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작곡가들의 초기작은 대체로 묻히기 마련이다. 베르디의 나부코 정도가 아주 특이하게 세번째 오페라면서 대흥행하게 된 케이스이고, 푸치니 같이 거의 모든 작품이 레퍼토리에 속하는 경우에도 초기작인 빌리와 에드가는 듣보 취급이다.

바그너 역시 비슷하다. 바그너 팬이라면 바그너 본인에게 부정당한 세 초기작, 요정, 연애 금지 그리고 리엔치의 이름이 익숙할 테다. 이 세 작품이 조금 더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바그너가 이 세 작품을 통해 당대 유행하던 오페라 스타일을 각각 실험하고 결국 화란인부터 시작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만들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요정>은 독일 낭만 오페라, <연애 금지>는 이탈리아 낭만 오페라, <리엔치>는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 양식으로 이루어져있고, 이렇게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 문파를 하나씩 섭렵하고 이들을 제물 삼아 자신의 독창적인 악극으로 나아갔다니, 무슨 무협지의 일화같지 않나.

그렇게 이 세 초기작은 함께 묶여서 거론되기 마련이지만, 사실 당시 흥행으로 치면 확연하게 다른 운명이었다. <요정>은 바그너 생애 단 한번도 공연되지 못 하고 연애 금지 역시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초연되고 쪼오오올딱 망해서 바그너 생전에 다시는 공연되지 못했다. 반면 <리엔치>는 드레스덴에서만 1876 년까지 100회, 1908년 까지 200회 공연되며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서 까지 상연되던 인기 절정의 오페라였다. 바그너 스스로가 부정하지 않았다면 리엔치는 지금에도 훨씬 더 자주 공연됐을 테다. 초기작 삼형제로 묶이기엔 리엔치에게 조금 억울한 면이 있다.

영상물로도 리엔치는 도이체 오퍼 공연, 툴르즈 오페라 오퍼 공연이 각각 201년 2013년에 발매됐다. 한창 바그너 듣기 시작할 때 당연히 리엔치도 궁금해서 두개 다 블루레이로 샀다. 사두고 몇년 뒤에 도이체 오퍼 공연을 보려고 하니까 블루레이가 재생이 안 되서 멘붕했다. 알라딘에서 샀는데 산지 몇년이 지나서 처음 재생해보고 재생이 안 되는데 어쪄죠 라고 문의 넣는데 스스로가 너무 처량하더라. 알라딘 측에서도 재고가 없어서 교환이 어렵다는 말을 해줬다. 아트하우스 본사에 메일을 보내니까 당연히 교환해주겠다고 하는데 독일까지 배송비가 더 들겠더라. 그래서 독일 출장 갈때 교환해와야 하나 했는데 결국 미루다가 여태 못 보고 있다. 그게 한이 돼서 연애금지 후기 쓰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주절 되게 됐다.

여튼 연애 금지가 영상물로 정식 발매되는 건 내가 아는 한 이번이 처음이다. 어디 해적반 파는 곳에 연애 금지와 요정의 공연 영상도 있긴 한데 정말 화질이 눈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라 그냥 접어뒀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보니 두번 연속 셰익스피어 원작의 작품이고 두 개 다 셰익스피어 400주년 기념해를 위해 올라온 작품이다. 역시 좋은 원작에 묻어가는 건 언제나 옳은 선택인가보다. 솔직히 이게 셰익스피어 원작이니까 400주년이라고 얻어걸려서 한번 올려준 거지.. 바그너 서거 150주년 된다고 <연애 금지> 올려주겠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배경은 팔레르모. 왕을 대신해 팔레르모를 통치하게 된 프리드리히 총독은 도덕을 들먹이며 공적인 장소에서의 모든 연애 행각을 금지한다. 이때문에 클라우디오는 연애를 이유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클라우디오는 급하게 누이인 수녀 이자벨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자벨라는 법정에서 클라우디오를 변호하는데, 프리드리히는 이자벨라에게 반하게 된다. 이자벨라는 이 점을 이용해서 총독을 몰래 밤거리로 나오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총독의 본모습을 폭로한다. 총독마저 연애를 즐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시민들이 연애금지를 무시하며 등장인물이 모두 짝을 찾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야기를 잘게 쪼개보면 다른 오페라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자벨라가 연애금지령 위반으로 고서된 클라우디오를 변호하는 장면은 엘리자베트가 베누스베르크에 다녀온 것 때문에 지탄받는 탄호이저를 변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에 이자벨라가 프리드리히 총독을 밤에 불러낸 뒤 본인 대신 프리드리히의 전 부인인 마리아나를 내보내는 것은 <피가로의 결혼>과 꼭 닮았다. 

