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리의 명작 발굴, DNO에선 되는 집안의 향기가 난다.


프레스토에서 블루레이 목록을 보다가 이 작품 Ercole Amante의 표지를 처음 봤을 때 무슨 현대 게이 오페라인줄 알았다. 도대체 왜 이 작품이 바로크 오페라 세일 리스트에 들어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작곡가가 프란체스코 카발리였다. 


카발리라는 이름이 익숙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동시대의 륄리가 프랑스 발레 오페라의 기원을 이룩한 것과 자신의 병크로 음악사에 큼지막한 발작국을 남긴 것과 달리 카발리는 몬테베르디의 계승자일 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카발리 발굴 작업이 활발해 지고 있다. 


알렉스 로스의 칼럼에 따르면 메이저 극장의 중요한 카발리 발굴의 시작은 아마도 줄리니가 1952년 피렌체에서 디도네를 연주한 것일 듯 하다. 그 뒤로 60년대에 글라인드본이 카발리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이에 뒤따라 앨런 커티스 같은 지휘자들도 카발리에 관심을 가지게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글라인드본은 2017년에도 히페르메스트라Hipermestra를 상연하며 카발리 발굴의 선두 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내가 카발리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크리스티 지휘의 캉Caen 극장의 디도네La Didone 공연 영상이었다. 그 디도와 에네아스 이야기 맞다. 처음 듣는 작곡가였지만 그라모폰 딱지랑 BBC 딱지가 붙어있길래 샀다. 딱지가 하나 붙어있으면 관심이 가고, 두 개쯤 붙어있으면 마음이 움직인다.


사실 디도네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는데, 딱 한 가지 남은 인상은 몬테베르디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모호하며 오페라 전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전형적인 몬테베르디 스타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솔직히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닌데...


아닌 게 아니라 카발리는 몬테베르디 제자다. 몬테베르디가 지휘자로 있던 합창단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약했으며 몬테베르디의 악보를 고치는 작업도 함께했다. 몬테베르디 이후 베니스 오페라의 전성기를 이어간 작곡가로, 틀에 박힌 18세기 오페라 세리아 이전에 몬테베르디 스타일의 오페라를 꽃피운 마지막 작곡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음 솔직히 몬테베르디랑 헨델 사이에 아는 작곡가가 카발리 밖에 안 떠오름... 


여튼 이 게이 오페라 같이 생긴 작품의 이탈리아 원제는 Ercole amante로 낯설어보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 정도가 된다. 저 빌리 같이 생긴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에르콜레, 즉 헤라클레스다. 줄거리를 대충 요약하면 에르콜레가 자기 부인인 데이아니라를 놨두고 이올레에게 푹 빠지면서 시작한다. 문제는 이올레는 에르콜레와 데이아니라의 아들인 일로Hyllo의 연인이다. 에르콜레는 이올레를 얻으려고 하고, 주노네(헤라)는 결혼의 서약을 어긴 에르콜레를 징벌하려고 애쓴다. 결국 에르콜레와 이올레의 결혼식에 데이아니라가 마법의 힘이 있는 로브를 보내고, 그 옷을 입은 에르콜레가 불타는 고통을 느끼며 죽는다. 죽고 나서 불쌍하답시고 천국에 가서 미의 신(Bellezza, 헤베)과 결혼한다. 


이 작품은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제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위촉된 작품이다. 그래서 5막 구성 이외에 프랑스 왕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따로 붙는다. 그래서 첫 노래와 마지막 노래가 프랑스어다. 중간 중간 극의 내용에 맞게 발레 음악이 많이 들어있는데 이 음악은 륄리가 작곡한 것들이다. 현대에 와서 새로 집어넣은 건 아니고 초연 때 부터 륄리의 곡을 사용했다고 한다. 카발리와 륄리가 공동 작업을 한 건 아니고, 높으신 분들이 적당히 가져다 넣은 것 같다.

아이러니한 건 루이 14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오페라인데 정작 담겨있는 내용은 개막장극이라는 점이다. 오페라 마지막에 결혼식을 올리는 건 에르콜레이니 루이 14세를 에르콜레에 비유한 것은 확실한데, 작품에서 묘사되는 에르콜레의 행동은 쌩양아치일 뿐이다. 이게 어떻게 검열을 통과하고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는지 미스테리.. 


