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모차르트는 어떤 모습일까.


어렸을 적 오페라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접했던 작품이 바로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여러모로 사랑하는 작품인데 정작 블루레이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피결 블루레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 열심히 모으다보니 4장이나 사게 됐으니 다음 작품으로 피가로를 보기로 한 건 그닥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거기에 아트하우스에서 나온 이 타이틀이 케이스가 블루레이가 아닌 DVD케이스로 돼있어서 책장에서 혼자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어서 없애버리고 싶은 요인 중 하나였다.


1999년,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의 공연이다. 가디너의 피가로의 결혼 연주가 1993년이라고 하니 모차르트 오페라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003년 르네 야콥스의 녹음은 모페라가 시대 연주의 범주에 들어와야만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듯하다. 여기에 쿠렌치스, 혹은 네제세겡의 음반이 더해지면서 시대 연주는 완전히 모페라를 점령한다.


야콥스와 쿠렌치스의 음반에 경도된 나 같은 감상자에게 1999년 바렌보임의 피가로는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까. 바렌보임은 피아니스트로서나 지휘자로서나 모차르트를 중요하게 다뤄왔다. 모차르트가 시대 연주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5년 스페인 말라가로 학회를 갔을 때 바렌보임이 서동시집을 데리고 말라가에 왔었다. 별다른 공연이 없던 말라가에서 바렌보임이 학회 기간에 딱 맞춰 공연한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결국 안 갔다. 프로그램이 모차르트 교향곡 39, 40, 41번이었기 때문이다. 바렌보임의 모차르트?


아트하우스가 자사의 모든 영상물을 담은 두꺼운 카탈로그와 함께 바렌보임의 1999년 피가로의 결혼을 블루레이로 아주 싼 가격에 발매했다. 내 느낌적 느낌이지만, 대체로 아트하우스는 이렇게 프로모션으로 내놓는 영상물을 선택할 때 '버리는 카드'를 활용한다는 느낌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취리히 카발/팔리를 들 수 있고, 그 외에 마젤 트라비아타, 가티 엘렉트라 역시 화려한 가수진에 비해 전체적인 공연 퀄에는 물음표가 따른다. 아트하우스도 요즘 시대에 바렌보임의 모페라가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서곡 부터 바렌보임의 해석이 유행에 한참 뒤 떨어졌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무겁고 둔한 움직임은 답답한 녹음을 거쳐 어떠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마르첼리나 역의 로제마리 랑Rosemarie Lang은 레치타티보를 마치 베르디를 부르듯 처리한다. '요즘 바그너는 답이 없다'라는 말 만큼이나 '옛날 모차르트는 재미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다.


하지만 20세기도 모차르트를 자신 만의 방식으로 사랑한 건 분명하다. 가수들의 모든 가사를 생동감 있게 처리한다. 특별한 연출 없이,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늬앙스 없이 가수 혼자서 많은 걸 표현해야하는 상황에서 가수 한명 한명의 기량은 훨씬 더 빛날 수밖에 없다. 바렌보임의 반주가 무겁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오케스트라의 음색과 아티큘레이션이 무거운 것이 아니다. 피가로를 가벼운 희극이 아니라 갈등이 생길 때 마다 인물들의 심리가 변한다는 걸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크리슈토프 로이가 후궁 탈출 연출에서 대사를 느리게 처리한 것 처럼, 바렌보임이 레치타티보와 중창을 느리게 처리하는 것은 단순한 템포의 문제가 아니라 긴장이 생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바렌보임의 모차르트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감탄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2막에서 백작이 들이닥치는 장면부터 피날레 까지는 오페라 부파에서 가장 완벽한 극적 중창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바렌보임은 이 장면에서 폭넓은 템포 변화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은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르네 파페가 피가로를 부르는 걸 다시 본다는 건 요원한 일이다. 도로테아 뢰슈만Dorothea Röschmann 역시 이제 수잔나 보단 백작 부인이 어울린다. 에밀리 마기Emily Magee는 모차르트를 졸업하고 알슈에 어울리는 가수가 됐다. 음 이 경우는 사실 1999년에도 딱히  백작 부인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전설적인 테너 페터 슈라이어가 돈 바질리오를 맡았다. 99년에도 노래를 부르기에는 나이가 좀 든 모습이지만 바질리오를 소화해내기에는 그 관록이 차고 넘친다. 당연하게도 4막의 바질리오 아리아도 잘리지 않아 슈라이어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여기에 연광철이 바르톨로로 나와서 기가막힌 벤데타를 들려준다. 요즘 포지션이 완전히 겹치는 연광철과 파페가 한 무대에 등장하는 아주 보기 힘든 장면이 아닐까. 케루비노를 맡은 파트리샤 라이슬리Patricia Risley는 다른 역할에 비하면 아쉬운 편이다. 


가수 중 가장 빛나는 삼인방은 뢰슈만과 파페, 그리고 백작을 맡은 로만 트레켈Roman Trekel이다. 뢰슈만과 파페는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턱선이 살아있는 외모에서 먼저 놀라고 이 둘이 자기가 맡은 역할에 얼마나 적합한지 놀라게 된다. 진지충일 것 같은 파페가 피가로를 부른다고? 다르칸젤로 피가로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건가 싶었는데 아주 재치있는 노래를 들려준다. 역시 노래는 잘하는 사람이 잘한다는 진리... 깊이있는 목소리로 필요한 대목을 딱딱 집어줘가며 노래한다. 

뢰슈만은 상큼한 목소리나 목소리 연기 능력이 아주 탁월하다. 극에 필요한 노래를 정확하게 표현해내며 수잔나에 어울리는 연기까지 일품이다. 트레켈은 악역으로서 백작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3막의 아리아에서 정말 스트레스 받아 미쳐버릴 것 만 같은 백작의 모습을 구구절절 표현해낸다.


토마스 랑호프Thomas Langhoff의 연출은 요즘 연출에 비해 특별한 건 없지만 중간 중간 포인트가 확실하다. 3,4막에서 무대 위에 다리를 만들어 무대를 입체적으로 활용하고 결혼식에 배제된 돈 바질리오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을 넣는 것도 작품의 상황을 전달하는데 효과적이다. 2막 피날레 앙상블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피가로, 소파에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는 수잔나와 백작부인 등 모든 동선이 인물들의 노래와 잘 어우러지는데 연출가가 음악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의상 역시 세비야의 특징적인 무늬들을 중간중간 잘 활용하여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장한 케루비노의 걸음걸이는 진짜 남자배우가 여자를 연기하는 것 처럼 적당히 어색하다. 기본기에 충실하며 음악적으로 모범적인 연출이라할 수 있다.


1999년의 연주가 벌써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요즘이다. 99년 영상가지고 구시대 운운하면 모노 음반 듣는 사람들이 진노할 일이지만, 변한 것은 단지 17년의 시간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음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난 HIP의 절대적인 지지자로서 모페라의 연주 역시 진화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곧 과거의 해석이 녹슬었다는 것은 아님을 이 영상이 보여준다. 


오래된 공연이지만 화질이 해상도 뻥튀기는 아니고 나쁘지 않다. 부가 영상은 없고 부클릿에도 별다른 정보는 없다. 한글 자막의 퀄리티는 괜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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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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