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의 힘.

(유튭은 전막 영상 링크. 소리가 블루레이에 비해 많이 구리다.)


드디어 대망의 100번째 리뷰다. 1년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그리고 훈련소로 1달을 날려먹고서도 100편을 채웠으니, 참 열심히도 봤다. 100편을 본 것 보다도 한 편도 빠짐 없이 리뷰를 남겼다는 게 의미가 깊다.

100번 째 작품을 뭘로 장식할까 고민하다가 첫 시작을 서부의 아가씨로 했으니 100번째도 서부의 아가씨를 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작품에서 중요한 건 카우프만이었지 서부의 아가씨가 아니었잖아? 카우프만 빠질로 시작했으니 카우프만 빠질로 기념해야지. 아직 사놓고 못보고 있던 것 중 하나가 운명의 힘이다.


이 프로덕션이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건 2014년 바이로이트 여행을 갈 때 이 작품을 보러갈까 고민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2013/2014 시즌 작품이었던 이 운명의 힘은 7월 오페라 축제 때 공연됐다(실제로 녹화도 오페라 축제 공연에 했다). 내가 바이로이트를 갔던 게 8월 중순이었으니, 여행 계획을 앞으로 연장시키면 이것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일정을 양끝으로 늘려갈 수록, 아 이것도 볼 수 있고 저것도 볼 수 있고.. 그 때 내 레이더에 걸렸떤 작품 중 하나가 바덴바덴 페스티벌에서 담라우와 비야손, 크바스토프 등이 나오고 네제세겡이 지휘하는 후궁 탈출이었다. 다행힌지 모르겠지만 어찌어찌 내 욕심을 줄이고 이 작품을 포기할 수 있었다.


여튼 그 때 눈을 딱 감고 포기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어찌 포기했지 싶은 캐스팅이다. 뮌헨의 자랑 카우프만과 뮌헨 전속 가수 느낌 나는 하르테로스, 요즘 잘 나가는 루도빅 테지에와 비탈리 코발료프, 여기에 나쁜 메조로 곧 잘 나오는 나디아 크라스테바까지.


운명의 힘은 운이 좋게도 우리나라에서 실연으로 두 번이나 본 작품이다. 2013년 베르디 기념해에 뭔가 색다른 베르디는 올려야겠고, 그러면서 적당히 만만한 작품을 고르다보니 그 해 예당의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과 대구 오페라 페스티벌 두 곳에서 모두 각각 운명의 힘을 올렸다. 영상물로는 옛날 메트 영상과 메타 지휘 빈 슈타츠오퍼 영상을 보았다. 


운명의 힘의 리브레토가 비판받는 점은 우연이 너무 많다는 것, 그리고 너무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 가볍게 하기 위해 넣은 프레지오실라나 멜리토네 같은 인물의 역할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약점들이 섞여서 기묘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인간들을 끊임없이 답이 안 나오는 파멸로 몰아버리는 극적인 능력 만큼은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쿠세이는 새로운 해석보단 연극적인 느낌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플롯이 파편화되어 진행되는 이 작품을 하나로 엮기 위해 서곡에서부터 바르가스 가족의 저녁 식사 장면을 보여준다. 식탁에는 나중에 프레지오실라가 되는 하녀도 있고 멜리토네가 되는 수사도 있다. 오페라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주요 배역들을 어떻게든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아버지 칼라트라바 후작은 후에 과르디아노 신부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빈 슈타츠오퍼 공연 처럼 단순히 가수가 1인 2역을 맡는 수준이 아니다. 두 인물의 복장은 이들이 확연하게 같은 인물임을 시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돈 카를로를 1막에서 어린 아이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되면 1막 어린아이와 똑같은 복장을 입은 테지에가 자신의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오열하고 있다. 이로서 돈 카를로는 아버지가 살해당했을 때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2막에서 갑툭튀한 인물이 아니라,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인간이 된다.


이 작품을 하나로 엮는 건 인물의 구성 뿐만이 아니다. 무대의 앞쪽에 놓여진 식탁, 즉 서곡에서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나누던 식탁은 무대 배경이 어떻게 변하든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이 존재한다. 이 비좁은 식탁은 카를로와 알바로가 결투를 하는 중요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막이 바뀔 때마다 저녁 식사 상황에서 레오노라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이 모든 게 마치 레오노라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암시를 준다. 4막에서 혼자 빵을 먹는 장면이 서곡 연기 시퀀스에도 똑같이 등장한다는 점도 이 암시의 일부다. 


쿠세이는 영리하게도 요즘 오페라 계의 치트키라고 할 수 있는 '아 슈ㅣ발 쿰'을 너무 적나라하게 쓰지 않는다. 이것이 일종의 꿈이라는 암시를 계속 주면서도, 마지막 상황에서 이걸 모두 꿈이라고 명확하게 밝히는 무리수를 던지진 않는다. 


2막 레오노라의 입교?장면에서 신부들이 돈 알바로와 같은 헤어스타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아직 짐작가는 것이 없다. 3막에서 공간의 축을 뒤흔드는 것은 상당히 인상깊었다.

http://operajournal.blogspot.kr/2014/01/verdi-la-forza-del-destino.html   (글은 안 읽어봄)


연기의 디테일 역시 이 공연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돈 알바로와 돈 카를로의 4막 듀엣 장면은 오페라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비장미 넘치는 장면이었다. 복수를 하러 찾아온건지, 반가운 친구를 찾아온건지 모르게 만드는 묘한 표정을 짓는 돈 카를로를 별 경계없이 맞이하는 돈 알바로. 복수심에 지배돼 거의 정신병자가 된 것 같은 돈 카를로. 특히 돈 카를로가 물라토라고 모욕하는 장면에서 카우프만이 탁자 위로 점프해 미끄러져가며 돈 카를로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 여기에 돈 카를로가 Finalmente!라고 울부짖고 슬퍼하는 장면은 간지의 폭풍이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보통 돈 카를로는 복수에 불타는 정말 단순한 인간으로만 묘사되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고통이 계속해서 표출된다. 드디어 자신의 결투를 받아들이는 돈 알바로를 바라보며 오히려 괴로움을  느끼는 카를로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평생을 복수를 위해 뒤틀린 삶을 살았던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살짝 사소한 거지만 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도 극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요소다. 칼라트라바 후작이 총에 맞는 장면, 레오노라가 카를로에게 찔리는 장면에서 소품 활용이 아주 훌륭하다.


