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후기를 쓰는 것은 가끔 부담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공연처럼 연주곡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다면 쓸 내용도 많이 없으니 말입니다. 앞으로는 블로그의 장점을 이용해서 그냥 편하게 생각나는 인상을 정리하는 정도로 꾸준히 써보려고 합니다.


전 서울시향의 굉장한 팬입니다. 매년 티켓 오픈일이면 어떤 공연이든 무조건 1년치를 모두 예매하였습니다. 언젠가 서울시향에 관해서 따로 글을 써야겠네요. 여튼 서울시향의 공연이면 항상 만족이었고, 티켓값의 3배쯤 드는 교통비와 대전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시간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시향의 공연을 못본지 정말 오래되었습니다.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본 공연이 3월 23일 비르투오소 시리즈, 엘가 첼로협주곡과 프랑크 교향곡을 했을 때 이네요. 세상에, 그 때 뮐러-쇼트를 보고 6월 4일에 다시 봤는데 서울시향은 그 동안 한번도 못본 셈입니다. 4월달 북미 투어 때문에 정기공연이 없었고, 투어 기념음악회도 가지 못한데다 아르스노바는 또 시험+상하이 콰르텟에 겹쳐서 가지 못하였습니다. 상하이 콰르텟 공연도 좋았지만, 아르스 노바를 놓친건 다시 생각해도 너무 아쉽습니다.


그만큼 오랜만에 보는 서울시향의 공연이라 들뜨기도 했습니다. 저번 로제스트벤스키와 쇼스타코비치 8번이 정말 좋았고, 쇼스타코비치 10번도 언젠가 실연으로 듣고 싶은 곡이었거든요.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휘: 스테판 데네브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알렉산드르 가브릴류크)

앵콜 : 멘델스존-리스트-호로비츠 편곡 결혼행진곡,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피아노 편곡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10번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1번은 2,3번이 가지고 있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 비해 더 활기넘치는 작품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길이도 30분이 되지 않아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했지만 감상하는데 부담이 없었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의 구성을 빌렸기 때문에 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가브릴류크의 연주는 처음 듣는 것이었는데, 대단히 자신감 넘치고 패기있는 연주였습니다. 테크닉 적으로 정말 자유로웠으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곡을 진행해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1악장 끝의 카덴차에서는 화려한 기교의 비루투오시티를 마음껏 뽐내며 청중을 압도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망설임 없는 자신감이 2악장에서 해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울 예당에서 이렇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은것이 생각해보니 두달은 넘었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그 감동에 벅차서인지 2악장 도입부를 들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듣는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연주였습니다. 피아노의 음색도 명료하다가도 약간 두리뭉실 신비한 느낌이 날때도 있었는데, 이게 합창석의 위치 때문이었는지 페달 효과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진 않네요. 3악장은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투티와 피아니스트의 독주를 동시에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곡은 최고조에 이르러서 끝났고 관객들의 반응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가브릴류크의 앵콜은 멘델스존 결혼행진곡 편곡,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피아노 편곡이었습니다. 결혼행진곡 편곡은 위트있는 셈여림 변화에다가 화려한 기교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는 쇼피스였습니다. 관객 모두 가브릴류크에 빠져들수 밖에 없었고 커튼콜이 이어지는 도중에도 박수소리는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번의 커튼콜이 이어지다가 악장 웨인 린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번째 앵콜곡 보칼리제를 연주했습니다.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연주였는데,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처음 부분이 다시 재현될 때 고음부에서 아르페지오로 선율을 꾸며주는데 그게 정말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지휘자 스테판 데네브는 예전에도 서울시향을 지휘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사정이 있어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나는 지휘자입니다. 원래 영국의 마크 엘더 경이 오기로 되어있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취소되고 데네브가 대타로 오게되었습니다. 엘더 경의 내한 소식은 작년 서울시향 일정이 확정됐을 때부터 많은 팬들을 설레게 했는데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다만 데네브 같이 젊은 지휘자를 확인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일이겠지요.


1부 협주곡 때도 등장했지만, 트럼펫 수석과 호른 수석이 눈에 띄었습니다. 트럼펫 수석으로는 정명훈 씨의 공연에 자주 보이는 알렉상드르 바티가 나왔다는 게 놀라운 점이었고, 호른 수석은 저번 연주에도 한번 나왔던 사람입니다. 그 때는 플라송이 데리고 온 객원 연주자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수석으로 나온걸 보니 서울시향의 새로운 호른 수석이 아닌가 궁금하네요. 수석이었던 미샤 에마노프스키는 두 곡 모두 써드 호른을 맡았습니다. 플룻과 오보에는 수석 분들이, 클라리넷과 바순은 부수석 분들이 나왔습니다. 목관 수석들의 중요한 솔로들이 많이 나오는 곡인데, 임상우 부수석과 장명규 부수석님 모두 수석 못지 않은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4악장의 바순 솔로에서 가뜩이나 숨쉴 틈도 없이 텅잉해야하는데 한손으로 키를 누르며 다른 한손으로 악보를 넘기는 부분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잔인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1악장의 도입부를 지나 투티가 나올 때부터 오늘 연주의 완성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숫자는 8명 밖에 안됐지만 베이스의 소리가 오늘만큼 뚜렷하게 들렸던 기억이 없네요. 중간중간 묻히기 쉬울 수 있는 비올라 성부도 또렷이 들렸고 곡의 긴장감도 잘 살려내는 연주였습니다. 1악장의 긴장감, 2악장의 폭발, 3악장에서 세 모티프의 기괴한 분위기, 4악장의 결말 까지 완성도 있었습니다. 합창석이라 그런지 타악기의 밸런스가 너무 크지 않았나 하는 것과 현악기의 앙상블이 좀더 명료하게 들렸으면 하는 사소한 아쉬움들이 있지만 전체적인 면으로 보면 옥의 티정도일 뿐이었죠. 쇼스타코비치 10번이라는 난곡을 유감없이 잘 소화해낸 연주였습니다. 중간중간 데네브가 포인트를 주는 부분들도 인상적이었구요. 예를 들면 1악장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의 G선에서 강렬한 비브라토를 이용한 2주제라든가, 4악장에서는 극단적인 셈여림 변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부분들이 있겠네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1번과 쇼스타코비치 10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과, 특히 협연자 가브릴류크의 비루투오시티를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습니다. 올해 서울시향의 다른 공연들도 계속 기대하게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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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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