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코민을 보러 브레멘까지.
매번 유럽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오페라 베이스에서 마르코 코민의 공연 일정을 확인했다. 언젠가 다시 볼일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영 기회가 닿질 않았다. 프리랜서인데다 공연 횟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내가 가는 기간에 공연을 하는 경우도 별로 없고 하더라도 갈만한 장소에서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코민의 공연을 다시 보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기회가 왔다. 학회가 끝나는 주 주말에, 학회가 있는 도시에서 40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브레멘에서 코민이 알치나를 지휘한다는 거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일정 확정. 사실 400km면 내가 생각해도 먼 거리긴 한데, 당시 의식의 흐름은 이런 거였다. 학회가 네덜란드다 -> 네덜란드는 독일 북서쪽과 붙어있다 -> 브레멘은 독일 북서부에 있다 -> 네덜란드와 브레멘은 가깝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한 일정이었다. 쿠렌치스로 시작해 코민으로 끝나는, 완벽한 일정이었다.
쿠렌치스 팬질을 해본 경험이 쌓였으니 코민에게도 선물을 준비했다. 마지막 날인 이 공연 때문에 여행 내내 캐리어에 담고 다니느라 고생을 하긴 했다. 편지도 썼다. 공연 한번 보고 너무 오바 떠는 거 아닌가 스스로 묻기도 했지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준 사람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편지에는 2년 전에 본 공연에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러고 나서 내가 블로그에 얼마나 자주 코민을 언급했는지, 이제 다른 방문객들도 댓글로 당신 이야기를 한다 등등 열심히 적었다.
네덜란드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중간쯤인 뒤셀도르프에서 출발하는 거니 더 가깝겠지 싶었지만 사실 별로 안 가까웠다. 도이체반이 나를 어떻게 또 골탕먹일까 긴장했지만 무사히 브레멘에 도착했다.
브레멘하면 역시 브레멘 음악대 아니겠는가! 개나 소나동물들까지 음악을 하는 도시이니 오페라 보러오기 좋은 도시인 것만 같다. 브레멘 음악대는 브레멘에 도착하지 못 했다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도시 곳곳에서 브레멘 음악대 기념품을 판다. 구시가지에는 관광 명소로 브레멘 음악대 동상도 있다.
코민 팬질은 조금 미뤄두고 공연 이야기부터 해보자. 알치나는 내가 처음으로 집중 감상했던 바로크 오페라다. 2015년에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에서 이 작품의 공연이 있었기에 열심히 예습해서 갔던 기억이 있다. 2017년에 바젤에서 마르콘이 지휘하는 알치나를 보러 갈 계획이었지만 그게 오페라베이스의 오기였단 걸 알고 결국 못 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알치나를 볼 수 있을 줄 알고 짠 계획 때문에 대신 보게 된 공연이 바로 코민의 돈 조반니였다. 그때 못본 알치나를 코민이 대신 해주는 셈이 됐다.
보러 가기 전 걱정도 많았다. 혹시나 내가 봤던 돈 조반니의 강렬한 기억은 왜곡된 게 아닐까. 독일 일정의 마지막 날, 아름다운 퀴빌리에 극장에 있다보니 너무 센티멘탈해졌던 것은 아닐까. 혹은 지휘자가 자신의 모든 노력과 우주의 기운을 한 공연에 몰아 썼던 것이 아닐까. 괜히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오진 않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극장 안에 들어갔다. 브레멘 극장은 상당히 작아서 바로크 오페라를 보기에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코민이 입장하고 나 역시 긴장된 마음으로 첫 음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것은 기우였다. 2년 전에 보았던 돈 조반니가 신기루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민은 GMD가 아니라 객원으로 온 곳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내는 지휘자였다.
코민의 특징은 정확하고 투명한 음색이다. 이를 위해 코민은 대부분의 경우 아티큘레이션을 상당히 짧게 가져간다. 자칫하면 메마르게 들릴 수 있는 이 사운드는 쿠렌치스가 모차르트 레퀴엠에서 의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저음 현악기의 어택이 강렬하고 길게 뭉개뜨리지 않기 때문에 아주 단단하게 들리는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많은 바로크 음반에서 시도하는 화려한 음향과는 꽤나 거리가 있기 때문에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해석이었다.
