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런던 여행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이 공연이었다. 나한테 글라인드본 명가수 다시 볼래 풀럼 오페라 다시 볼래 물어보면 좀 고민할 테다. 아 물론 같은 티켓값일 때 말하는 겁니다. 글라인드본 50만원 주고 보느니 고민도 안 하고 풀럼 오페라 10번 봄 ^^


'오페라 노잼 아닌가여' 하는 사람들 다 손목 붙잡고 데려가고 싶은 공연. 아니 오잘알도 감격할 공연이었음. 농담 안하고 앞으로도 평생 이 공연 이야기를 하고 다닐 것 같다.




풀럼 오페라Fulham opera의 팔스타프를 보았다. 




Wilton’s Music Hall 이라는 19세기부터 있던 건물에서 있는 공연이다. 풀럼오페라는 2014년에 팔스타프를 챔버오케로 올렸는데 같은 프로덕션 같은 캐스팅으로 장소를 옮겨 피아노 반주로 공연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공연을 갈지 말지 고민했다. 일단 내가 준비해야할 일이 하나 있어서 바쁘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리고 맘만 먹으면 이 공연 대신에 그 유명한 런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을 아무거나 골라 잡아 볼 수도 있었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퀄리티의 뮤지컬인데 말이다. 팔스타프를 아무리 듣보 오페라단이 잘해내도 솔직히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한편 보는 감동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뭐 어차피 뮤지컬을 얼마나 잘하는 지는 안바도 뻔하니 풀럼 오페라를 한번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2014년에 바이로이트 보러 갔다가 뮌헨 도착한 날 잠깐 들려서 보았던 소극장 라보엠에서 말도 안되는 퀄리티를 접했기 때문에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풀럼 FC도 있고 하니 풀럼 오페라라고 하면 뭔가 있어보이지만 그냥 지휘자 한명이 만들어서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는 민간 오페라단일 뿐이다.



윌튼’스 뮤직홀은 ‘런던의 숨겨진 공연장’을 표방하는 건물이었다. 나름 자기 사이트에서 예매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같은 건물 안에 공연장과 바가 함께 있으니 라이브 바의 확대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냥 일반적인 펍 처럼 보인다.





팔스타프라니, 쉽지 않은 작품을 골랐다.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에 국오에서 베르디 200주년으로 올린게 초연이었다. 그런데 풀럼 오페라를 처음 만들면서 선택한 작품이 반지였다고 한다. 이 지휘자 여간 미친놈이 아니다. 최근에는 시몬 보카네그라를 했다고 한다.

학생할인 받아서 18파운드였기에, 뭐 별로면 그냥 졸다 오지라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2013년 국오 팔스타프를 아득히 뛰어넘는 완성도의 공연을 체험했다.






이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항목 별로 나눠서 설명해야겠다.







훌륭한 공연장 사이즈 

뮌헨 파싱어 파브릭에서도 느꼈지만, 공연장 크기가 작으면 모든 게 특별해진다. 가수들의 소리가 한명도 빠짐없이 귀를 쩌렁쩌렁 울린다. 오페라 실연에서 가수의 성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반대로, 공연장이 작아서 가수가 충분히 울릴 수 있는 사이즈가 되면 모든 가수가 월드 클래스의 성량을 뽐내는 셈이 된다. 



앞선 이틀 동안 글라인드본에서 오페라를 본 게 특히 비교하기가 좋았다. 첫날은 앞에서 들어서 나름 괜찮았지만, 둘째날은 좀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글라인드본의 음향이 오페라 하우스 중에서 상당히 괜찮은 편에 속하고,  내가 발코니 끝에 앉은것도 아니고 1.5층에서 들었는데도 그랬다. 심지어 가수들이 다들 월드 클래스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소극장에서 오페라를 들으면 가수들이 진짜 홀을 말 그대로 가득 채운다. 모든 가수들이 한명도 빠짐 없이. 팔스타프 역을 맡은 가수는 그중에서도 성량이 꽤 컸는데, 포르티시모로 한번 내지르면 순간적으로 귀가 아플 정도로 엄청난 소리를 낸다. 


공연이 시작한 순간, 아 내가 이런 소리 들으려고 공연장 다니는 거였는데 도대체 그 동안 뭘 들은거지 싶었다. 예당에서 가수들 그 쥐꼬리만한 소리들을 거면 뭐하러 공연장을 가는거지? 세종 가서 오페라 보면서 ‘그래도 생각보다 들리긴 하네’라고 자위하던 걸 생각하면 너무 슬프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공연장은 다 쓸데 없이 크다. 솔직히 예당을 제대로 울릴 수 있는 가수가 몇명이나 있는가? 세종은 ㅅㅂ 마리아 칼라스가 돌아와도 힘들겠다. 애초에 공연장을 제대로 울리지도 못할 가수로 공연을 올리는 것 자체가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소극장 오페라라고 하는 게 세종M씨어터랑 예당 토월극장인 것도 문제다. 그게 어딜 봐서 소극장이야ㅋㅋㅋㅋ 가수들 실력은 유럽보다 후달리면서 소극장 크기도 유럽보다 크다. 제대로 된 소극장 오페라가 나올 수가 없다.

