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연출의 한계는 이런 것일까?



작품이 사골일 수록 연출을 새롭게 만들기 어려운 법이다. 영국 연출은 급진적인 해석보다는 연극적 디테일에 치중하거나 제한된 변화 안에서 시각적으로 환상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편이다. 때문에 처음보는 작품이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볼거리가 충분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이 사골 작품에 적용된다면 어떨까.


무대는 세련됐다. 의상도 화려하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없다.

오페라 연출이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로 넘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콘비츠니의 트라비아타를 본 뒤로 다른 트라비아타의 연출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자 여기서 다시 복습해봅시다. Da가 꼽는 21세기 마스터피스 프로덕션 세 가지: 헤어하임 보엠, 콘비츠니 트라비아타, 카슨 탄호이저. 위대한 연출은 관객이 그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을 영원히 뒤바꿔놓기 마련이다. 매트릭스에서 빨간약 먹으면 다시 못 돌아가는 것 처럼.

그런 점에서 오히려 트라비아타 연출에 별로 기대하는 건 없다. 어차피 콘비츠니를 뛰어넘는 인생 연출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극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만 하면 됐지. 하지만 글라인드본의 톰 케언즈Tom Cairns 연출은 그 정도 기대에도 못 미쳤다.


일단 영국 연출에서 응당 기대하기 마련인 디테일한 연기지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조르조 제르몽이 2막 듀엣에서 이것저것 취하는 몸 제스처가 너무 어색하고 작위적이었다. 나 연기하고 있어! 라고 외치는 듯한 연출. 그 외에는 별다른 연출 포인트가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딱 하나 인상적인 건 조르조가 감동해서 "내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지폐다발을 꺼내준다는 연출이었다. "이거 받고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요"는 아침드라마 한번 안본 나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클리셰인데, 트라비아타 역시 이런 이야기로 종종 오해받곤 한다. 하지만 비올레타를 움직이는 동기는 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중이다. 비올레타가 돈을 뿌리치는 건 당연한 거긴 한데 조르조가 거기서 돈을 준다는 게 좀 이상하다. 비올레타가 마음을 돌린 건 자신을 창녀라고 욕하던 조르조가 자신을 집안의 수호천사로 모시겠다고 간절히 청원하는 그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조르조가 돈을 꺼내는건 진짜 심각한 넌씨눈 행동인데 그 장면에 화가 나서 울컥했다. 음 보면서 울컥했으니 연출 성공인가.

뭐 비올레타가 죽어가는 장면을 계속 보여주며 모티프 처럼 사용했다고 하는데 글쎄. 이 이야기에서 비올레타의 핵심 성질은 죽어간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무시를 받는 창녀라는 점이다. 폐병은 막말로 그냥 결말을 배드 엔딩으로 만들어 눈물 한 방울이라도 더 뽑아내려는 장치이지 이야기 진행의 핵심이 아니다. 

3막 편지 읽는 장면을 왜 굳이 TV프로그램 싸구려 재현 방송처럼 조르조의 목소리로 읽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저걸 비올레타가 읽었을 때 얼마나 마음 찢어지는데... 이 사람 이거 맴찢 포인트를 모르네.


마크 엘더는 영국의 유능한 오페라 반주꾼이다. 꽤나 묵직하며 두터운 반주를 들려준다. 서정미도 잘 살려내고 자신의 흐름과 스타일이 어느 정도 확실한 지휘자인데 약간 변태 같은 부분이 있었다. 예컨데 비올레타와 조르조의 2막 듀엣 중 Non sapete 파트에서 비올레타가 Ah, il supplizio è si spietato이라고 같은 음을 노래하며 저음이 움직이는 부분은 아주 특별한 장면인데 여기에서 저음이 움직이는 걸 매우 명확하고 조금 느끼하게 표현해냈다.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완성도 높은 반주라는 점은 인정한다.