 

음악은 도저히 바그너로는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발랄함으로 가득차있다. 바그너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전의 한 영국 평론가는 "<연애 금지>는 음악 없는 <명가수>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음악 없는 명가수라니ㅋㅋㅋㅋㅋ   하지만 이를 바그너 오페라가 아니라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즉 도니체티나 벨리니의 후예로 본다면 그렇게 쓰레기통에 쳐박힐 만한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도니체티와 벨리니의 연장에서 평가돼야 한다. 그런데 바그너 초기작을 굳이 찾아 들을 사람이 도니체티랑 벨리니를 엄청 좋아할 일은 별로 없잖아? 그러니까 자연스레 평가가 박해질 수밖에 없다. 작품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하지 무엇이 아닌가 (for What it is, not for what it's not)로 평가될 순 없다.  

바그너도 신나는 노래를 잘 쓸 수 있다는 걸 화란인에서 잘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서 그렇다. 여기선 좀더 시끄럽고 좀더 유치하는 느낌이 더 날 뿐이다. 중간 중간 느린 선율은 리엔치나 화란인의 선율을 떠올리게 하고 실제로 재활용된 경우도 있다. 이자벨라와 마리아나와 함께 수녀원에서 기도할 때는 탄호이저의 기도 선율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다 또 전형적인 이탈리아 벨칸토 스타일의 패시지들이 나오는 혼종이다.

 내가 보면서 작품 자체가 구려서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없다고 느낀 게 <위그노 교도> <루슬란과 류드밀라> <시뇨르 브루스키노> 정도인데 절대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작품들은 진짜로 음악이 없잖아. <연애 금지>는 조금 단조로운 선율이 많아서 그렇지 <위그노>에 비하면 개꿀잼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연주 퀄이 좋은 건 아니다. 루치오 역의 페터 로달Peter Lohdal은 가볍지도 않고 힘있는 것도 아니고 멋지지도 않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극의 초반부를 꽤나 괴롭게 만든다. 안토니오 역의 일케르 아르제유렉Ilker Arcayürek의 노래 역시 무언가 답답하게 들린다. 그나마 이자벨라 역의 마누엘라 울과 프리드리히 역의 크리스토퍼 몰트만이 나오기 시작하면 괜찮아진다. 몰트만은 캐릭터를 확실하게 잘 만들어내는데 이자벨라의 연락을 기다리며 부르는 아리아가 상당히 훌륭하다. 혼자 곰인형 붙잡고 찌질남 연기를 하며 부르는데 이분이 정녕 잘츠에서 근육질 돈조를 부르던 그 가수가 맡나 싶을 정도다. 개그 커플을 맡는 브리겔라 역의 안테 에르쿠니사Ante Jerkunica와 도렐라 역의 마리아 이노호사Maria Hinojasa는 연기나 노래나 맡은 역할을 잘 살려낸다.

아이버 볼튼 (Ivor라는 이름이 영국 이름이고 아이버라고 발음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의 지휘는 쭉쭉 뻗어나가며 생기를 더 해준다. 악보의 단점을 덮어버릴 수 있게 강한 에너지로 이끌고 나가는데 테아트로 레알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그렇게 고급스럽진 않아서 아쉽다.