코민은 2년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개성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특히나 음의 길이에 있어서는 아마 악보에 표시되어있는 음가보다도 훨씬 짧게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보였다. 베토벤 교향곡 관련 문헌을 읽을 때 베토벤이 쉼표가 뒷따르는 음의 길이를 표기할 때 실제 원하는 길이와 상관없이 그냥 그리기 편한 음표를 썼다는 내용이 있었다. 즉 4분음표로 써져있다고 해서 실제로 그 4분음표의 길이를 다 채우고 쉼표로 넘어가길 원했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인데, 코민은 바로크 악보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덕분에 전반적으로 소리가 압축되고 리듬감이 더 돋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신기한 건 이렇게 만들어진 사운드가 마치 HIP 전문 연주단체의 소리처럼 들린다는 점이었다. 반주를 맡은 단체는 브레멘 필하모닉이었는데 (여담이지만 브레멘에 er을 추가한 형태는 Bremener가 아니라 Bremer라서 오케스트라의 이름은 Bremer Philharmoniker다.) 일반적인 교향악단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 특이한 바로크 사운드를 소화해냈다. 게어트너플라츠 극장 오케스트라의 경우 코민이 GMD로 있던 곳이니 그런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객원으로도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 사운드를 이렇게 잘 소화해내는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저번 모차르트 때 감탄했던 것 처럼 역시 코민은 가수의 호흡과 노래를 따라가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었다. 가수가 노래하는 데 찰떡 같이 붙어가는 이 안정감. 오페라 공연을 볼 때마다 그리웠던 이 느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프로그램 내지를 보니 남독일 신문(Süddeutschen Zeitung)에서 코민을 생명력있는 정밀함의 장인(Meister der lebendigen Präzision)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살아있는 정밀함이야 말로 코민을 정확하게 수사하는 표현이다. 오케스트라 안에서의 정밀함과 오케스트라-가수 간의 정밀함을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수준의 매우 높은 정밀함으로 완성해내는 것이 바로 코민의 특징이다. 이 점에서도 역시 쿠렌치스와 코민은 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 둘의 공연을 연달아 보면서 내가 왜 이 두 사람에게 푹 빠졌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바로 코민의 프레이징이었다. 이 모든 걸 결국 하나로 이어서 음악을 만드는 능력에서도 코민은 역시 빛났다. 여전히 기억나는 장면은 33번 아리아인 3막의 루제로 아리아다. 현악기의 칼같은 앙상블을 밑바닥에 깔아서 긴장감을 기본으로 살리고 호른이 포인트를 딱딱 넣어주는데 스릴감 넘쳤다. 하지만 바로크 오페라다 보니 모차르트 오페라와는 달리 오케스트라 자체만으로 음악을 완성하기 어렵고 가수 서포팅에 한정된 부분이 많다 보니 코민다운 특별함을 마음껏 보이기에 적절한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곡이 지나갈 때마다 공연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이 남았고, 마지막 피날레 합창은 그런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인냥 유독 카타르시스 뿜어낼 만큼 잘 디자인된 프레이징을 보여줬다.
연출이나 가수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벌써 공연 본지 4달이 지났는데 생각이 날 리가... 가수들은 모두 잘 불렀고 연기도 괜찮았다. 연출은 중간중간에 분명한 유머 포인트도 잘 집어넣었다. 마지막의 해피엔딩도 꽤 많은 장면을 잘라낸 점은 꽤나 아쉬웠다. 특히 오베르토 역의 노래를 좋아하는 편이라 오베르토가 아예 통편집 된 점도 아쉬웠다.
팬질 이야기.
어차피 브레멘 도시 관광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고 공연 잘 보고 선물이나 잘 전달하면 되는 거였다. 조금 여유가 있게 공연장을 찾아갔다. 처음가는 극장이지만 이제 출연자 출입구는 누구에게 묻지 않고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극장을 따라 한바퀴 돌며 뒤로 가보니 출연자 출입구로 보이는 게 있었다.
여기가 출입구가 맞나 긴가민가 하는 사이에 안경을 쓰고 체격이 꽤 좋은 아저씨가 한명 나왔다. 짧고 검은 곱슬머리를 보니 코민과도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기엔 체격도 크고 좀 더 후덕해보였다. 코민 보러 오니까 코민 닮은 아저씨가 다 보이네. 그러고 나니 문득 내가 코민을 다시 봐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연본 지도 오래됐고 특별히 사진이나 영상으로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방금 지나간 아저씨가 코민이면 엄청 웃기겠구만, 선물이랑 편지까지 챙겨왔는데 못알아본 격이니ㅋㅋ
그렇게 출입구를 들어가서 두리번 거리니 경비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어설픈 독일어로 지휘자에게 선물을 전달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누구??" 이러던 와중에 마침 동양인 단원 분이 지나가다 도와주셨다. 한두 마디 하다가 서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국어로 대화하게 돼서 지휘자님께 선물 전해드리려 왔다고 하니까 그 분 왈, "아 밖에 계시던데요?"