하지만 이 연출에 가장 큰 약점이 있으니, 바로 카우프만의 헤어스타일이다.

http://topcools.com/wp-content/uploads/2016/05/anja-harteros-and-jonas-kaufmann.jpg


누가 카우프만한테 이런 가발 씌우래..... 어쩜 이렇게 얼빠장사를 못할 수 있니.... 자기 오빠한테 이상한 옷 입혔다고 오열하던 하일트 님의 기분을 알 것만 같다.


다년 간의 카우프만 얼빠 경험으로써 말하자면, 카우프만은 헤어스타일에 따라 잘생김의 정도가 꽤나 달라진다. 특히 이렇게 모든 머리를 뒤로 넘겨버리면, 그 정사각형 같은 얼굴이 이상하게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얼굴형을 커버해줄 수 있는 머리스타일이 중요하다. 

또 하나 카우프만의 단점이, 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거다. 사이먼 킨/리/사이드 같은 가수야 벗겨놓을 수록 매력이 상승하지만, 카우프만은 정말 절대 옷 벗으면 안된다. 약간 큰 얼굴과 좁은 어깨가 확연히 드러나고 여기에 물 살까지.. 이 공연에서 카우프만의 복장과 저 요상한 헤어스타일은 카우프만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당연한 거지만 카우프만은 노래를 잘 한다. 자기 고향에서 하는 공연인데 잘해야지 암. 첫 등장 부터 기합 빡 넣고 부르는 게 느껴진다. 그 뒤로 노래를 잘 한다. 고음도 잘 내고 연기도 잘한다. 아 근데 어째서 헤어스타일 빼고 카우프만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이렇게 없는 거지..... 이제 내가 리스너가 아니라 얼빠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인가 흑흑 


하르테로스Anja Harteros는 목소리가 디도나토와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여튼 도도하며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인데 여기에 기교적인 능력이 탁월하다. 표현의 폭이 아주 넓고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소리를 마음 껏 뽑아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진다. 고음을 피아노로 뽑아내도 흔들리거나 불안정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힘이 필요한 역할에서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완벽하게 압도할 수 있는 가수는 말 그대로 손에 꼽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블로그에서 하르테로스를 리뷰하는 건 처음이다.


테지에Ludovic Tézier는 앞서 라 트라비아타와 라 파보리트 영상물로 리뷰한 적이 있다. 훌륭한 목소리에 비해서 연기가 많이 아쉬운 가수였는데, 쿠세이가 얘를 사람 만들어놨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돈 카를로라고 할 만큼 아주 확실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입술을 떠는 것, 넋이 나간 사람 처럼 시선을 처리하는 것 등 카를로의 피폐해진 정신을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그 동안 부족했던 연기는 가수 문제가 아니라 연출 문제였구나 싶을 정도다. 2막 페레다의 노래를 부를 때는 그냥 좋은 목소리로 노래 잘하는 가수네 라고 생각했지만 3막, 4막으로 갈수록 캐릭터에 걸맞는 처절한 노래를 뽑아낸다. 안정적인 발성이 다이아몬드 같은 단단함으로 표출되면서 캐릭터를 완성해간다. 테지에 깠던 거 반성합니다.


비탈리 코발료프Vitalij Kowaljow는 바렌보임 스칼라 반지에서 발퀴레 보탄을 맡았던 베이스다. 보탄을 맡기에는 너무 심심한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대체로 차분하게 노래를 이끌어나가야하는 칼라트라바 후작과 과르디아노 신부 역할에는 상당히 잘 어울린다.


빈 슈타츠오퍼 운명의 힘에서도 프레치오실라를 맡았던 나디아 크라스테바Nadia Krasteva는 이 역할에 딱 어울리는 '지저분한 집시' 느낌을 아주 잘 살려낸다. 콘서트에서는 아주체나를 종종 부르는 것 같은데, 나이 때문인지 오페라 무대에서는 이제 막 맡기시작한 듯하다. 아주체나로도 아주 훌륭할 거라 의심치 않는다.


은근히 중요한 역할인 멜리토네 역의 레나토 지롤라미Renato Girolami 역시 연기나 노래가 조연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뛰어나다. 바소 부포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노래를 들려준다.


애셔 피시Asher Fisch의 지휘는 무난하다. 답답하거나 부족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뛰어나지도 않다. 피아니스트 시절부터 바그너/리스트 편곡 음반을 내고 시애틀 반지도 맡고 하는 걸 보면 바그너에 대단한 애정이 있는 것 같은데, 베르디에서 특별히 인상깊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이름이 Ash Fischer였으면 왠지 더 좋은 지휘자 같았을 텐데...


Die Welt 지가 "Opera could never have been better of more grand" 라고 평했다는 것에 완벽히 동의하진 않지만, 최소한 그들의 말이 완전한 허풍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니에서 출시돼 값이 싸지만 부클릿 내용이나 부가 영상이 없다는 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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