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토 베르디를 구입했다. 결국 오페라 덕질을 하면서 투토 베르디를 피해갈 순 없을 것 같았다. 박스물 치고 딱히 세일 폭이 큰 것은 아니지만 큰 마음 먹고 구입했다. 음반 박스 세트도 한번 사본 적이 없는데, 투토 베르디는 사면 처음부터 끝가지 다 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발매된 기획물이라 국내에서는 모두 품절이었지만 뮤직랜드에서 다시 수입해준 덕에 구입할 수 있었다.


무슨 작품부터 볼까하다가 맥베스로 시작했다. 투토 베르디에서 펼쳐보며 맥베스가 얼마나 초기 작품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됐다. 물론 파리 개정이 있긴 하지만, 베르디 중기의 시작인 리골레토와도 한참 거리가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이라는 이유로 수업에서 다룰 오페라로 맥베스를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3, 4막이 조금 약하다. 특히 3막에서 다시 예언을 듣는 장면의 경우 조금 더 다채롭고 극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파리 개정에서 추가된 뜬금없는 발레 장면도 가뜩이나 내용 진행이 부족한 3막을 더욱 빈약하게 만든다. 


투토 베르디 시리즈에서 가장 기대되는 스타를 꼽자면 망설임 없이 레오 누치를 꼽겠다. 나부코, 맥베스, 리골레토, 시몬 보카네그라와 같은 중요 타이틀 롤은 물론 두 명의 포스카리,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루이자 밀러 등에도 출연한다. 42년생인 누치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아마 이 투토 베르디 기록이 그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영상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1막에서 마녀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노래가 필요 이상으로 세지 않나 했는데 뒤에서는 훨씬 완급조절을 잘 했다. 아마 맥베스가 타락하기 전 강인한 장군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1막에서 왕을 살해하기전 독백이나 2막 반코의 유령을 보는 장면, 4막의 pieta, rispetto, amore는 압권이다. 그냥 중요한 장면은 다 언급한 것 같다. 특히 반코의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연출 상 유령이 실제로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연기하기 더 까다로웠을 텐데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누치는 나부코가 미쳐가는 연기도 일품이었는데 맥베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치의 외모가 맥베스를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늙은 맥베스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4막의 체념적인 모습이 상당히 잘 어울렸다. 


프랑스 소프라노 실비 발래르Sylvie Valayre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실제로 음반이나 영상물 기록은 이 공연이 유일했다.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투란도트가 떠오를 만큼 훌륭한 드라마티코 소프라노 목소리를 갖추었다. 첫 아리아인 Vieni t'affretta 와 Or tutti sorgete에서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강렬한 노래를 선보이지만 고음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뻣뻣해진다. La luce langue도 잘 불러주지만 브린디시는 살짝 빠른 템포 때문인지 조금 고전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노래나 연기나 이만하면 훌륭한 레이디 맥베스다. 특히 연기 만큼은 시종일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레이디의 느낌을 아주 잘 살려낸다. 

반코는 훌륭했지만 막두프는 평균 아래다. 막두프의 4막 아리아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부르는 아리아인데, 연출가는 여기서 아내와 아이들의 시신을 막두프 앞으로 가져다둔다. 사실 아리아 자체도 그다지 격정적이지 않는데, 어떻게 가족의 시신을 껴안고 저렇게 차분하게 노래할 수 있나 소름이 돋을 정도다.


베르디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은 세 명이라며 '맥베스, 레이디, 마녀들'을 꼽았다고 한다. 그 만큼 마녀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일테다.반코 막두프 의문의 1패 파르마 레조 극장의 합창단은 상당히 훌륭하다. 합창임에도 가사 대부분이 또렷하게 들릴만큼 좋은 딕션과 앙상블을 가지고 있다. 1막과 3막의 합창 모두 뛰어나다.


반면 지휘자 브루노 바르톨레티Bruno Bartoletti는 좋은 평가를 주고 싶지 않다. 1막 전주곡부터 힘빠진 느낌이 들었는데, 금관을 과도하게 억제하는 느낌이 있다. 베르디 초기 작품에서 금관을 필두로 하는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은 극의 활력을 불어넣는 강렬한 힘을 갖춘 무기인데 이걸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금관 어택 대부분을 때리지 않고 밀어서 내는데, 3막 발레 음악에서 거의 틸레만이 슈트라우스에서나 보여줄 것 같은 느끼한 프레이징을 보여준다. 반대로 목관의 소리는 상당히 뚜렷하게 강조한다. 오페라 전반적으로 좀 여유있는 템포를 가져가며 급격한 다이나믹 변화나 템포 변화를 의도적으로 자제하기 때문에 심심하게 느껴진다. 뭐랄까, 취리히 카브 팔리를 맡았던 지휘자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라면 바르톨레티의 경우 자신이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들이 별로인 셈이다. 어쩌면 내가 무티의 음반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연출은 릴리아나 카바니Liliana Cavani가 맡았는데 무난하다. 의상을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실적인 복장으로 맞추었으며 무대 전체 구성을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진행되는 극장처럼 만들었다. 합창단 중 몇 명은 무대 사이드에 있는 객석에 앉아 무대 위 연극을 바라보는 현대인 관객이 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구성이 극에 영향을 주는 장면은 없으며 관객 역할을 하는 인물들도 모두 얌전히 앉아있다. 라스 메니나스에 나올 것 같은 왜소증 배우가 광대 처럼 등장하여 일종의 악마 같은 역할을 한다.


자막이 전체적으로 의역이 많은 편이며 문장이 길 때 어순에 맞지 않는 자막이 나온다. 한 프레이즈에서 자막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어순이 틀릴 경우 상당히 거슬린다. 긴 문장을 굳이 잘라서 자막을 내주는 것은 현재 대목의 구절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정확히 역효과를 낳는 셈이다. 원어 자막의 분절을 따르지 않고 문장단위로 자막 타이밍을 수정하는 작업이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결함 중 하나로 녹화 퀄리티가 상당히 안좋다. 영상 자체는 1080i가 맞지만 DVD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다. 저화질 시대의 특징인지 카메라가 전체적으로 심하게 클로즈업된 경우가 많다. 


지휘자만 더 뛰어났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뛰어난 주역 두 명 덕택에 전반적으로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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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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