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농쿠르의 완벽한 반주.


작품으로서 피델리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박하다. 피델리오 한번도 안 들어본 사람도 '솔직히 베토벤이 오페라는 잘 못한다'라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되풀이하는 걸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베토벤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생각했을 때 분명 이 오페라는 충분히 인기있는 편은 아니다. 차이콥스키나 드보르자크의 경우도 러시아어와 체코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베토벤 보단 더 자주 상연된다.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독일어권의 공연 비중을 생각했을 때 오페라베이스 기준 37위라는 건 높다고 보긴 힘들테다. 편성이 훨씬 큰 장미의 기사보다 한 단계 높은 순위다. 


독일 기악 대가들의 오페라 부진이 베토벤만의 일은 아니다. 슈베르트와 슈만을 생각하면 피델리오의 대접은 오히려 훌륭한 편이다. 성공적인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오케스트라와 성악을 다루는 능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예시다. 이들의 '실패'를 살펴보면 오페라의 특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피델리오를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완벽하다'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베토벤의 작품을 완벽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일단 성공하지 못한 모든 오페라가 그렇듯 리브레토의 구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처음 자퀴노와 마르첼리네의 듀엣은  여러모로 당황스럽다. 오페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의 장면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연애 감정이 있는 두 인물의 듀엣으로 시작하는 건 오페라의 방향을 흔들어 놓는다. 

악역의 포지션 역시 애매하다. 그의 가장 사악한 행적은 플로레스탄을 투옥시킨 것일텐데 이는 오페라 밖의 일이다. 그가 왜 플로레스탄을 투옥시켰는지, 왜 플로레스탄을 일찍 죽이지 않고 그 때까지 살려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바리톤 악역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악랄한 계략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의 사악함을 드러낼 수 있는 연극적 장면도 사실 몇 되지 않는다.

또한 작품에 존재하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 과장 좀 보태서, 이 오페라를 2막 부터 시작한다고 했을 때 딱히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다. 1막에서 피델리오와 마르첼리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그 긴 장면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햇볕을 쐬러나온 죄수들의 합창 역시 연극적인 면에서 암시적인 효과는 있을지언정 극에 필수적인 사건이 아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갈등이 심화되는 장면이라고는 돈 피사로가 플로레스탄을 죽이러 올 때 뿐이다. 비슷한 작품인 마탄을 생각해보자. 카스파가 막스를 마탄으로 유혹하는 장면, 막스와 아가테가 다투는 장면, 말할 것도 없는 늑대 계곡 장면, 아가테가 조화를 받는 장면, 막스가 아가테를 쏘는 장면, 심지어 이야기가 종국으로 치닫아 막스의 처벌을 받는 장면 까지도 흥미있게 풀어나간다. 돈 피사로가 나팔 소리 한 번에 사그라지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매력적인 음악들로 가득하다. 베토벤의 느린 선율이 뛰어나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다른 구성으로 오히려 초기 바그너를 듣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사실 리브레토 상으로도 이 작품은 화란인과 많이 닮아있다. 남자를 구원하려는 여자, 그런 여자를 짝사랑하는 사람, 딸의 결혼에 대해 돈을 먼저 이야기하는 아버지. 1막의 콰르텟은 연극적인 재미는 평범하지만 음악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파트다. 아리아는 등장인물당 하나 씩만 배분하며 대부분의 장면이 중창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점도 매력적인 부분이다.


아르농쿠르의 반주는 매우 정확하며 쾌활하다. 훌륭한 지휘란 남들이 그냥 넘기는 것을 쉽게 넘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연주하는 것을 못 넘어가는 것 말이다. 이 공연에서 아르농쿠르의 반주가 딱 그렇다. 모든 프레이즈가 방향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음악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아르농쿠르의 베토벤 교향곡이 뛰어나 듯 피델리오의 반주 역시 매순간 약동한다.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상쾌하며 가끔 튀어나오는 호른의 연주 역시 시원스럽다.


가수진 역시 훌륭하다. 12년이 지난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훌륭한 가수들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카우프만은 특유의 목소리가 여전하지만 발성이 지금과 다르다. 지금은 좀 더 깊은 소리가 나는 반면에 이 공연에서는 좀 더 목으로 부르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의 표현력은 역시나 뛰어나고, 외모는 더 훌륭하다. 아주 깊은 지하에 죄수가 한 명 있는데, 잘 생겼어.... 여기다 거지 컨셉은 정말 잘 잡는다. 괴롭히고 싶게 생긴 가수는 새싹 때도 달랐다. 다만 말하는 목소리가 노래 목소리에 비해 너무 부드러워 부자연스럽다.


타이틀 롤을 맡은 가수는 카밀라 닐룬트Camilla Nylund다. 2014 바이로이트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로 들은 적이 있다. 닐룬트는 이 때 독어 디션이 좀 투박한 게 대사가 아닌 노래에서까지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단단하며 안정적인 발성은 요즘 가수에게 찾아보기 힘든 장점이다. 여기에 음의 시작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것은 상당히 고풍스러운 기품을 풍긴다. 세련되지만 전통적인 분장 덕에 마치 옛날 황금시대의 성악가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준다.


로코 역을 맡은 라슬로 폴가르László Pólgár의 노래도 좋고 돈 피사로 역의 알프레드 무프Alfred Muff 역시 사악한 음성을 꽤 잘 내주는 편이다. 그 외 조연들도 취리히 답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안타깝게도 독일어 네이티브가 없어 대사 처리는 많이 아쉬운 편이다. 아, 돈 페르난도 역할로 귄터 그로이스뵈크가 나온다. 이 때는 아직 꽃피기 전이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키 크고, 컴버배치를 떠올리는 외모를 가졌지만 노래는 조금 답답하다. 얘가 10년 뒤에 잘츠부르크에서 옥스 남작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위르겐 플림의 연출은 전통적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세련된 느낌을 살려낸다. 특히 가수들의 시선 처리가 훌륭해서 관객을 상당히 몰입시킨다. 무언가 진부할 법도 한 연출이지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적이며 분위기에 어울린다. 


아 블루레이지만 당연히 화질구지다. 저 커버 이미지에서 글자 해상도만 높고 사진 이미지는 구린 게 잘못 나온게 아니라 진짜 표지가 저렇게 생겼다. 받고 나면 그 표지 스캔해서 집에서 프린트로 인쇄한 해적반 느낌 난다. 다행히 자막 만큼은 블루레이 화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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