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보 예르비 인생반. 


처음으로 쓰는 비오페라 리뷰. 봤으니까 쓰긴 써야지. 학교에서 진행하는 감상회를 오페라로만 채우기 뭐해서 예르비 슈만 교향곡 영상을 꺼내봤다. 사실 아주 오래전 부터 점찍어 둔 음반인데 사는 걸 미루게 됐고, 정작 사고나선 오페라 보느라 바빠서 안 보고 있었다.


이 블로그에 몇년 전에 쓴 공연 후기에도 나와있 듯이 나는 파보 예르비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그의 내한 공연도 대부분 안 빠뜨리고 열심히 찾아갔다. 이틀을 공연하면 이틀을 다 찾아갔다. 브람스로 내한했을 때만 내가 베를린에 가느라 못 봤던 것 같다.


예르비가 다루는 레퍼토리의 폭은 자기가 맡은 오케스트라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 예전 공연 후기에서 그의 브루크너와 말러를 좋게 평가했지만, 지금 들어도 비슷한 생각일지는 모르겠다. 뭐 독일 오케스트라가 브루크너 8번이랑 말러 5번 들고왔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넙죽 절하고 들었어야 하지 않겠나.

처음으로 반하게 된 음반은 바로 베토벤 교향곡 3번이었다. 정교한 앙상블과 날카로운 어택,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질주, 짧은 프레이징으로 만들어지는 변화무쌍한 생동감. 다른 역사주의 혹은 절충주의 음반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완성도로 지금까지도 내 결정반으로 꼽는 연주다. 내가 음반을 정말 안 사는 편인데, 예르비 베토벤 교향곡 음반은 3장이나 샀다. 음악을 거의 어둠의 경로로와 낙뮤라로만 들으면서 정말 듣고 싶은 음반이 있을 때만 질렀는데 그게 예르비의 베교 음반이었다. 영상이 나왔을때도 바로 질렀다. 나도 꽤나 열심히 팬질을 했구나.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오페라로 노선을 바꾸면서 머리 속에서 예르비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예르비의 지휘는 거장적인 것과 대척점을 이룬다. 그의 음악은 지휘만큼이나 간결하며 분절적이다. 악보에 있는 레가토의 길이를 유려하게 더 잡아늘리지 않는다. 감정과잉과도 거리가 멀다. 그의 음악을 영적이다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을 테다. 그의 음악에선 세밀하게 가공된 아티큘레이션, 그런 날카로운 아티큘레이션을 통해 생겨난 공간 덕에 드러나는 다채로운 성부의 결합이 빛난다. 그의 음악은 계산적이다. 그가 각각의 프레이즈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 어떻게 나누고 싶은지, 어디를 강조하고 싶은지가 분명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예르비가 상임을 맡은 악단 중에서 그와 궁합이 가장 잘 맞는 곳은 도이체 캄머필하모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상임으로 함께한 악단 중 가장 오래 기간 감독을 맡았고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사실 역시 이를 반증한다. 이 둘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다른 악단에 비할 수 없다. 다른 지휘자와 비교했을 때 예르비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악단이 도이체 캄머필하모니이며 도이체 캄머필하모니가 가지고 있는 정교한 앙상블을 가장 잘 살려낼 수 있는 지휘자가 예르비다.


이들이 만들어 낸 슈만은 칼같이 정교하다. 모든 악기들의 짧고 분명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빛나는 1번 1악장의 리듬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가. 슈만의 교향곡의 최대 단점으로 꼽히는 것이 단조로운 관현악 색채이지만 예르비는 각각의 성부를 정교하게 밸런스를 조절해 이 교향곡들이 가지고 있는 색깔을 끄집어낸다. 곳곳에서 생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성부들을 들으며 그 동안 슈만 교향곡을 들으며 놓치고있던 음표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된다. 3번 2악장 첫 부분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이 넣어주는 추임새가 이렇게 신나는 음표였구나. 슈만 오케스트레이션의 특징이자 단점으로 자주 꼽히는 과도한 세미 트레몰로 사용도 도이체 캄머필하모니의 연주에서는 찰진 질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곳곳에서 등장하는 강박적인 액센트 역시 허투루 연주하지 않는다. 

예르비의 슈만은 그런 점에서 낭만적이라기보다는 고전적에 가깝다. 도이체 캄머필하모니의 연주가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를 발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광기와 파괴로 이어지진 않는다. 폭포수 같은 감정의 흐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는 낭만성이 있다면 깔끔하고 분명하게 계산된 템포 변화라 할 수 있다. 작품에서 대조를 이루는 프레이즈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호흡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4번 교향곡이 초판본인 1841년이 아닌 1851년 판본이라는 건 좀 아쉬운 점이다. 1851년 판본을 가지고도 매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휘자이지만 예르비가 원하는 투명하고 생동감있는 관현악은 오히려 1841년 판본에서 더 빛나기 때문이다. 예르비가 생각보다 판본에 있어서 조금 보수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예컨데 베토벤에서 베렌라이터 판본을 사용하면서도 2악장의 끝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끝냈다든가 하는 부분도 있고 말이다.


이들의 브람스를 직접 듣지 못 했지만, 이들의 접근 방식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작품이 슈만 교향곡임은 분명해 보인다. 잘 계산된 퍼즐 맞추기를 슈만 교향곡 이후에 적용하기엔 낭만적 광기가 부족할 테다. 내 취향엔 맞겠지만 기존의 낭만적인 브람스 연주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힘들 것이다. 반대로 이들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레퍼토리에만 머무른다면 이 탁월한 성부 균형과 날카로운 아티큘레이션이 빛날 공간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교향곡 전곡 연주 영상 이외에 100분 정도의 다큐멘터리가 수록돼있다. 교향곡 네 곡을 예르비와 단원들이 설명하는 내용이다. 리허설 장면도 종종 들어있지만, 이런 종류의 영상에 종종 들어있기 마련인 지휘자와 단원들간의 뻔한 칭찬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단원들의 설명이 곡의 중요한 파트를 담고 있고 슈만 교향곡에 대한 예르비의 전반적인 언급 역시 특별히 아주 새로운 내용이 있다기 보다는 뻔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을 잘 다루고 있다. 설명과 연주가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어 따라가기 쉬우며 단원들의 솔로 연주를 오케스트라 연주 영상과 잇는 것 역시 깔끔하게 처리되어 멋진 효과를 낸다. 다만 1번과 2번에 비해 3번 4번의 설명 분량이 짧다는 인상을 받는다. 3, 4번에서는 설명을 건너 뛰는 악장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 


이 외에 메이킹 필름이 있는데 이건 뭐 예르비 짱짱 도이체 캄머필하모니 짱짱 이런 내용이 많다. 흥미로운 부분은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단원들의 불편함 사이의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 부분. 

8분짜리 브레멘 홍보영상도 담겨있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겐 도이체 캄머필하모니와 뛰어난 대학과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첨단 연구실적, 베르더 브레멘의 열정,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에서 찍어내는 차들이 있다. 다시는 브레멘을 무시하지 마라"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