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체크의 로맨티시즘.


20세기 오페라에서 야나체크의 중요성은 교향곡에서의 시벨리우스에 견줄 수 있다고 본다. 각각의 작곡가들이 서로 대체불가능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시대에 서로의 중요성을 어떻게 단순히 비교하겠냐만, 야나체크의 오페라는 드뷔시와 무소륵스키가 세운 이정표의 후손이라는 데서 오페라 사의 중요한 대목을 맡고 있다.


<카탸 카바노바Káťa Kabanová>(혹은 {Katia, Katya, Katja}  {Kabanova, Kabanowa})는 야나체크의 대표작 중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접하는 오페라다. 야나체크의 대표작 다섯 개 중 <예누파>보단 뒤에 오며  <교활한 새끼 암여우>, <마크로풀로스 재판>, <죽음의 집으로부터> 의 앞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극의 내용만 살펴보면 다섯 작품 중 가장 평범한 편이다. 시어머니에게 구박 받는 여주인공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앞서 예누파 글에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야나체크의 오페라에는 여성의 슬픔이 상당히 잘 드러나있다. 단순히 주인공이 여성인 것 뿐 아니라 마크로풀로스 처럼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거나 암여우 처럼 수탉의 압제에서 벗어나자고 암탉을 선동하기도 한다. 예누파는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겪게 되는 슬픔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카탸 카바노바 역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유부녀가 바람을 피고 그 댓가로 목숨을 잃는 것은 팔리아치나 외투와 같은 오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카탸 카바노바는 단순히 '바람핀 여편네'의 이야기가 아니다. 카탸의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자기보다 부인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며 대놓고 구박하며 남편은 그런 어머니에게 그냥 휘둘리기만 한다. 시어머니에게 자신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남편이란 놈은 그 둘 사이에서 어쩌지도 못하면서 카탸를 사랑한다는 말만 한다. 이때 그의 입양된 여동생이 한 마디 따끔하게 날린다. 넌 카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맨날 술만 쳐마시고 있지 않냐고. 혹시 오페라 배경이 한국인가요 남편이 잠깐 출장 차 집을 비우는 때에도 시어머니는 아들을 시켜 카탸에게 자신의 말을 복종하도록 맹세하게 만든다. 젊은 남자를 절대 쳐다보지도 않는 것도 맹세해야한다. 사람이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해보이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삶을 버텨낼 것인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카탸의 불륜이 다른 오페라와 다른 점은 타인에 의해 발각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가 실토한다는 것이다. 이 불쌍한 인간은 자신이 맛 본 일탈의 과육도 채 소화해내지 못 한다.


이 작품은 사건 보다 인물 내면에 치중하고 있다. 줄거리가 한 문장 "여자가 바람피다가 죄책감으로 실토하고 자살한다"로 요약되는 만큼 단순하다. 대체로 야나체크 오페라의 내용이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상당히 복잡한 플롯을 가진 것과는 비교되는 점이다. 오페라의 나머지는 이 사건의 원인과 경과를 보여주는 심리적인 장치들이다.

그렇기에 음악 역시 야나체크 특유의 향취가 다른 작품에 비해 덜 느껴지는 편이다. 예를 들어 카탸가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 나오는 음악은 푸치니스러운 느낌을 준다. 2막에서 카탸와 연인 보리스의 노래 역시 나비부인의 1막 듀엣을 연상케한다. 카탸가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순간 예누파에서 보여주던 소름끼치는 폭풍우가 나타날 법도 하지만 생각보다 잠잠한 편이다.


로버트 카슨의 연출은 세련됐다. 이 무대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세련됐다'라는 표현이다. 배경막은 은은한 그라데이션이 있고 무대는 물이 얇게 깔려있다. 얇은 나무판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만드는 길은 모양에 따라 여러 공간이 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빈 무대이면서 아름답다. 처음 전주곡에서 등장한 뒤 간주곡 마다 나무판을 이리저리 옮기는 인물들이 물에 빠지는 카탸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여자들이라는 점도 이 연출의 키포인트다.


반면 연주는 대체로 무난하거나 빈약한 편이다. 이르지 벨로흘라베크Jiří Bělohlávek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유명하고 BBC심포니랑 우리나라 내한도 했었지만 뭐 사실 별다른 인상이 없는 지휘자다. 벨로흘라베크 명반 아시는 분 추천 좀요... 뭐 체코 흙냄새 맡고 자란 사람에게 체코 음악의 맛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벨로흘라베크의 지휘는 세부적인 인상이 부족하다. 카탸 카바노바가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오페라라는 점은 있지만 그래도 프레이즈 하나하나가 특별한 방향성 없이 흘러가는 걸 계속 듣고 있는 건 지루한 일이다.

가수 역시 평범하다. 타이틀 롤을 맡은 카리타 마틸라Karita Mattila는 아바도와 많이 작업한 소프라노인데 목소리에서 나이가 느껴진다. 1960년 생이니 나이가 많은 건 아닌데 목소리가 허스키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연륜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노래와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렇다할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가수 이름을 보지 않아도 체코 네이티브가 아니라는 게 딕션에서 느껴지는 것도 단점이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는데 메탈의 나라 핀란드 출신 답게 람슈타인을 부른 영상이 있더라. 

심지어 지휘자도 한누 린투고 오케스트라는 (아마도)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ㅋㅋㅋㅋ


그 외 가수들도 특별히 돋보이는 사람은 없고 대체로 무난한 편이다. 카탸의 연인 역할인 보리스 역을 맡은 미로슬라프 드보르스키Miroslav Dvorsky는 외모가 테너 신동원 씨와 비슷한데다 목소리도 닮아서 좀 신기했다. 두상과 목소리가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아주 두터운 부클릿이 있지만 종이가 두껍고 언어 종류가 많아서 그렇지 내용은 짧은 편이다. 시놉시스 비슷한 글이 하나 있는데 음악 설명을 함께 엮어둔 글이니 작품을 보기 전에 읽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지휘자와 연출가의 인터뷰로 구성된 20여 분 정도의 부가 영상이 있는데 벨로흘라베크는 말을 참 재미없게 해서 영양가가 없고 카슨의 인터뷰가 그나마 유익하지만 영어 자막이 없어 듣기평가 느낌인데다 공연 영상과 교차 편집하지 않아 말만 계속 듣고 있으니 20분이 한 시간으로 느껴질 정도다.


요약: 이 작품의 유일한 블루레이지만 훌륭한 연출에 비해 음악이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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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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