고 믿었나보다. 신기하게도 자막이 영어, 독일어, 한국어다. 아트하우스 찬양합시다. 최근 발매한 영상물에는 대부분 한글자막이 포함돼있다.


사라진 불은 2시간이 채 안되는 오페라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보겠다. 뮌헨 근처의 어느 마을에서 하지 축제가 한창이다. 이 마을에 와서 집안에만 쳐박혀있던 마법사 쿤라트가 여주인공 디무트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그리곤 사람들 앞에서 강제로 디무트에게 키스. 디무트는 화가 나서 쿤라트를 유혹하는 듯 하다가 골탕 먹이고 창피를 준다. 쿤라트는 분노해서 마을의 불을 모두 꺼버린다. 그리고는 디무트를 바치면 불을 돌려주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디무트 보고 너가 괜히 내숭 떨어서 그렇다면서 화를 내고 결국 디무트는 쿤라트에게 자신의 몸을 내준다.


아 줄거리만 썼는데 화가 난다. 이 오페라의 리브레토는 쓰레기다. 어차피 처음 들은 음악인데 연주에 대해선 별다른 코멘트를 할 수 있는 건 없다. 가수나 지휘자나 그냥 별생각 없이 들어줄만 하다. 하지만 리브레토는 정말 쓰레기다. 뭐 수입사 설명에는 이 오페라가 반응이 안좋은건 슈트라우스의 자뻑이 너무 심해서라고 하던데 그냥 그걸 빼고서라도 내용이 쓰레기다. 

아니, 남자가 여자한테 강제로 키스하고 나서는 거절 당하니까 빡쳐서 마을 사람들 불을 뺏어가고 여자의 몸을 원하는게 강간이지 그럼 뭐야. 우리나라에서 공연한다면 쿤라트를 일베 유저로 묘사하면 딱일 것 같다. 거기다가 마을 사람들이 디무트에게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피해를 보지 않냐'라고 몰아세우는 장면은 헬조선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쿤라트가 디무트에게 '감히 사랑을 조롱하다니!'라고 셰니에나 쓸법한 대사를 치고 있으니 화가 안날 수가 없다. 쿤라트의 모습은 딱 알베리히다. 디무트 주위에 세명의 여자는 라인메이든을 연상시킨다. 자신을 유혹하는듯 하다가 조롱하는 여자를 보고 분개하는 모습도 알베리히와 같다. 근데 왜 이 미친놈은 너희가 감히 사랑을 조롱할 수 있냐고 적반하장이냐는 거다. 남자가 강제로 키스하는 건 착한 사랑이고 여자가 남자를 조롱하는 건 김치녀라는 수준이다. 


슈트라우스의 자뻑도 골치아프다. 바그너 찬양하면서 내가 바그너의 적통이라능! 이라고 일기장에 쓰는 건 아무 상관 없지만 왜 이상하게 오페라에 끼어넣냐는 것이다. 쿤라트는 본인을 상징하는데, 자신의 스승인 라이하르트를 떠받든다. 혹시라도 못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까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스승님을 까지만 우리 스승님은 정령의 왕이라능!' 이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발할 모티프를 연주한다. 

근데 이걸 이상한 부분에 삽입한다. 쿤라트가 불을 끄고 꼬장을 부리면서 너희가 자기 스승님을 무시했다면서 너희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왜 디무트한테 차이고 나서 마을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건데... 그냥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억지로 끼워 맞췄다. 너희들이 멍청해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고방식도 오페라에서 보고 있자니 짜증난다.


연출은 생각보다 전위적이다. 쿤라트를 대놓고 슈트라우스로 묘사하고 있으며, 마을 어린이들의 불쏘시개를 악기로 설정해서 이 마을에서 음악이 얼마나 천대받는지를 보여준다. 오페라 내내 기괴한 안무의 현대 무용을 사용하는데 마지막 Love scene(이라고 불러선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에는 아주 화려하게 잘 표현해낸다. 



리브레토가 시대에 뒤떨어져서 골치아픈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술 피리인데, 사라진 불은 그걸 뛰어 넘는 것 같다. 이걸 어떻게든 연출로 무마하려면 결말을 완전히 배드 엔딩으로 표현하거나 그나마 덜 병신같아 보이려면 디무트 역시 처음부터 쿤라트에게 반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표현을 못한것이라고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브레토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알슈가 이런 흑역사를 썼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한번 쯤 어떤 내용인지 봐볼만 하지만 돈 주고 탑 프라이스 블루레이를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린이 합창단을 상당히 많이 쓴다든지와 같은 특징이나 알슈답지 않은 부분과 전형적인 알슈 음악이 같이 나오는 느낌이라 음악적인 면은 나중에 한번 다시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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