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냐코프의 실력이 가장 설득력있게 빛나는 작품.

지금까지 보고나서 안 쓴 후기들도 많지만 의미있는 작품이라 먼저 쓰기로 했다.

 

블루레이가 나오는 족족 사 모으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반지와 오네긴이다. 이제 안본 블루레이가 없어서 오네긴 감상을 뒷전으로 하던 날들이었다. 졸업 후 입사가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베를리오즈의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를 보았는데 역시 내가 원하던 그런 감상은 아니었다. 이 몇 안 남은 기회를 평범한 오페라 감상으로 날려버릴 순 없어서 꼭 보고싶은 걸 찾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블루레이 발매 소식도 제대로 체크 못 하고 있었는데 체르냐코프의 이 오네긴이 드디어 블루레이로 재발매 됐다는 사실을 알곤 바로 풍월당에 가서 집어왔다.

 

체르냐코프의 연출이 언제 빗나가겠냐만, '꼭 저랬어야만 하나'라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연출의 포인트를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오네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체르냐코프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고 그 방향이 매우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었다.

체르냐코프가 부각시키는 이 작품의 주제는 '비웃음당한 순정'이다. 이 작품을 오랫동안 보고, 또 원작을 찾아 읽어보았지만서도 이 주제가 전체 이야기를 관통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 했다. 그런데 이 연출을 보고나면 어떻게 이렇게 대낮의 태양 처럼 명확한 사실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나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극 중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촌스럽고 오그라드는 이야기가 된다. 1막에서 라린 부인이 유모와 함께 자기 옛 이야기를 할 때에도 사람들은 라린 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렌스키가 등장하면서 이런 연출 방향은 더욱 부각된다. 렌스키가 올가에게 불러주는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장면은 렌스키가 자신이 써온 시를 낭독해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올가는 렌스키가 불러주는 시를 듣고 시종일관 소리내서 웃는다. 이곳은 시인이 조롱당하는 세상이다.

같은 방식으로 타탸나의 연애 편지도 조롱당한다. 단순히 오네긴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다. 동이 트고 유모의 극렬한 거부에도 편지를 억지로 보내고 나니 저택의 하인들이 수근거리며 타탸나를 보고 웃는다. 타탸나의 순정은 이렇게 가십과 웃음거리가 되었다. 

2막은 렌스키를 심리적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이다. 그는 오네긴과 올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큰 상처를 받고 남들에게 이목을 끌면서 자신의 시를 희화화한다. 이 장면에서 트리케의 우스꽝스러운 노래는 극의 진행과 찰떡 같이 맞아 떨어진다. 오네긴과 다투며 결투를 신청하는 과정에서도 손님들은 이를 흥미진진한 해프닝으로 바라본다. 렌스키는 그저 파티의 광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렌스키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같은 조롱을 겪어본 타탸나 뿐이다. 타탸나가 렌스키를 위로해주며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연출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렇게 장면이 전환되면 결투를 기다리는 렌스키가 나온다. 렌스키가 우울한 모습으로 자신이 쓴 시를 마지막으로 읊는다. 바로 쿠다 쿠다이다. 렌스키의 뒤에는 방금 전 파티에서 렌스키를 재미있는 광대처럼 바라보던 할머니가 앉아있다. 렌스키는 이전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시를 노래하고 할머니는 그 시에 감동한다. 처음으로 렌스키의 순정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받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쿠다 쿠다의 가사가 이전에 렌스키가 노래하는 내용과는 감정의 깊이나 수준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1막에서 올가가 낯 간지럽다는 듯 웃어 넘겨버린 노래의 가사는 나 같은 러시아어 초급자도 이해할 수 있는 Я люблю вас (тебя) 같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 아리아 가사가 I love you~ 면 얼마나 오그라들겠는가. 올가가 웃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쿠다 쿠다는 다르다는 걸 체르냐코프가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너무도 사랑받는 아리아지만 마음에 온전히 와닿은 적이 없었는데 이 연출을 통해 이 노래의 감정, 그리고 극 중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를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체르냐코프가 연출한 3막의 폴로네이즈는 탁월한 연극의 표본이다. 무대의 모습과 등장인물들의 복장, 그리고 이어지는 일련의 비언어적 행동들을 통해 우리는 이 귀족 사교모임의 분위기를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오네긴은 불청객이다. 다른 손님들의 고급스러운 복장과 점잖은 행동은 오네긴이 이방인이고 더 이상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네긴이 자리를 찾으려고 할 때마다 손님들은 미안하다며 이미 주인이 있는 자리라고 말하며 오네긴을 거부한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상에 온 이방인의 괴로움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레민 공작이 등장하자 오네긴은 반갑게 달려간다. 다들 날 불청객 취급했지만, 난 이 자리에서 제일 중요한 그레민 공작과 친척 사이다, 공작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 다들 이제 나를 달리 볼 것이고 난 이 모임의 인싸가 될 수 있다 라는 그런 확신이 가득찬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레민에게 오네긴은 수많은 손님들 중 한명일 뿐이다. 잠시 아는 척 인사를 하곤 다시 다른 대화를 한다. 오네긴은 그제서야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된다.

체르냐코프는 극단적이라 할 만큼 실내, 그것도 사람이 생활하는 집의 내부를 오페라 배경으로 삼는 걸 좋아한다. 그리곤 그 배경을 항상 일관되게 가져간다. 이 작품에서도 이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긴 식탁이 있는 내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타탸나가 오네긴을 처음 만나는 장면도 이 식탁이고, 타탸나가 오네긴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이 식탁, 거절을 당하는 곳도 이 식탁, 렌스키가 오네긴에게 실수로 총을 맞는 곳도 이 식탁이다.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 뒤에 다시 재회하는 오네긴과 타탸나는 이제 식탁의 다른 맞은 편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둘의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물리적인 위치로 자연스럽게 표현해 낸 것이다.

 

음악적으로도 뛰어나다. 마리우스 크비첸은 돈 조반니나 오네긴이나 영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 메트 오네긴에서는 연출 때문에 점수를 깎아먹은 것이지, 이 연출에서 보여주는 연기력과 노래는 아주 탁월하다. 외모도 그 전엔 그냥 재수없게 생긴 느낌인데 여기선 잘 생겨보이더라. 타탸나 역의 타탸나 모노가로바 (가수의 이름이 배역과 같다)는 무언가에 홀려있는 듯한 타탸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낸다. 렌스키 역의 안드레이 두나예프는 1막의 어리숙한 모습에서 쿠다쿠다의 무거운 모습까지 잘 표현해냈다. 이 세명의 가수가 1막, 2막, 3막을 나눠서 연기력과 노래로 캐리해나간다. 

그레민 공작 역의 아나톨리 코체르가는 원래도 유명한 러시아 베이스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실력 발휘를 정말 제대로 해낸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공작의 아리아를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만들어놓았다.

 

지휘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는 러시아 다운 저돌적인 지휘를 보여준다. 볼쇼이 극장의 프로덕션이지만 파리 오페라에서 합동으로 공연한 거라 오케스트라가 파리 오페라인지 볼쇼이 오페라인지 궁금했는데, 굳이 커버를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러시아 특유의 금관 사운드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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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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