 

연출은 카스퍼 홀텐이 맡았다. 내가 홀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블로그에서 자주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정작 블로그에 홀텐 후기를 많이 쓰진 못 했다. 이 작품을 보게 된 것도 홀텐이 연출했으면 볼만하겠지 라는 기대였다. 홀텐이 또 한 바그너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연출은 조금 의아했다. 내가 그 동안 홀텐의 스타일을 잘못 이해했나 싶을 정도로 살짝 갸우뚱 하게 만들었다. 연출이 특별히 재미없고 진부한 것은 아닌데 뭔가 정리가 안된 느낌이라고 할까. 예컨데 루치오가 이자벨라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무빙워크를 이용하는데 저 장면에서 정신사납게 무빙워크를 쓸 이유가 뭘까 싶었다. 원색을 입은 팔레르모 시민들과 무채색을 입은 프리드리히와 이자벨라를 대비 시키는 것도 괜찮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각적으로 좀 싼티나는 건 어쩔수가 없다. 이 아저씨는 오네긴 때도 빨강과 파랑 대립을 사용하던데 의미도 좋지만 좀 더 예쁘게 만들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때 내가 꼽는 오페라 연출의 투톱이 헤어하임과 홀텐이었는지라 기대가 워낙 컸기도 했다. 이제 가족이랑 시간 보낸다고 ROH도 그만뒀는데 아무리 그래도 바그너 전작품은 다 올리고 은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별다른 인터뷰 등은 없지만 바젤 음대의 크리스 월튼Chris Walton 교수가 쓴 내지 글이 아주 유익한데다 재미있다. 공연 역사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정리해주는 부분도 재미있지만 이 작품의 의미에 대해 분석한 부분이야말로 꿀잼이다. 대강 중요한 부분을 의역해서 옮기면 이렇다.


이 작품의 제목은 <연애 금지>(혹은 사랑 금지)이지만 사실 다루고 있는 것은 <섹스 금지>에 가깝다. 그리고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죄다 섹스에 미쳐있다. 프리드리히는 이자벨라를 보고 섹스를 조건으로 클라우디오를 풀어주겠다고 한다. 루치오 역시 이자벨라를 보자마자, 심지어 수녀인데다가 친구를 살리기 위해 찾아온 급박한 상황인데도 결혼해달라고 요청한다. 브리겔라 역시 도렐라를 보고 섹스 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오른다. 극 중에서 섹스에 불타오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클라우디오인데 그건 얘가 이미 오페라 시작 전에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감방에 가있어서다. 

그리고 이 작품 자체가 완전한 남성 판타지인 게 결국 모든 남성이 짝을 찾게 된다는 결말을 보라. 하나 예외가 있다면 프리드리히가 이자벨라를 얻지 못한다는 건데, 그건 프리드리히가 이자벨라의 베프인 마리아나의 남편이며 이자벨라가 루치오를 마음에 들어하기 때문이다. <마술피리>처럼 결말에서 각자 짝을 찾는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연애 금지>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주요인물들이 짝을 찾아 총 4쌍이나 만들어진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서 여자들의 No는 항상 Yes를 의미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제 인간보다는 보노보 침팬지에 가까워 보인다."

도대체 바그너는 이 작품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바그너가 왜 배경을 원작의 빈이 아니라 남쪽인 팔레르모로 옮겼을까. 바그너는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그렇듯이 이탈리아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가이드는 바로 <이탈리아 기행>을 쓴 괴테였다. 하지만 괴테 혼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바그너가 이 오페라에 영감을 준 문학 작품으로 두 가지를 더 언급했는데 바로 그의 친구 하인리히 라우베가 쓴 <젊은 유럽Young Europe>과 빌헬름 하인제가 쓴 소설 <아르딘겔로와 행복한 섬: 이탈리아 이야기Ardinghello and the happy islands: An Italian story>였다. <젊은 유럽>은 사랑과 섹스에 대한 자유로운 관점을 지지하는 책이었고 <아르딘겔로>는 거리낌 없는 예쁜 이탈리아 여자들이 잔뜩 나오는 책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적나라한 표현은 가히 <이탈리아의 50개의 그림자>라고 부를만 한 것들이었는데 바그너도 이 책을 읽으면서 꽤나 흥분했을 거다. 

