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연출가 이름 하나 내걸고 영상물을 출시했을 때 알아봤어야 한다. 이런 건 사는 게 아니라고.


연출가 다리오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잘로(Giallo, 찾아보니 지알로라고 많이 하던데 맞는 발음은 당연히 잘-로) 영화의 거장이라고 한다. 영화 감독 연출의 오페라 중 인상 깊었던 건 미하엘 하네케의 코지 판 투테가 있다. 도발적이지만 차분한 해석에 독창적이면서도 차가운 미장센이 인상깊은 연출이었다. 다리오 아르젠토에 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연출가 이름 하나 내걸고 영상물을 냈으니 한번 볼만 하지 않을까 싶어 구입했다.


내 실수였다. 이탈리아 연출에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부터 잘못되었는데, 이건 이탈리아 연출 중에서도 별로다. 이탈리아 연출 치고 괜찮은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대부분 구리다. 홍보 문구에는 선혈이 낭자한 고어물 같은 연출이라고 하는데, 진짜 별거 없다. 반코랑 맥베스 죽일 때 피가 좀 많이 나오는 편인데, 어차피 그 쪽 방면으로는 이미 홀텐의 라인골트가 있어서 별 감흥도 없다. 이걸 보고 나니 홀텐 반지가 얼마나 대단한 연출인지 새삼 깨달았다. 라인골트에서 알베리히의 반지를 뺐기 위해 칼로 팔을 썰어버리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맥베스 목 날아가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첫 째, 그런 폭력적인 행동이 나올 거라는 예측이 안된 상황이라는 점, 둘 째, 그 폭력성이 이야기의 양상을 다르게 보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반코를 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굳이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딱히 다를 것도 없다. 거기다 맥베스 죽는 건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좀 놀라긴 했지만 반코는 셔츠에서 토마토 주스가 뿜어져 나오는 정도라 별로 신기하지도 않았다. 


마녀 역할로 전라의 무용수 세 명이 나온다. 역시나 별 효과가 없다. 무대는 아름다운가? 말 시체가 꽤나 무서운 분위기를 풍겨주지만 그렇다고 미장센 하나로 극을 이끌어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이탈리아 연출 치고는 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거장의 이름값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라고 평을 했겠지만, 이 영상을 보고 다음날 고선웅 연출을 보고나니 아르젠토의 연기 지도는 아주아주 훌륭한 편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오케스트라는 정말 끔찍한 수준이다. 그나마 망작으로 취급되는 취리히 하우스 Cav/Pag에서처럼 '반주가 별로다'라는 걸 넘어서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한국 오케스트라 수준이다. 일단 현악기 주자의 수가 명백하게 부족하기 때문에 가냘프고 앙상한 소리만 남아있다. 여기에 음정도 자주 틀리고, 다이나믹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지휘자 주세페 사바티니Giuseppe Sabbatini가 무언가 특별한 걸 만들려고 시도하는 듯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이렇게 구리다면 지휘자의 능력 부재를 걸고 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인 극을 이끌어나가고 선율을 풀어나가는 실력은 괜찮아보이지만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능력이 부족한 듯 보인다. 그래도 가수들이 전체적으로 노래에서 심리극적인 면모를 살려내는 처리가 훌륭했던 건 지휘자의 공이 크지 않을까 싶다.

뭔가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 테너 맞다.

목소리가 상당히 아름다운 테너다. 57년생이니 아직 노래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찌감치 지휘로 전향한 것 같다. 여담이지만 지휘할 때 안경을 쓰는데 이 모습이 문재인이랑 아주 조금 닮았다.



가수 중엔 타이틀 롤 주세페 알토마레Giuseppe Altomare가 아주 전형적으로 안정적인 이탈리아 바리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목소리가 특별히 강렬하진 않지만 내야할만큼 내주고, 부드러운 레가토를 구사하지만 그렇다고 힘이 없지도 않은 그런 가수다. 아 그리고 노래를 더 잘했다면 얼빠가 상당히 많이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생겼다.  반코 역의 조르조 주세피니Girgio Giuseppini 역시 마찬가지.


맥베스 역의 디미트라 테오도시우Dimitra Theodossiou는 좀 특이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리스 출신이고, 이 캐스팅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이다. 비브라토의 폭이 너무 크고 목소리가 이상하게 두꺼운 것이 내가 안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프레이징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상당히 놀랍다. 카발레타 Or tutti sorgete에서 어둠아 날 감춰라 하는 대목에서 조용하고 느리게 어두운 목소리로 처리해가는 모습은 관객의 집중을 완벽히 끌어모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설득당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어려운 역할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또박또박 처리하려는 인상이다.


오케스트라를 빼면 오히려 열심히 홍보한 연출보다 음악적인 면이 흥미롭다. 작은 극장에서 맥베스의 가사에 담긴 심리적인 면들이 상당히 잘 표현됐다. 가수들이 다들 지르기 보다는 뭔가 묘한 긴장감을 쌓아올리는 것도 매력이다. 


그래도 맥베스를 파고 싶은 덕후가 아니라면 돈 주고 사지는 않길 권하고 싶다. 아니 돈이 안 들더라도 이거 볼 시간이 있으면 다른 오페라를 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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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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