그러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것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제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일어났습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ㅜㅜ
방금 문 앞에서 마주친 그 건장한 안경 아저씨가 바로 코민이었던 것이다.. 2년 동안 공연 보러오겠다고 그렇게 난리부르스를 치며 애타게 부르던 그 이름을, 정말 코앞에서 보고도 모르고 지나친 것이다. 뭐 코민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확히 못 알아본 건 사실이다. 변명하자면 내가 기억하던 인상이랑 너무 달라졌다. 안경도 쓰고 샤프하던 얼굴도 벤게로프 마냥 후덕해지고...
그렇게 밖에서 단원이랑 이야기하고 있던 코민한테 가서, 안녕하세요 제가 2년전에 님 공연보고 팬이 된 사람인데여... 라고 말을 하며 쭈뼜쭈뼛 선물을 건네줬다. 코민도 기억했을 거 아냐. 방금 문 앞에 지나가다가 마주친 동양인 청년이 2분 쯤 있다가 돌아와서 자기 팬이라고 하면, 팬이라면서 방금 날 못 알아본거야?? 선물 심부름 온건가?? 했겠지...
반쯤 패닉한 상황에서 어색한 인사를 끝내고 돌아나왔다. 그러다가 한 가지 빠뜨린게 생각났다. 종이 쇼핑백에 한과 선물과 편지를 넣었는데, 편지를 넣었다는 말을 안 한거다. 에이 뭐 그래도 궁금해서 뭐있나 들여보면 편지도 발견하겠지...
공연이 끝나고 다시 출연자 출입구에서 쭈뼛쭈볏 기다렸다. 프리미어 날이다보니 다들 성공적인 공연을 자축하는 분위기가 한층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다 코민을 만나게됐다. 그때 코민이 나에게 인사하는 뉘앙스를 보고 내가 걱정했던 일이 사실이었구나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편지를 안 읽은 거다. 편지를 읽었다면 그래도 자기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비행기타고 네덜란드에서 기차타고온 팬을 그렇게 동네 팬 처럼 대하진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코민이 절대 나를 무시하거나 한건 아니었고, 그냥 공연 잘 봤냐, 잘 봤다니 기쁘다 이런 평이한 내용이었다.
원래는 사인받으려고 예전에 찍은 코민 사진도 인화해갔는데 이걸 바덴바덴 숙소에 놓고왔다. 같이 인화해놓은 쿠렌치스 사진 꺼내다가 코민 사진도 빠져버린거지... 쿠렌치스 덕질에 정신이 팔려 코민을 못 챙겼으니 다 내 팬심이 부족한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ㅠㅠ 그렇게 되니 딱히 사인받을 사진도 없고 음반도 없고... 그나마 프로그램 북을 들고가긴 했는데... 프리미어가 끝나고 뒷풀이에 급히 가야하는 사람을 붙잡고 사인을 해달라고 하기엔 내 스스로도 좀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그래 난 리스너 팬이니까 공연을 본 것만으로 만족해!!! 라고 열심히 되뇌이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코민과 작별했다.
그렇게 나오는 길이었는데, 한국인 단원과 지인 분들이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이번에 지휘자 어땠어? 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으니 귀가 쫑긋 열렸다. 뭔가 가서 인사하고 대화에 끼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저 소심하게 지나가며 '공연 잘 봤습니다' 간단히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러고 5분 쯤 걸어가다가 아 그냥 "제가 술과 식사를 얼마든지 대접해드릴테니 썰 좀 풀어주세요" 라고 할걸 후회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렇게 긴 일정이 끝나고 다음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다행히 기차가 연착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코민과의 인연은 나의 이불킥할만한 실수들 때문에 아쉬움이 남게됐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핸드폰에 믿지 못할 알림이 왔다.
Marco Comin 이름으로 메세지가 와있는 것이다!!!!
내용을 대충 옮기자면 '프리미어 공연 끝나고 이야기 나눌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미안했다. 선물 정말 고맙고 한과 맛있더라. 무엇보다 편지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너가 내 연주를 그렇게 좋아했다니 정말 기쁘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말을 못했는데 이번 주말에 브레멘에서 관현악 콘서트도 한다. 너가 아직 한국에 안 갔으면 공연에 초대하고 싶다' 였다.
편지에 써놓은 이름을 보고 직접 페북에서 검색해서 찾았나보다. 세상에 이런일이... 안타깝게도 직접 공연을 볼 순 없었지만 내 편지를 잘 읽어주고 직접 내 이름으로 검색해볼 만큼 의미있게 받아주었다는 거니, 공연을 보지 못 해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 쯤되면 나름 성공한 팬질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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