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현대 오페라의 표본.


브레겐츠에서 앙드레 차이코프스키André Tchaikowsky(1935 - 1982)의 '베니스의 상인' 초연을 올렸다. 차이코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계 작곡가로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대단한 영빠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를 영국 사람보다 잘 알았으며 웬만한 영국 사람보다 영어도 잘 했다고. 죽을 때도 자신의 해골을 로열 셰익스피어 컴패니에 기증해서 햄릿에서 소품으로 써달라고 부탁한 덕후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데이빗 테넌트가 햄릿을 맡았을 때 그 해골을 직접 사용했다고... 성공한 덕후 폴란드 출신이므로 러시아 чайковский(차이콥스키)와 한글 표기가 다르다. 시마놉스키라고 쓰지 않고 시마노프스키라고 쓰는 것과 같다.


보통 작곡가로보단 피아니스트로 더 잘 알려져있다. 본인은 연주 활동보다 작곡 활동을 더 좋아한 듯 하다. 연주 때는 일부러 작곡을 안 했는데, 작곡을 붙잡으면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게 되서라고 한다. 작곡과 연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갔다. 아래는 유튜브에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섬세한 연주다. 차이콥, 라흐, 그리그 같은 곡은 너무 진부해서 잘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브레겐츠에서 열심히 밀었던 폴란드 작곡가의 연장선이다. 호수 무대에서 메이저 작품을 올려왔던 것과 달리 축제 극장안에서는 2009년 로저 왕, 2010년 승객과 같은 현대 오페라 걸작을 올렸다. 이 작품은 2013년에 올렸다.


사실 완성된 것은 1980년이었으며, 1981년에 ENO에서 상연을 고려했다고 한다. 당시 ENO 음악 감독이 마크 엘더였고 감독이 데이빗 파운트니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새 작품을 올리기에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ENO는 상연을 포기하고 그 뒤로 이 작품은 잊혀져 단 한번도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그리고 30년도 넘은 2013년에, 당시 이 작품을 올리지 못 했던 거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던 데이빗 파운트니가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에서 초연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이 빛을 받지 못했던 것은 차이코프스키가 영국 국민이 아니라 폴란드 이민자였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이민자들이 사회의 주류가 못되는 것은 20세기나 21세기나 매한가지인가보다. 실내악 작품도 아닌, 이 처럼 거대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도움과 연줄이 필요하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다. 


작품을 보면서 이 작품이 음악적으로 상당히 완성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인물들의 가사를 어울리게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명이 함께 노래할 때 연극적인 에너지가 쌓여가는 게 확실하다. 2막 끝에서 바사니오가 안토니오의 소식을 듣고 돌아가길 결심하는 장면에서의 앙상블이라든가, 3막 샤일록의 재판 장면에서 각각의 가사들이 켭켭이 쌓여가 극에 에너지를 확실하게 부여한다. 연극 작품을 오페라로 옮겼을 때 생기는 장점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할까. 

능청스러운 패러디도 빼어나다. 2막에서 포샤를 위해 3명의 구혼자가 나타나는 장면은 춤곡으로 처리되는데, 여기서 레오노레 서곡 3번의 트럼펫 콜 부분과 차이콥 4번 1악장 시작의 트럼펫 파트를 바순이 연주한다. 코믹한 장면에 비장한 음악을, 트럼펫이 아닌 바순으로 연주하여 관객을 피식하게 만든다. 압권은 포샤가 바사니오에게 반지를 주며 '이 반지 잃어버리면 큰일 날 줄 알아!'라고 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 오케스트라나 포샤나 함께 니벨룽의 반지 저주 모티프를 노래한다. 반지를 받는 바사니오가 니벨룽의 반지라도 쳐다보는 듯한 표정도 압권.

독창 장면 중에서는 3막 재판에서 샤일록이 유대인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울부짖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대인도 너희들과 똑같은 공기로 숨을 쉬고 똑같은 밥을 먹으며 똑같은 상처를 입는다. 

기악 반주 역시 음악을 잘 이끌어 나간다. 너무 튀거나 무거운 음색은 아니고 꽤 다채로운 관현악법을 활용한다. 3막에서 두 남자가 반지를 넘겨주는 장면에서 딱 끊고 무거운 간주곡으로 바로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장면 역시 훌륭하다.