공연장이 작아서 오케스트라가 못들어가면 그냥 피아노 반주로 하는게 훨씬 낫다. 어차피 앙상블 안맞고 무미건조한 오케스트라 듣느니 그냥 잘하는 피아노 한 명을 듣는게 맘 편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오페라 반주를 제대로 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공연장이 곧 술집이다보니 인터미션때 술을 마시는 게 너무 당연하다. 추측컨데 아마 공연장 측에서는 관객들이 술 사먹어서 생기는 이득도 고려해서 대관료를 낮게 책정하지 않을까. 거기에 1막 1장, 2막 1장 배경이 술집이다보니 술 따라주는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정말 최고의 PPL이다. 가수들 술마시는 장면 볼때마다 인터미션 때 당장 술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을 워낙 못해서 외국 나가도 인터미션 때 절대 술을 안시키는데, 이번에는 너무 땡겼다. 여기서는 심지어 공연장 안에도 술을 반입할 수 있다! 내가 진짜 괜찮냐고 직원한테 두번이나 물어보니까 직원도 당황함ㅋㅋㅋ 맥주 한병을 인터미션 때 다 못마시니까 들고가서 3막 보면서 조금씩 마셨다.


우리나라도 홍대 라이브 바 있는 것 처럼 오페라도 이런 시도가 생겨야한다. 정식 공연장에서 술을 판매하는건 불법이니 술집에서 오페라를 올려야겠지.






2.약빤 연출


글라인드본 이발사를 보고 영국 평론가들이 혹평했다는 이야기를 저번에 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왜 그렇지?


이 팔스타프를 보니까 알겠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현웃 터지는 팔스타프였다.



일단 모든 등장인물이 편한 일상복을 입고 나온다. 첫장면에 나오는 닥터 카이우스는 모자를 비스듬히 쓴 힙찔이로 나온다. 랩하듯이 노래 리듬을 타는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다. 알리체랑 멕 부인은 육중한 몸매가 다 드러나는 추리닝과 몸빼바지를 입고 나온다. 1막 2장은 동네 마실 나온 아줌마들의 모임으로 자연스레 바뀐다. 남자들이 오니까 잡지로 얼굴을 가리는데 또 그게 요가 잡지라는 깨알 같은 디테일까지. 


국오의 이도저도 아닌 의상보다 이게 훨씬 값싸고 사실적이다. 인물 성격도 얼마나 잘 대변해주는가.


여기다가 성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알리체랑 멕이 받은 편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될때 퀴클리 부인의 대사 ‘Un paio in tre!(a couple in three)’를 자막으로 ‘Threesome!’ 이라고 표현하는 센스부터 시작해서 2막 2장에서 난네타와 펜톤의 애정행각을 훨씬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이불로 가린 채 블로우잡으로 시작해서 대놓고 섹스를 암시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3막 2장에서 팔스타프를 골탕먹이기 위해 요정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 역시 압권. 난네타가 노래를 부를 때 다른 여자들이 다 같이 걸그룹 마냥 대형 짜서 춤을 추는데 이게 마치 아줌마들 주책 부리는 것 처럼 표현돼서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음. 여기에 바르돌포와 피스톨라 조합이 상의없이 쫄바지만 입고 발레 점프로 등장할 때 진짜 말 그대로 빵터졌음.



깨알 같은 디테일들도 훌륭하다. 2막 2장에서 팔스타프가 옷을 근사하게 갈아입고 왔을 때, 계속 병풍처럼 있던 술집 바텐더도 ‘저건 뭔 또 추태라냐’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든지, 무대 위에서 주요 인물들이 노래할 때 무대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가수들의 표정 변화라든지, 모든 걸 세심하게 신경썼다.


“작품의 메시지가 어떻고 여기에 어떤 철학이 담겨있으며…” 그런 거 다 ㅈ까라 그래! 라고 외치는 연출이었다. 어떻게 해야 관객들을 웃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캐릭터들이 리얼하게 보일까를 고민한 연출이었다. 거의 모든 순간에 개그 포인트를 열심히 넣었기 때문에 내가 다 일일히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 내가 지금까지 본 오페라 중에 이렇게 낄낄대면서 본건 영상물 포함해도 함부르크 아름다운 엘렌 정도밖에 생각이 안난다.



극적 흐름이 멈추는 앙상블이나 아리아의 처리 역시 아주 꼼꼼했다. 뭐 하나 가만히 두는 법이 없다. 1막 2장에서 여자들이 복수를 외치는 장면에서 단체로 노래하면서 안무를 하는데 이게 또 꿀잼이다. 1막 2장에서 펜톤이랑 난네타가 부르는 노래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이걸 또 둘의 약속된 애정표현으로 처리하는 것 역시 귀여운 부분이었다. 여러모로 연극적인 센스 뿐만 아니라 음악도 잘 이해하고 있는 연출가다.