카발리의 작품의 핵심은 레치타티보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형태의 음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몬테베르디에서 내려온 이 전통은 18세기 들어서는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로 이어진 듯 한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역사적 가교가 아니었을까 싶다. 모든 레치타티보는 분명한 감정을 내포하며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가사와 자연스럽게 결합한다. 레치타티보로 쌓인 극적 긴장감은 다양한 형태의 음악으로 해결되는데, 아리아 위주의 다른 오페라들과 달리 중창과 합창의 비중이 상당한 편이다. 


카발리가 특히 강점을 보인 것은 애가Lamento다. 단순한 저음 패턴과 하행하는 선율을 사용한 애가를 하나의 중요한 형식으로 자리잡게 할 정도였는데, 퍼셀의 디도의 애가 역시 카발리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애가를 이중창으로 만든 Figlio, tu prigioniero (아들아, 너가 감옥에 간단 말이냐?) 는 극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아주 훌륭한 장면이다. 아래 영상의 3분 28초 부터다. 이올레를 겁탈하려던 계획이 마음대로 안 풀린 에르콜레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아들과 부인을 죽이려다 감옥에 가두고 멀리 보내버리겠다고 하는데, 이 때 아들과 부인이 침통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다. 


이 영상 뒷부분에는 오페라의 코믹함을 담당하는 두 하인의 듀엣이 나타난다. 비극과 희극의 균형을 한 작품 안에서 만들어내는 카발리의 감각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자체도 훌륭하지만 공연의 완성도도 매우 높다. DNO는 스타 캐스팅 없이도 언제나 완성도 높은 연주와 연출을 보여주는데 페스티벌로 치면 글라인드본에 비유할만 하다. 캐스팅을 확인할 필요 없이 DNO라는 이름 하나만 믿어도 괜찮다고 할까. 아 물론 네덜란드 반지는 구립니다. 반지 영상 중에 뒤에서 순위권에 들 공연이에요.


지휘 이보르 볼튼Ivor Bolton을 특급 지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공연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발레 음악에서 보여주는 생기나 애가에서 보여주는 잔잔한 분위기나 모두 놀랄 만큼 훌륭하다. 모든 레치타티보가 아콤파냐토인 이 작품에서 가수의 흐름에 맞게 받쳐주는 능력도 돋보인다. 무엇보다 모든 가수가 이렇게 감정을 담아 자연스럽게 노래해냈다는 것은 지휘자의 실력을 증명해내는 결과다. 콘체르토 쾰른의 풍성하면

서도 정확한 연주도 아주 매력적이다. 


타이틀 롤을 맡은 루카 피사로니Luca Pisaroni는 잘츠부르크에서 마제토와 레포렐로를 맡았고 그 중에서 레포렐로를 맡은 공연은 직접 본 적도 있어 잘 아는 가수다. 사실 피사로니의 레퍼토리를 잘 모르고 글라인드본 리날도 영상을 보고 얘가 바로크도 부르네? 라고 생각했었는데 원래 본업이 모차르트랑 바로크 전문이었다. 잘츠 공연을 보고 나서 레포렐로를 하기에는 목소리가 충분히 두꺼운 스타일은 아니라고 썼던데 (그 날 돈조가 다르칸젤로였다) 에르콜레 역에서도 극저음이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를 환상적이다라는 감탄이 나올 만큼 흥미진진하게 처리해내는 모습은 발군이었다. 피가로나 레포렐로 마제토 같은 역할만 보니 몰랐는데 이렇게 사나운 소리를 적재적소에 잘 낼 수 있구나 싶었다. 목소리도 좋고 가사 처리, 연기, 프레이징도 자연스러워서  마제토에서 레폴레로로 승진한 걸 보고 돈 조반니도 곧 꿰차겠구나 싶었는데 이런 모습이라면 아주 기대된다. 


그 외에도 모든 가수들이 골고루 잘해준다. 라모 조로아스트르에도 나왔던 안나 마리아 판차렐라Anna Maria Panzarella는 바로크 가수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주노네 역할의 안나 보니타티부스Anna Bonitatibus 역시 어둡고 두터운 목소리와 연극적 표현력을 갖춘 메조다. 여기에 이올레 역의 베로니카 칸제미Veronica Cangemi 역시 독특한 고요함을 담은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이렇게 세 여자 배역이 각자 다른 목소리로 매력을 발산한다. 


