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코스키는 지금 가장 주목할 만한 오페라 연출가일까.

헨델의 오라토리오 사울에 베리 코스키가 연출을 덧입혀 올렸다. 배리 코스키의 연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광주에서도 올려 화제가 되었던 코미세 오퍼의 마술피리, 그리고 최근 바이로이트에서 공연한 명가수일 테다. 그 외에도 내가 영상으로 본 게 있으려나 하고 찾아봤는데 발매된 건 의외로 없다. 마술피리는 직접 공연으로 보고 명가수는 영상으로 봤는데 둘 다 각 작품에서 최고의 연출로 꼽아도 될 정도였다. 사실 배리 코스키의 연출을 처음 본 건 2014년에 베를린에 갔을 때 코미셰 오퍼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았을 때다. 빈 무대에서 거의 현대무용 실험극 같은 느낌을 주는 연출이었는데, 황량한 느낌이 좋게만 다가오진 않았다.

과연 오라토리오 연출은 어떨까. 오라토리오 연출은 자유도가 높지만 극적인 구성력이 오페라 만큼 짜임새있진 않기 때문에 지루해질 수도 있다. 이를 잘 채워넣는 것이 연출가의 역할일 테다.

오라토리오 사울은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을 주인공으로 한다. 다윗(다비드)이 골리앗을 물리친 바로 뒤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사울은 다윗의 업적을 치하하는데 차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보다 다윗을 찬양하는 걸 보고 질투에 눈이 멀고 미쳐간다. 결국 사울이 마녀에게 찾아가 자신이 금지시킨 흑마법까지 손을 대는 지경까지 갔다가 전장에서 사망한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여기에 사울의 자식인 요나단(조나단), 메랍, 미갈(미찰)이 다윗과 사울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것이 이야기를 적절히 풍부하게 해준다.

통치자인 왕이 점점 미쳐가며 실각하는 것, 그리고 자식 문제가 껴들며 왕이 마녀에게 간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이나 맥베스와도 닮은 점이 많다. 부클릿의 글에 따르면 당시 영국에서는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축출되고 메리와 앤을 거쳐 왕위 계승 58순위였던 조지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신이 선택한 통치자가 실각하고 새로운 통치자가 뒤를 잇는다는 사울의 내용이 조지1세 계파나 제임스 파나 모두에게 자신들 좋을 대로 해석하기 딱 좋았다고 한다. 조지1세의 추종자들은 다윗의 정당성에서 조지1세의 정당성을 보았고 제임스 추종자들은 사울의 실각이 성경에서도 얼마나 비극으로 묘사되었는가에 공감했다고 한다. 

 

헨델 오라토리오를 무대화시켜 올리는 시도가 자주 있는데, 이 작품은 다른 헨델 오페라보다도 더 극적이며 강렬하다. 이전에 본 무대버전 오라토리오인 시오도라에서 특별한 사건이 별로 없는 반면 사울은 사울과 다윗의 갈등,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요나단과 사울의 갈등, 다윗과 미갈의 사랑 등 극적으로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다. 또한 시오도라에서와 달리 오페라 만큼이나 극적인 음악들이 많이 등장한다. 

 

코스키는 이 작품에서 광기의 에너지를 전면으로 끌어온다. 모든 인물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있는데 오직 다윗만이 분칠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내놓는다. 놀라운 건 합창단의 움직임이다. 글라인드본의 합창단은 젊은 성악도들로 구성돼있는데 그러다보니 무대 위에서 내놓을 수 있는 육체적인 에너지가 상당하다. 단순히 동선을 복잡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합창단이 다 같이 춤을 추며 노래할 정도다. 

오라토리오다 보니 합창단의 비중이 다른 바로크 오페라 보다 훨씬 높고 역할 역시 다양하다. 수난곡에서의 합창단과 마찬가지로 실제 극중의 인물들을 맡기도 하지만 나레이션 역할도 많다. 코스키는 각각의 장면에서 합창단의 배치나 무대 장면 구성을 달리한다. 방금 전에 미쳐 날뛰던 이스라엘인들이 순식간에 근엄하게 앉아 주의 말씀을 노래하는 걸 보면 소름이 돋게 된다.

