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는 기욤 텔이다. Guillaume는 기요므에 가깝게 발음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자주 쓰이는 표기를 따랐다.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의 퀄리티는 상당히 좋다. 캐스팅, 연출, 녹음 상태 모두 어느 정도 보장이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샤브란의 마틸데는 누구 한명 부족하지 않은 대단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모세 역시 상당히 괜찮았다.


로시니 오페라 중에서 오텔로나 바빌로니아의 치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오텔로는 일단 베르디의 것과 비교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테너를 세 명이나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두 오페라 모두 로시니의 특성이 잘 나타는데 그게 이런 진지한 내용의 오페라와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로시니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는 이집트의 모세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기욤 텔은 어느 쪽일까 궁금했다.

플레이 타임은 딱 네 시간 정도다. 네 시간 동안 로시니 오페라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발매되자 마자 구입해놓고 여태 미뤄놨다.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은 뭐랄까, 나에겐 로시니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난 아직도 벨칸토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한 반주에 아름다운 선율 하나만 가지고 먹고 살며 극의 진행이 무시되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노래가 좋다지만 나한텐 다 거기서 거기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로시니는 뭔가 도니체티와 벨리니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는 걸 로시니 페스티벌 영상을 보면서 느끼게 됐다. 무엇보다 로시니의 경쾌하고 통통 튀는 오케스트레이션이 매력적이었다. 샤브란의 마틸데는 내가 처음 보면서도 재밌게 본 오페라다. 바그너 오페라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취급할 수 있는 것 처럼 로시니 오페라도 그런 개성들을 가지고 있다. 페사로 로페라 페스티벌은 그간 빛을 못보고 있었던 수많은 로페라들을 소개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공연을 만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로시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끌리게 만든다.


기욤 텔의 음악은 단 한번도 안들어봤지만 당연히 서곡 만큼은 아주 익숙하다. 4시간 동안 모르는 음악을 들을 거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가 익숙한 첼로 선율이 등장하니까 조금 당황했다. 아 물론 내가 설마 기욤 텔 서곡이 뭔지 몰랐겠냐만, 당연하게도 아는 음악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짓고 결연한 각오로 시청하고 있다가 들으니 참 반갑더라. 지휘자 미켈레 마리오티는 샤브란의 마틸데나 메트 리골레토에서도 본적이 있다. 베르디보단 로시니에서 더 돋보였는데,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로시니의 매력이 기본적으로 투명하고 경쾌한 악센트에 있다는 걸 잘 보여주며 현악기의 16분 음표는 언제나 명료했고 금관이 너무 지르지 않았다. 피날레에서 계속 나오는 금관 코드들은 지를 법도 한데 절대 과하지 않았다.


기욤 역의 니콜라 알라이모는 샤브란의 마틸데에서 아주 인상깊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건강한 소리에 무난한 연기를 갖췄다. 스타라고 할 만큼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은 없지만 이쯤이면 훌륭한 주역이다.

타이틀 롤보다 더 주역 같은 집중을 받는 플로레스는 아르놀드 역을 맡았다. 로시니 테너에 플로레스를 감히 대적할 사람이 요즘 누가 있겠냐 싶을 정도로 레이저 쏘는 듯한 강렬한 가창을 선보인다. 가끔 같이 부르는 가수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아리아 보다는 앙상블을 듣는 걸 좋아하지만 플로레스가 나온다면 고난이도 아리아를 기대하게 된다. 때문에 4막의 카발레타 Amis Amis secondez ma vengence 는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꽤 유명한 아리아인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독창집을 거의 안듣기 때문에 오페라 전막이 아니라 유명 아리아만 기억하고 있는 곡이 거의 없다. 이 곡은 여러모로 일 트로바토레의 디 퀠라 피라를 연상케했다. 주역 테너의 리드미컬한 카발레타라는 것, 누군가를 구출하러 가자고 부른다는 것, 합창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하이 씨가 중간과 마지막에 나온다는 것, 제일 마지막에 Aux armes - all'armi 라는 대사도 완전히 같다는 것 등 공통점이 참 많다. 베르디가 분명히 이 곡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이 씨야 연주자들이 추가한거지만. 하지만 안타까운 건 이 아르놀드라는 역할이 로시니 테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웅적인 역할이라는 점이다. 플로레스의 뻗어나가는 목소리 역시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만리코 같은 파워가 없다는 건 아쉽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니 브라이언 힘멜이 최근 독창반에서 첫곡으로 이걸 선택했는데 아주 탁월하다.