여러가지 베이스 역할을 맡은 움베르토 키움모Umberto Chiummo는 아주 강렬한 저음을 보여주고, 하인 리코 역의 말린 밀러Marlin Miller와 시동 역 카운터테너 팀 미드Tim Mead 도 각자 목소리의 매력을 잘 살려내며 코믹한 역할을 소화한다. 메인 테너를 맡은 제레미 오벤던Jeremy Ovenden은 뛰어난 이탈리아어 딕션과 적당한 찌질함으로 구구절절하게 노래하는데 너무 느끼하지 않게 딱 적당한 정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수 중에 판차렐라와 보니타티부스, 말린 밀러의 이탈리아어 딕션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레치타티보가 많은 오페라의 특성 상 가끔 튀어나오는 어색한 딕션은 몰입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데이빗 올든David Alden은 테아트로 레알에서 알치나를 연출한 걸 직접 본 적이 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라운 연출로 마음에 쏙 들었다. 바로크 오페라를 다루는 감각이 상당히 탁월한 연출가다. 

올든은 바로크의 마법과 환상을 약간은 우스운 모습으로 표현해낸다. 작품에 담겨있는 희극적인 요소들을 생각할 때 올든의 연출 방향은 음악과 자연스레 맞아 떨어진다. 과감한 색깔과 초현실적인 상징들이 무대에 쏟아지면서 마치 달리의 회화를 연상케하기도 한다. 변태 같지만 캐릭터가 활실한 의상, 세세한 연기 지시, 음악의 분위기에 어우러지는 미장센과 동선 까지 모두 자연스럽다. 극 중 곳곳에 삽입된 발레 음악에는 적당한 현대 무용이 등장한다. 5막에서 헤라클레스에게 죽었던 영혼들이 미라 처럼 나타나는 대목에서 미라 코스튬의 디테일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논리적이거나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라기 보다는 감각적이며 본능적인 연출이다.


네덜란드 오페라의 영상물 답게 부가 영상이 아주 훌륭한 편이다. 가수 두 명의 인터뷰와 40분 가량의 메이킹 필름이 담겨있다. 이 중에서 단연 압권은 10분이 조금 넘는 피사로니 밀착 취재 영상이다. 공연을 준비할 때 하루의 일상을 열심히 쫓아다닌다. 아침에 일어나서 메일 확인하고 개 산책시킨다는 소소한 일과에서부터 부인이 웹 디자이너라 자기 공연 따라서 유럽 어디든 돌아다니는 집시 가족이라는 이야기도 해준다. 원래 가수들이 돌아다니는 일정이 너무 많다 보니까 이혼하는 경우도 많은데 피사로니 부부는 딱이구나 싶었다. 하루 종일 음악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자랑도 한다. 집에서 연습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떠돌이 집시 답게 아주 작은 미니 키보드로 연습하는데 이게 너무 귀엽더라ㅋㅋㅋ 심지어 저 키보드를 분장실 까지 가지고 간다. 에르콜레 코스튬 입고 노래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징징대면서 "옷이 너무 끼어서 땀이 차요. 그 trans.. 뭐더라"  -(아내) "증산transpire이야" -"아 맞요 그거. 이 장면은 편집해주세요ㅋㅋㅋ"  라고 하는 것도 귀엽다. 암스테르담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며 공원을 걷다가 부인한테 프로포즈한 에피소드도 말해준다. 그 때 같이 있던 개도 상황을 파악하고 자기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엄청 짖기 시작했다면서 얘도 우리의 결혼에 찬성했다며.... 피사로니 입덕 영상이라고 해야할까. 아 근데 부인이랑 같이 나오는 거라 빠순이들 한테는 귀중한 자료이면서 동시에 가슴에 대못 박는 영상이겠구나. 

나중에 검색해보다가 안 사실인데 피사로니 부인이 토머스 햄슨 딸이랜다ㅋㅋㅋㅋ 햄슨이랑 처음 같이 공연할 때 알게 된 사이라고.. 인터뷰 때 마치 부인은 음알못이라 음악 이야기는 안 하는 것 처럼 말하더니ㅋㅋㅋ


장인과 사위의 듀엣. 둘이 이 곡 갈라에서 부른 영상이 굉장히 많다. 피사로니가 햄슨보다 음역이 낮으니 실제 오페라 배역으로 장인 사위를 맡을 일은 없겠지..



총평하자면 지휘, 연출, 노래 모든 게 고루 어우러져있는 훌륭한 공연이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다른 오페라 극장에 비해서 네덜란드 오페라의 준비 기간이 더 길지 않을까 싶다. 공연의 완성도가 항상 높기 때문이다. 가수들 한명한명이 배역을 소화해내는 모습, 합창단이 연출에 어우러지는 모습, 늬앙스 변화가 풍성한 오케스트라 반주는 각각의 예술가들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히 DNO에서는 되는 집안의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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