사실 이 작품에서 사울이 부르는 아리아는 몇개 없기 때문에 사울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퍼브스Christopher Purves는 별로 어렵지 않은 공연이 될 거라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스키는 시종일관 사울을 무대 위에 올려놓아 가수의 모든 것을 보여주게 만든다. 광기 어린 표정, 실성하여 짐승처럼 뛰어다니는 모습, 축 처진 뱃살, 가짜 가슴을 빨며 가짜 우유를 입에 잔뜩 묻힌 채로 노래하는 것 까지 말이다. 코스키의 연출도 대단하지만 퍼브스가 이를 모두 소화해내는 것 역시 놀라운 수준이었다. 

다윗 역의 예스틴 데이비스Iestyn Davies(잉글랜드 요크 태생이라는데 왜 웨일스 식 이름을 쓰는 건지 궁금하다)의 연기 역시 탁월하다. 다른 인간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괴로움 모두를 함축한 것 같은 아련한 표정으로 극 안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

 

내지 인터뷰에서 코스키는 리얼리즘보다 꿈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의 마술피리를 떠올리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명가수>역시 리얼리즘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환장 바그너 파티를 보여주질 않나. 하지만 그걸 통해 피날레에선 바이로이트를 찾아온 관객들이 꿈꾸던 장면, 바그너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특별한 무대 구조물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도 확연히 기억나는건 무대가 텅 비어있다는 점이었다. 코스키는 무대가 텅 비어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무대에는 Performer가 있다고 응수한다. 이 연출에서도 코스키는 가수와 합창단으로 무대를 채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또한 거추장스러운 리얼리즘을 벗어던지며 논리성보다는 자신이 만들고 싶어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점이 상대적으로 장면이 서로 분절적인 바로크 작품에서는 특히나 강점으로 작용해 각각의 장면에 걸맞는 연출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지휘는 아이버 볼튼이 맡았다. 의도치 않게 아이버 볼튼 지휘를 세 개 연달아 보았다. 이전의 작품들도 모두 괜찮았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볼튼의 장기인 헨델이 가장 돋보인다. 코스키가 연출에서 광기를 이끌어내는 게 지휘자 볼튼 역시 퍽 마음에 들었던 게 틀림 없다. 연출이 표현하고자 하는 게 바로 자신이 표현하고 싶다는 듯 헨델의 음악에서 그로테스크할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렇게 계속 강하게 밀어붙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금관과 팀파니를 때려박는 데 빠꾸 없다. 

가수진 중 어느 하나 부족한 사람이 없지만 돋보이는 사람은 메랍 역할의 소프라노 루시 크로우Lucy Crowe다. 2부 후반부에 나오는 아리아 Author of Peace에서 비브라토를 절제하며 담백하며 울림있는 목소리로 느린 선율을 뽑아내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도 귀가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이상적인 바로크 아리아를 듣는 경험이었다. 

사울 역의 크리스토퍼 퍼브스 역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다.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노래 역시 사울이 보여줘야할 감정을 모두 잘 보여준다. 사무엘을 소환하는 장면에서는 사울과 사무엘 두 인물을 번갈아가며 목소리를 바꾸는 것 역시 탁월하게 소화해냈다. 다윗 역의 예스틴 데이비스의 노래도 담백하고 안정적이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카운터테너 목소리는 아니었다. 

미갈 역의 소피 베번Sophie Bevan은 호소력있으며 강렬한 노래를 들려주고 조나단 역을 맡은 폴 애플비도 깔끔하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역할을 잘 소화한다. 여러가지 작은 역할을 모두 맡으며 기괴한 광대같은 인물을 연기한 벤자민 휼렛Benjamin Hulett도 짧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마녀 역할을 맡은 가수는 누군지 못 알아봤는데 브리튼 오페라에서 종종 본 존 그레이엄홀John Graham-Hall이 맡았다. 

 

작품 연출 지휘자 성악진 합창단 까지 고루 훌륭한 타이틀이라 강력히 추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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