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트레일러를 이 부분으로 해놓은지 모르겠다)

훌륭한 작품의 뛰어난 공연



Les vêpres siciliennes 는 흔히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로 번역하는데 굳이 시칠리아를 시칠리아 섬이라고 표기해야할 이유를 모르겠다. 세비야의 이발사를 세비야 시의 이발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는 내가 유일하게 모르는 베르디의 중기 이후 오페라다. 2013년 베르디 기념해부터 돈 카를로나 운명의 힘 같은 작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 잘 모르는 작품 두개가 바로 시칠리아와 가면 무도회다. 예전부터 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헤어하임이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출 한 것이 발매돼 바로 구입했다. 구입한지 꽤 됐는데도 아직 못보고 있는데, 시칠리아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헤어하임 연출을 볼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헤어하임 연출을 즐기기 위한 예습으로 시칠리아 영상을 보기로 했다. 


이 네덜란드 오페라 공연 역시도 전통적인 연출이 아니라서 선뜻 손이 가진 않았다. 전위적인 연출을 옹호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너무 파격적이지 않은 것으로 시작하고 싶은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다행히도 무서워 보이는 표지와 달리 크리슈토프 로이의 연출은 리브레토에 굉장히 충실했다.


작품에 대한 느낌을 먼저 말해보자면, 내가 베르디 오페라를 보면서 리브레토에 감탄하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트라비아타의 리브레토에는 환장하지만, 그건 내가 트라비아타를 잘 알게된 다음부터였다. 시칠리아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나를 몰입시켰다. 출생의 비밀, 개인의 사랑과 집단의 목적과의 갈등 이라는 건 베르디 오페라에도 자주 나오는 것들이지만 이 요소들이 정말로 잘 짜여져있다. 


혹시 시칠리아를 아직 안본 사람들을 위한 줄거리 간단 요약. 설마 나만 안 본 건 아니겠지? 


인물이 겪는 갈등이 명확할 때 오페라 아리아는 더 쉽게 빛날 수 있다. 글루크의 이피제니 시리즈에서 그걸 느꼈다. 그리스 비극에서 인물이 겪는 갈등은 누구나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역시 마찬 가지다. 2막에서 자신의 신부들을 뺐긴 시칠리아 인들의 합창에서 분노를 느끼는 건 정말로 쉬운 일이다. 3막에서 몽포르가 자신의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부르는 노래나, 몽포르와 앙리가 출생의 비밀을 두고 다투는 듀엣 역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3막과 5막에서 앙리와 엘레느가 겪는 갈등이야 말로 가장 강렬한 것이다. 혈육의 정을 무시하지 못하고 동지를 배신하는 앙리의 모습이 나부코의 이스마엘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앙리 스스로가 엄청난 갈등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부코에서는 단순히 이스마엘레에게 린치를 가하는 듯한 합창 뿐이라면, 시칠리아 3막 피날레에서는 배신의 괴로움을 노래하는 앙리와 배신당한 시칠리아인들의 충격, 그리고 앙리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에 기뻐하는 몽포르의 감정들이 엮어진다. 5막에서 갈등하는 엘레느와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앙리와 프로시다의 삼중창도 흥미로운 장면이다. 트로바토레 4막 레오노라와 만리코의 장면이 떠오르는데, 이 상황에서 루나 백작 까지 같이 껴있는 장면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또 하나 몰입하기 좋은 이유는 바로 다른 나라의 피지배에 있는 조국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국뽕을 참 싫어하지만 이게 또 한국인이면 연상을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특히 1,2막에서 시칠리아 여자들을 강제로 뺏어가는 장면은 당연히 위안부를 연상시킨다. 우리나라에서 초연이 됐는 지 모르겠느데 이걸 일제시대로 바꿔놓으면 딱이다. 프로시다 극중 직업이 의사라는데 어차피 자막으로 표현하면 醫師가 아니라 義士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오페라 현지화는 이럴 때 필요한거다.


시칠리아가 잘 공연되지 않는 이유가 거대한 스케일(시칠리아 합창단과 프랑스 합창단이 필요해 100명이 넘게 필요하다고 한다)과 딱히 훌륭하지 않은 음악 때문이라는데 음악 역시 굉장히 즐거웠다. 1막 첫 합창부터 흥미로운데 2막 피날레도 아주 훌륭하다. 특히 3막 마지막 합창에서 조국을 노래하는 멜로디에서 눈물이 났는데, 선율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과 유사했다. 1막 첫 엘레느의 노래나 3막 1장에서 테너 바리톤의 듀엣이라든가, 4막에서 테너 소프라노의 아리아 등이 인상깊었다. 



작품도 훌륭하지만 공연도 정말 좋다. 일단 프랑스어 판본이라는 점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별 기대를 안하고 있었는데 첫 합창부터 놀라운 퀄리티를 보여준다. 앞선 취리히 오페라 합창단을 들으면서 내가 왜 오페라를 듣고 있나 우울해졌는데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공연이 문제라는 걸 보여줬다. 아 정말 처음 듣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랑 오페라인 특성상 합창단이 아주 중요한데 정말 잘해준다. 앙상블도 좋고 두 합창단이 대비되는 효과도 크다. 합창단만 훌륭해도 오페라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는 것 같다. 