마틸데 역할의 마리나 레베카는 예당에서 콘체르탄테로 라 트라비아타를 했을때 주역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상당히 잘해서 만족스러웠는데 이 공연에서도 훌륭한 가창을 들려준다. 로시니 역할답게 콜로라투라도 많이 나오는데 훌륭하게 소화한다. 목소리의 울림이 적어 너무 날카롭게 들리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프랑스어 딕션이 너무 안 좋다는 건데, 보는 내내 혹시 마틸데만 이탈리아어 대본을 쓰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이 사람이 프랑스어를 발음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노래 내내 집중해보았지만 어디서도 아주 간단한 레치타티보가 아니면 프랑스어 모음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조연 들도 훌륭한데 게슬러 역의 가수는 노래도 훌륭하고 비열한 연기는 더 훌륭하다. 특히 기욤의 아들 역할인 젬미 역의 아만다 포르시스Amanda Forsythe가 단연 돋보이는데, 기욤이 화살을 쏘는 걸 포기하려고 할 때 부르는 아리아가 정말 훌륭하다. 찾아보니 이미 바로크 쪽으로는 독창 앨범도 냈더라. 

합창 파트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합창단은 별로다. 포르테로 부를 때는 너무 세서 소리가 뭉게진다. 


작품은 정말로 훌륭하다. 반주의 스타일도 곡마다 다른데, 특히 4막의 여자 삼중창에서 목관과 호른만으로 반주하는 음향은 상당히 특별하다. 아리아의 숫자가 과하지 않으며 앙상블의 구성이 탁월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3막에서 화살 쏘는 장면을 주변으로 한 장면이나 4막 테너 아리아는 특히 인상깊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힘을 상당히 잘 활용해서 막의 피날레가 모두 인상적이다. 여러 면에서 벨 칸토 오페라 같다는 느낌보다는 베르디 오페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리골레토보다 20년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극의 진행과 상관없는 장면을 잘라서 플레이 타임이 짧았다면 더 자주 상연되지 않았을까 싶다.


연출은 그레이엄 빅인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미국 아마존 리뷰를 보니 연출 극혐!!!이라는 댓글이 대부분이더라. 하지만 이렇게 만족스러운 연출을 본 게 오랜만이다. 일단 오페라 전체를 20세기로 옮겨놔서 오스트라아 지배자들을 일종의 자본가 귀족으로 묘사한다. 막이 올라가기 전부터 막에 이미 소비에트를 연상시키는 붉은 주먹이 있다. 거기다 막이 떨어지지 않고 올라간다! 기욤의 저항을 단순히 민족주의로 그려내지 않기 위해 피지배계층의 설움을 잘 묘사해낸다. 특히 3막의 발레장면을 지배계층의 모욕적인 갑질로 표현한 것은 아주 훌륭했다. 마지막 엔딩은 경이로웠는데, 음악의 분위기와 해방이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오묘한 순간을 정말로 잘 표현해냈다. 그레이엄 빅이 로페라 페스티벌에서 연출한 이집트의 모세도 굉장히 재밌게 보았는데 그에 버금가는 수작이다.


음악적인 완성도로 치자면 샤브란의 마틸데가 더 인상적이다. 하지만 마틸데라는 오페라는 딱히 몰라도 그만인 작품이지만 기욤 텔은 오페라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독특한 작품이니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별 네개에서 네개 반은 받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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