당시 바그너에게 북쪽이란 근면과 회색 하늘, 그리고 냉랭한 여자들이 있는 곳이었고 반면에 남쪽은 (괴테와 라우베와 하인제 덕택에) 태양과 모래와 바다와 섹스가 있는 곳이었다. 요즘까지도 만연한 이 클리셰가 바그너 시대라고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연애 금지>를 작업하던 시절 바그너는 배우 미나 플라너에게 완전히 빠져있던 시절이었다. 마그데부르크에서의 직장을 수락한 것도 오로지 미나에게 구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거의 2년 반 동안 구애하면서 미나에게 미쳐있었다. 바그너 입장에서 여자와 진지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지만 미나는 인기있는 배우였고 이미 15살 때 한 군인과 딸까지 낳을 정도였다.

바그너가 미나와 빨리 자고 싶어했다는 건 분명해보인다. 그의 나이는 호르몬이 넘치는 스물한살이었고 집에서 떨어져 혼자 살고 있던데다가 미나의 배우로서 명성은 곧 미나가 처녀가 아닐 거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미나가 워낙 인기 있었기에 항상 상류층 구혼자들이 많았고 미나 역시 이 점을 자기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데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미나가 부유한 남자와 이야기할 때마다 바그너는 질투에 불타올랐다. 미나가 베를린에 가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때에 바그너는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은 가버렸어요... 나는 여기에 홀로 앉아 울며 어린애처럼 훌쩍일 수밖에.. 주여,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미나, 미나, 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죠?" 바그너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 끝에 둘은 결국 1836년 11월 24일에 결혼하게 된다. 

바그너가 <연애 금지>를 작곡하면서 이렇게 미나와 결혼하는 일부일처제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어떻게 누군가와의 결혼을 갈구하면서 이렇게 개방적인 섹스를 이야기하는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둘은 이어져있다. 오페라가 자유분방한 섹스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극 중에서 한번도 이어지지 못하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짝을 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짝을 맺는다는 건 확고한 일부일처제의 상징이다. 이 작품이 자유로운 남부 스타일 사랑을 예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북부의 도덕적인 일부일처제로 끝맺음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오페라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군가 얼마나 자유 분방한 사랑을 나누더라도 모든 것은 다 용서되고 안정적이고 신실한 결혼생활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처음의 이탈리아의 혼돈에서 시작하여 결국 독일의 질서정연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미나가 바그너에게 자신의 화려했던 연애사나 사생아에 대해서 고백했는지 어쩐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바그너는 미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과거에 대해서는 괘의치 않아했다. 어쩌면 대부분의 바그너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숨겨야할 과거를 한 가지 씩 갖고 있고 오페라의 결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새출발을 보여주는 것도 이런 개인사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바그너는 미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당신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날 사랑해주고 나와 결혼하면 미래는 모두 괜찮을 거예요. 

즉 이 <연애 금지>는 어찌보면 바그너가 미나에게 보내는 거대한 연애 편지다.


작품과 예술가의 개인사를 엮어내는 것이 항상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닌데, 이 글은 자신의 가설을 훌륭하게 썰풀어낸다. 홀텐 역시 이 작품이 결국 독일적인 것의 승리로 결말을 맞는다는 데에 공감하는지 마지막 장면에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남유럽 사람들에게 구제 금융을 지원하는 메르켈 총리를 등장시킨다.

 

이 작품을 감상한다면 아마 작품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텐데, 그 호기심을 재미있게 충족시켜줄 만한 작품이다. 이랬던 바그너가 10년뒤에 탄호이저를 작곡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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