가수 중엔 테너 부르카르트 프리츠Burkhard Fritz가 가장 빛난다. 물론 다른 배우들도 뛰어나지만 프리츠는 힘이 있으면서도 깔끔한 목소리, 아주 훌륭한 프랑스어 딕션, 관객을 몰입시키는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프랑스어 발음이 정말 뛰어난데 이름을 안봤으면 당연히 프랑스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그냥 발음만 듣고 있어도 행복할 지경이다.

그 다음으로는 엘레느역의 바르바라 하브만Barbara Haveman이 뛰어나다. 프리츠가 보여주는 장점을 하브만도 잘 보여주는데 역시 딕션이 뛰어나다. 프랑스 오페라는 이 맛에 듣는 것 같다. 1막 첫 노래부터 실력을 보여주는데, 노래가 훌륭해서 대단한 가수구나 싶었다.

몽포르 역의 바리톤과 프로시다 역의 베이스 역시 상당히 괜찮다. 다만 노래에서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2%가 부족하긴 하다. 딕션은 그것보다 좀 더 부족한 것 같고. 몽포르 역 바리톤 딕션이 특히 좀 구리다. 어라 찾아보니까 바이로이트 갔을 때 군터를 불렀던 사람이다.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지휘 파올로 카리냐니Paolo Carignani 는 앞서 본 브레겐츠 투란도트의 지휘자기도 했는데, 아주 훌륭하다. 템포를 몰아붙일 때는 몰아붙이고 조용하고 느린 부분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방법도 안다. 기본적으로 스코어에 있는 극적인 표현들을 잘 살려내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법을 아는 지휘자다. 


연출은 훌륭하다. 배경을 현대로 옮겼을 때의 장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 군인들의 만행이 좀더 악랄하게 다가온다. 2막 프로시다의 아리아에서 프로젝터로 가사에 맞는 시칠리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역시 괜찮은 효과를 준다. 3막의 대립을 간결하게 잘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화려한 무대장치보다는 인물들의 연기만으로 극을 만들어낸다. 3막에서 프로시다와 엘레느가 시칠리아인들에게 고함치는 듯한 연출은 아주 훌륭하다. 


이상하게도 서곡을 1막이 아닌 2막 전에 연주한다. 아는 곡이 서곡 뿐이라서 기대했는데 1막이 바로 시작해서 좀 당황했었다. 이 서곡이 흐르는 동안 주요 인물들의 모습과 예전 모습을 보여주는데 극 중에 등장하지 않는 주요 인물 (앙리의 어머니, 엘레느의 오빠)을 표현해주는 것 역시 좋았다. 3막의 발레도 이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그려내는 걸로 바꾸어두었다. 콘비츠니의 동 카를로스 연출을 떠올리게 하는데 아주 훌륭한 선택이다. 아 진짜 발레가 나왔으면 정말 통째로 스킵하고 싶었을 거다. 극 중에서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앙리와 엘레느의 관계, 그리고 몽포르의 앙리의 관계를 부연설명해준다. 


원래 극이 4막까지는 굉장히 잘가다가 4막에서 결혼을 결정하면서 아주 이상해져버리는데, 연출을 통해 그 부분을 훌륭하게 커버했다. 앙리와 엘레느의 결혼이 프랑스와 시칠리아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줄 거라고 모두들 희망차게 노래하지만 프랑스 군인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신부들이 끌려나오면서 이 상황이 절대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을리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5막의 즐거운 노래 장면에서 시간 흐름을 조정해 앙리와 엘레느 사이에 애가 태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이건 앙리와 엘레느의 평화로운 사랑을 강조하며 엘레느가 이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코펜하겐 반지의 신들의 황혼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4막에서 먼저 죽는 것 처럼 보이는 프로시다가 5막에 다시 등장하는 것도 훌륭한 장치다. 복수만을 외치는 프로시다의 모습은 정말로 죽은 유령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며, 엘레느가 죽은 오빠를 핑계대며 결혼을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쉽게 연결이 된다. 무엇보다 프로시다가 미치도록 복수를 갈망하는 이유가 필요한데, 자신의 죽음 만큼 좋은 설명도 없다.



네덜란드 오페라 공연의 좋은 점은 보너스 영상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저번 이피제니 시리즈에서도 언급했었는데, 역시 같은 인터뷰어가 보너스 영상을 진행한다. 신기하게도 주역 가수가 아니라 한 합창단 단원의 리허설 과정을 쫓아가며 인터뷰한다. 오페라 자체가 합창단이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고, 합창단 입장에서의 리허설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신선한 시각이다. 


취리히 카브/팔리로 얻은 상처를 정화시켜준 공연이다. 보고나니 정말 행복해졌다. 아직 디비디 파일로 밖에 없는 공연인데 블루레이로 다시 사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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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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