이 작품과 연출이 함께 섞여 재해석한 셰익스피어도 상당히 설득력있다. 사실 참신한 해석이라기보다는 현대 들어서는 당연한 해석이라고 할까. 샤일록이 유대인이라고 겪었던 설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 샤일록을 가장 공감가는 피해자로 만들어 놓는다. 안토니오는 바사니오를 짝사랑하는 게이로 표현했다. 사실 친구한테 그 정도 큰 돈을 아무 이유 없이 빌려주고 자기 목숨을 저당잡힌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일단 이런 해석 자체는 2005년 영화판 베니스의 상인과 똑같아 보인다. 저 영화를 안 봐서 모르겠지만, 안토니오가 게이라는 건 대놓고 나타난다. 이렇게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두 자본가가 실제로는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차별 받는 이야기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결말에서 바사니오가 포샤와 결혼하고, 제시카 역시 로렌초와 결혼하였을 때 샤일록과 안토니오 모두 사랑하던 사람을 잃게 된다.

흥미로운 건 차이코프스키 본인이 샤일록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며 동시에 안토니오 처럼 동성애자였다는 점이다. 여기에 폴란드 출신 이민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말러보다도 더 심각한 이방인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가 베니스의 상인을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이 점 역시 아주 강하게 작용했을 거라 의심치않는다. 

부끄럽지만 아직 원작을 제대로 안 읽어봤다. 글 쓰기 전에 읽어볼까 했지만 또 시간이 안 나서.. 그래서 확실하진 않지만, 연출을 제외하고서라도 차이코프스키가 이 작품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상당히 부각시켜놨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등장 인물들은 샤일록을 부를 때마다 꾸준히 Jew! 라고 부른다. 유대인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어떻게 차별이 작동할 수 있는지 오페라에서 괴로우리 만큼 잘 느낄 수 있다.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는 '여배우' '미스 박'이라는 표현이 왜 문제가 되냐는 사람들에게 들이밀어주고 싶다.



케이스 워너Keith Warner의 연출도 훌륭하다. 무대의 의상이나 디자인이 정말 세련되었다. 이 부분은 무대, 의상 디자인을 맡은 애슐리 마틴-데이비스Ashley Martin-Davis의 공이다. 50분 가까이 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마틴-데이비스가 연출인가 싶을 만큼 많이 등장하며 무대, 의상 컨셉을 완전히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듯 하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디테일에 약간 놀랐는데, 가수들 사진 받아보면서 머리 스타일이 연출 컨셉과 어울릴 수 있을지, 아니라면 어떻게 가발을 씌울건지.. 거기다 무대에 놓을 나무를 찾기 위해 직접 마음에 드는 모양의 나무를 찾아서 베어온다ㄷㄷ 

비주얼은 탁월하고, 여기에 케이스 워너는 주로 가수들의 연기 지도를 담당했다. 영국 연출가들이 연기 지도에 실패하는 거 본 적 있나? 가수들 모두 각자의 캐릭터를 잘 살리면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시작과 끝은 안토니오가 프로이트에게 상담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전 다른 셰익스피어 원작 오페라를 볼 때는 해본 적 없는 생각인데, 작곡가가 한번 해석한 셰익스피어를 또 해석하는 것은 원작 연극을 연출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일이겠구나 싶었다. 아마 희곡, 소설 원작의 모든 오페라가 그렇긴 하겠지만, 이처럼 작곡가의 극 해석이 뚜렷하게 드러난 오페라라면 연출가에게도 쉽지 않겠구나 싶다.


가수진이 특별히 화려하진 않지만, 샤일록 역을 맡은 아드리안 에뢰트Adrian Eröd는 특히 훌륭하다. 라이만 메데아에서 이아손 역을 맡기도 했는데, 현대 오페라를 자주 하나보다. 노래나 연기력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다. 보고 있다보면 정말 샤일록한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게이 안토니오는 카운터테너 크리스토퍼 에인슬리Christopher Ainslie가 맡았다. 스타 카운터테너에 비하면 살짝 아쉽지만 나름 괜찮다. 바사니오 역의 테너 찰스 워크맨Charles Workman은 가수의 능력에 비해 역할이 너무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포샤 역의 막달레나 안나 호프만Magdalena Anna Hofmann가 상당히 훌륭하고 네리사 역의 Verena Gunz 역시 괜찮은 노래를 들려준다.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초심자라고 해서 거부감 들 만한 음악은 아니라 현대 오페라 입문에 좋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띄어난 원작을 잘 옮겨낸 훌륭한 예시다. 오페라가 연극에 비해 관객에게 더 전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실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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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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