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를 한 번 보고 나서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이어서 룰루를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마를리스 페테르센이 룰루를 맡았다. 프티봉이 4차원적이고 기묘한 공포를 주는 룰루였다면 체르냐코프가 연출하고 페테르센이 연기한 룰루는 평범한 인간처럼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훨씬 더 잘 부각된다. 노래 스타일 역시 페트렌코의 지휘와 잘 어울린다.

스코부스는 폴레 만큼이나 연기가 뛰어난 가수다. 체르냐코프와의 돈 조반니가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도 둘의 조합은 잘 어울린다. 돈 조반니에서 체르냐코프는 스코부스에게 불쌍한 중년 남성을 연기하게 만들었는데, 이 프로덕션에서도 스코부스는 그런 느낌을 아주 잘 살린다. 폴레가 마초적으로 룰루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스코부스는 룰루에 질질 끌려가는 쇤 박사의 모습에 훨씬 잘 어울린다. 

알바 역의 마티아스 클린크Matthias Klink도 돋보인다. 깔끔하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알바를 소화해낸다. 찾아보니 가곡도 많이 부르고 미메나 알바 같은 역할을 자주 맡는다고 한다. 뛰어난 슈필테너인 볼프강 아블링어슈페르하케Wolfgang Ablinger-Sperhacke가 Prinz/하인/후작을 맡았다. 사악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는 짧은 등장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게슈비츠 역의 다니엘라 진드람Daniela Sindram도 안정적인 목소리와 유연한 가사 처리로 맡은 파트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전반적으로 페트렌코가 선호하는 가수가 이런 스타일일까 싶게 모두 노래가 안정적이었다.

알브레흐트의 룰루를 듣다가 페트렌코의 룰루를 들으니 확실히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더 쉬웠다. 알브레흐트가 룰루를 현대음악의 시초로서 투명하게 보여주려고 했다면 페트렌코는 낭만주의의 황혼으로서 해석하는 느낌이다. 베르크의 악보에서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면모들을 잘 포착해서 강조한다. 이것이 곧 섬세한 디테일을 잘 활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렵고 난해한 음악이지만 그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음악을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정렬해내어 들으면서 지루할 틈이 없는 연주로 탈바꿈한다.

작품을 두번째 보는 것이다보니 더 잘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작품 속 인물들의 유도동기들도 명확하게 들리는데, 특히나 쇤 박사의 모티프를 페트렌코가 바그너 마냥 뽑아내는 것이 일품이었다. 리브레토의 흥미로운 부분도 더 돋보인다. 처음에는 룰루에 나오는 인물들을 대칭적인 존재로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게슈비츠 여백작이다. 감옥에 간 룰루를 빼내오기 위해 콜레라에 걸리고 대신 감옥살이를 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룰루가 죽었을 때 마지막까지 함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3막 마지막에 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하는 장면은 요즘 창작물들의 페미니즘 메세지를 보는 것 같다. 룰루를 룰루라고 부르는 인물이 쉬골흐와 게슈비츠만 있다는 것도 재밌는 점이다.

체르냐코프의 연출은 생각보다 얌전한 편이다. 작품에 광기가 가득하니 굳이 연출가가 나서서 오버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네미로바의 연출과 달리 동선이나 연기가 상징적인 것보다 사실주의에 가깝다. 룰루가 팜므파탈이냐 희생자냐의 이분법으로 보자면 이 연출은 희생자라는 시각에 가깝다. 무대 배경의 경우 체르냐코프가 항상 쓰던 집의 내부가 아니라 유리 벽으로 가득한 공간들을 활용한다. 여기서 나오는 차가운 느낌은 언뜻 쿠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룰루의 초상화 역시 유리벽에 여성의 실루엣을 그리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화가가 자살할 때 이 실루엣에 겹쳐서 등장하는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인 비주얼로 다가온다. 중간중간 수많은 커플을 등장시켜 룰루가 처한 현실을 복제해서 보여주어 메세지를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어려운 음악일 수록 페트렌코의 면모가 더 빛난다. 가수들도 뛰어나고 연출도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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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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