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오페라는 얼마나 연극적일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연출과 음악.


사실 딱히 끌리는 타이틀은 아니었다. 메트 로델린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재미없는 반주의 바로크 오페라를 듣는 건 상당히 지루한 일이기 때문에 이 덴마크 조합이 과연 얼마나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가수도 아는 사람이 안드레아스 숄 밖에 없었고.

하지만 저 트레일러 영상을 보는데 전투씬을 의자뺏기와 가위바위보로 연출한 걸 보고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 저런 연출이면 믿을만 하겠다. 결과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파르테노페라는 작품 자체가 헨델의 다른 오페라 세리아와 달리 상당히 밝고 유머러스한 면이 많이 있는데 이를 정말 연극적으로 잘 풀어나갔다. 


파르테노페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파르테노페는 나폴리를 세운 여왕이다. 여자 1호라고 부르자. 이 여자 1호를 사랑하는 남자가 두 명있다. 둘 중 한명이 로도스의 왕자인가 뭐 어쩌는데 딱히 중요하진 않다. 남자 1호와 남자 2호라고 부르자. 여자 1호는 두 남자 중에서 2호를 좋아한다. 남자 1호는 여자 1호를 좋아하면서 좋아한다고 말도 못하는 찌질남이다. 이때 갑자기 배에서 난파당해서 도착했다고 우기는 남자 3호가 등장한다. 이 남자 3호는 바로크 오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장 여자다. 이 사람을 여자 2호 (남자 3호)라고 하자. 여자 2호는 사실 남자 2호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남자 2호가 여자 2호를 버리고 여자 1호에게 가버린 것이다. 자신의 남자를 되찾기 위해 여자 2호는 열심히 뒷공작을 한다. 남자 1호에게 가서 얼른 가서 고백하라고 뽐뿌질도 넣고, 여자 1호 앞에서 남자 2호가 얼마나 무능한 놈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다. 중간에 여자 1호에게 들이대는 남자 4호도 등장하지만 아리아도 몇개 없는 쩌리이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여튼 여자 2호는 남자 2호의 파렴치한 행적을 고발하고, 여자 1호는 순정남 남자 1호에게 마음을 돌리고 남자 2호는 여자 2호의 품에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이 오페라가 괜찮은 이유는 바로크 오페라 치고 러브라인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자 둘 남자 둘. 여기에 사실 남자 두명이 더 껴있긴 하지만 남자 4호는 이야기에 별 영향을 안주는 쩌리고 남자 5호는 연애 전선이 없는 피가로결혼에서의 바질리오 같은 존재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바로크식 다각관계에 비하면 얼마나 간결한 구조인가!


여기에 인물들 성격도 상당히 흥미롭다. 여자 1호는 여왕답게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을 완벽히 가지고 놀 줄 안다. 여기에 남자 4호가 군대 끌고와서 협박하니까 선두에서서 개박살내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거기에 여자 2호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남장 하고 전쟁에 나가고 온갖 공작을 일삼는 사람이다. 반면 남자 1호는 여자 앞에서 '나 너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를 못해서 계속 관객들에게 고구마를 먹여주는 존재고 남자 2호는 여자 1호와 여자 2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찌질한 인간이다. 성격 배분에서부터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


물론 이렇게 성격이 분명해 보이는 것은 프란치스코 네그린Francisco Negrin의 연출이 연극적으로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가수들의 동선과 연기가 아주 디테일하면서 동시에 음악과 텍스트에 딱 붙어있다. 이 텍스트를 과연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설득력있다. 여기에 연기가 텍스트보다 앞서 예고된다는 점도 장점이다. 아직 텍스트로 그들의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은 순간에도 이미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물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작품 전체의 텍스트를 충분히 고려하여 캐릭터를 완성시키기 때문에 뒤에 아리아가 나올 때 이런 성격의 인물이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게 딱 기가 막히게 들어맞을 정도다. 예를 들어서 파르테노페의 가신? 역할을 하는 남자 5호는 뚜쟁이 같은 포지션으로 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3막 시작에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아리아가 나올 때, 연출가의 설계가 얼마나 적절했는지 감탄하게 된다.


아리아를 부를 때도 무대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기를 하는 것도 상당히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무리수가 없이 연극적으로 자연스럽다. 시대나 상황을 과하게 바꾸는 것 없이 작품의 감정선만으로 승부를 본다. 그럼에도 어떤 오페라보다도 더 공감가고 사실적인 감정들을 표현해낸다. 여기에 작품에 있는 유머러스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표면으로 끌어낸 것 역시 연출가의 뛰어난 작업 결과다.


무엇보다 레치타티보의 처리 역시 매우 훌륭했다. 단순히 아리아 사이를 매꾸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연극의 한 장면 처럼 서로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유독 이 작품에서 리브레토나 헨델의 음악이나 레치타티보가 잘 연결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엔 분명 그 점을 훌륭하게 살려낸 연출과 지휘자의 공이 들어가 있다.


라르스 울리크 모르텐센Lars Ulrik Mortensen과 그가 이끄는 콘체르토 코펜하겐은 덴마크의 시대연주 단체다. 작품 내내 그들의 기량에는 불만을 가질만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반적으로 극을 강렬하게 이끌어나가는 느낌보다는 가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를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느낌이다. 로스미라가 다이아나의 노래를 부를 때 나오는 사냥 나팔 호른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지휘자나 악단이나 부드러운 피아노가 상당히 훌륭하다. 단순히 음량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느낌이 물씬 살아있는 피아노를 구사한다.


가수 진들도 모두 훌륭하다. 안드레아스 숄의 독특한 목소리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노래에서보다 느리고 서정적인 노래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여기에 상당히 강렬한 역할을 표현해야하는 파르테노페역 잉거 담-옌센Inger Dam-Jensen과 로즈미라(여자 2호) 역의 투바 세밍센Tuva Semmingsen 역시 상당히 뛰어난 노래를 들려준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운터테너인 크리스토프 뒤모Christophe Dumaux가 남자 1호인 아르민도 역으로 나오는데 역할의 비중이 아주 크지 않은게 좀 안타까울 뿐이다. 뒤모의 목소리는 카운터테너의 목소리 중 가장 따뜻하며 남자의 목소리 같은 느낌이 강하다. 줄리오 체사레에서 톨로메오로 또라이 같은 모습만 보여주다 순정남을 연기하는 모습을 처음봐서 인상적이기도 했다. 모든 캐스팅의 연기력이 훌륭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헨델 오페라 중에서도 내용이 간명하고 현대적이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카메라의 사용이 너무 난잡하다는 것이다. 온갖 각도가 다 등장하고 가수 클로즈업도 매우 심한 편이다. 가수들의 연기력이 정말 좋아서 클로즈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만 30프레임의 영상에서 이런 클로즈업은 눈이 너무 피곤하다. 홀텐 코펜하겐 반지도 카메라 워크가 너무 적극적인 편이라 아쉬웠는데 이 작품 역시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게 많아보인다. 그 점을 빼면 연출이나 연주나 적극 추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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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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