프로필 보니까 2016 인터네셔널 오페라 어워즈 젊은 연출가 부문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이런 연출가를 이기고 상을 받아가신 파비오 체레사가 국오에서 왜 그렇게 삽을 푼건지 참 궁금할 따름이다.





3. 정신나간 연기력


소극장 오페라가 성공하려면 연극 배우 뺨치는 연기가 필수다. 가까이 있으면 그만큼 표정이 잘 보일 수 밖에 없다. 관객들이 오페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음악에 대해 잘 몰라도 연극적인 요소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캐치해낸다. 



풀럼 오페라의 캐스팅은 어느 한명 빠지지 않고 연극 배우 뺨치는 연기력을 보여줬다. 특히 압권은 바르돌포랑 피스톨라였는데, 두명이 막간에 시간 때우기 용으로 마임을 해도 프로 코미디언처럼 보일 정도다. 특히 바르돌포의 나사 빠진 듯한 연기는 표정만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 둘이 덤앤더머로 연극 하나 만들어도 되겠더라.


사진에서도 눈빛과 표정이 살아있다. 


두 명은 인터미션 시간에도 무대에 나와서 팝콘 먹다가 앞에 관객들도 먹여주고 지휘자 한테 팝콘 던지고 뿌리면서 깔깔 웃는다. 진지하게 쟤네들 내추럴본 또라이가 아닐지 의심했음. 처음 시작할 때도 객석 뒷편에 앉아있다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완전 속았다. 난 무슨 관객이 공연 시작 전에 헤드폰 쓰고 음악듣고 있나 했지...


팔스타프의 항상 살아있는 표정, 펜톤과 난네타의 찐한 눈빛 교환, 포드의 망연자실한 표정 등 무대 위에 있는 모든 연기가 진짜였다. 지휘자가 무대 대각선 방향에 위치해있고 아마 모니터도 하나 없는 것 같은데 다들 지휘자를 쳐다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노래한다. 그만큼 리허설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겠지. 

당연한거지만 연기를 잘한다는 건 노래를 오페라답게 맛깔나게 부를 줄 안다는 거다. 가수들의 노래 퀄리티가 다들 수준급이다. 마지막 푸가의 앙상블은 정말 치밀하면서도 폭발적이었다. 이번에 무티 아카데미에서 우리나라 성악가들이 아리아 몇개만 주구장창 파서 발음도 못하고 오페라다운 표현도 못한다는 게 다 뽀록났다던데 참 큰일이다. 


종합하자면, 정말 모든 면으로 만족스러웠다. 연출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고, 무엇보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짜 가수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돈을 더 냈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았을 거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이 대부분 기승전 국오는까야제맛인데, 이번엔 국오도 국오지만 민간 오페라단도 까고 싶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왜 민간 오페라단은 실력도 안되는 가수들로 맨날 예술의전당 무대만 세우려고 하는걸까? 


이번에 런던에 있는 일주일동안 민간오페라단 공연이 세개가 있었는데 세개 다 교회나 술집, 민간 소극장에서 하는 거였다. 런던에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ENO 같은 1부리그도 있지만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민간 오페라단도 많다는 걸 알게됐다.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도 도대체 왜 풀사이즈 오페라 하우스에서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예당 사이즈의 공연을 만들어낼 역량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예당을 울릴 수 있는 가수를 캐스팅할 수 있나? 예당 사이즈에 맞는 오케스트라를 객원으로 안채우고 제대로 된 앙상블을 구할 수 있나?


이렇게 쩌는 퀄리티의 풀럼 오페라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다면 잘 될까? 당연히 망한다. 일단 본인들부터가 거부할 거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공연의 성질이 명확하고, 그걸 위해서 어느 정도 규모가 적당한지, 어떤 분위기의 공연장이 적당한지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자기한테 맞는 사이즈란 게 있는 법인데 우리나라에는 무조건 예당 오페라하우스에 공연한번 더 올려보려는 민간 오페라단밖에 안보인다. 애초에 예당 오페라하우스를 채울 전속 오페라단이 없다는 것 자체부터가 문제지만, 예당을 대관할 수 있다고 거길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게 과연 옳은 건가. 국오가 못하는 걸 대신하려는 시도는 없고 대신 국립오페라단 단장에 감놔라 배놔라 시위하고 검찰에 고발한다고 하질 않나. 


물론 소극장 오페라를 자주 하는 단체도 있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공연장을 잡거나, 공연의 색을 확립한 민간 오페라단이 얼마나 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이런 공연을 하는 공연장도 없고 저런 리얼한 연출을 할 수 있는 연출가도 없고, 리얼한 연기를 펼칠 성악가도 없다. 


영국 공연단체는 모두 관객의 지갑을 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는데 어차피 자기들 돈은 정부에서 나온다고 대충하고 있는 국오나, 미스테리하지만 어찌저찌 받은 정부지원과 기업후원으로 연명하는 민간 오페라단이나.


내가 우리나라에서 보고 싶어하는 건 로열 오페라 하우스나 글라인드본 클라스의 공연이 아니라 딱 풀럼 오페라 수준일 뿐인데, 이것도 욕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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