가수는 좀 애매하다. 글라인드본 답게 슈퍼스타가 되기 전 단계의 가수들을 썼는데, 이 역시 공연의 패착이라 할 수 있다. 비올레타의 비중을 생각하면 여타 다른 쟁쟁한 공연에 비하면 무조건 밀릴 수밖에 없다. 이건 젊음의 패기나 싱그러움으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레치타티보 하나 하나의 가사를 곱씹으며 그에 맞는 감정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비올레타는 오페라 전반을 통해 관객을 울게 만들어야 하고 그건 그냥 셈프레 리베라의 고음을 열심히 부르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네트렙코, 페테르센, 담라우 모두 그런 능력을 갖춘 가수였다. 오케스트라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오로지 가수의 몫만 있을 뿐이다.

베네라 기마디예바Venera Gimadieva는 1984년 생으로 공연 당시 30세이니 상당히 어린 소프라노이며 그 나이를 생각했을 때 상당히 안정적인 노래를 들준다. 하지만 30세의 비올레타에게 극을 지배하는 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음표를 제대로 소화해내기도 벅차보인다. 셈프레 리베라 끝에서는 기어이 음을 높이는데 자신의 발성에 맞지 않게 쥐어 짜낸 음이라 답답하고 메말라 안 부르니만 못한 음표가 됐다.

마이클 파비아노Michael Fabiano는 요즘 떠오르는 가수지만 매력을 잘 모르겠다. 가끔 요상한 프레이징을 선보이기도 하고 브린디시의 트릴 파트부터 템포가 흔들린다. 

여담인데 유튭 댓글에 파비아노가 맷 스미스랑 쿠엔틴 타란티노를 닮았다는 말이 있다. 나의 맷닥은 이렇지 않다능...!! 뭔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페이스인데, 난 조셉 고든 래빗을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조재혁이랑도 좀 닮은 것 같고. 그래도 헤어스타일이 영 아니다. 


조르조 역의 타시스 크리스토얀니스Tassis Christoyannis 역시 별 감흥없는 무난한 가수였다. 어딘지 어색한 연기는 덤.


결국 라 트라비아타는 연습 기간이 길다고만 해서 완성할 수 있는 오페라가 아닌가 보다. 분발하세요 글라인드본.



뭔가 아쉬운 공연이나 부가영상과 달리 부클릿의 내용은 생각보다 알차다. 역씌 영국이다. 글빨 하나는 어디 뒤지지 않는다.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주는데 트라비아타가 베르디의 오페라 중 유일하게 야외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오페라라고 한다. 가정생활Domesticity야 말로 비올레타가 꿈꾸던 삶이며 동시에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 포인트. 



사소한 것 하나. 2막 조르조와 비올레타의 듀엣에서 조르조가 "Bella, voi siete e giovane... col tempo..."라고 하는 장면에서 한글자막이다.

젊고 아름답다는 건 오독의 여지가 없고, 문제는 "col tempo"다. 시간이 흐르면, 때가 되면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하자마자 비올레타는 Ah, più non dite 아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마세요. V'intendo... m'è impossibile lui solo amar vogl'io.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요. 나한테 불가능해요. 난 오직 그만을 사랑하길 원해요.


그리고 이어서 조르조가 "결국 너의 아름다움이 시들면 알프레도의 사랑도 변할 것이다"라는 노래를 시작한다. 문제는 여기다. 나는 당연히 조르조가 "col tempo..."라고 하는 부분의 의미는 "ma col tempo..." 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너가 지금은 어리고 아름답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이는 조르조가 뒤에 말하는 내용과 일치하니 이 쪽이 조르조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저 자막처럼 "quindi col tempo..."라고 이해하면 그 뒤에 나오는 비올레타의 대사가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너 젊으니까 다른 남자 만날 수 있어" - "난 알프레도만 사랑하는데요" 라는 흐름이니까. "나는 알프레도만 사랑하고 싶다"라는 말을 한다는 건 비올레타가 col tempo를 다른 남자를 만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는 근거가 될 테다. 여기에 ma와 quindi 중 무엇이 더 생략하기 쉽냐고 묻는다면 quindi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어 자막은 but in time, 독어 자막은 doch bald, 프랑스어 자막은 avec le temps, 일본어 자막은 時が経てば로 모두 'ma col tempo' 아니면 직역했는데 신기하게 한국어만 '그러니 조만간 다시'라고 번역해놨다. 

그럼 여기서 남은 한 가지 재미있는 가능성은 조르조가 저 col tempo에서 의도한 내용을 비올레타가 오해했다는 것이다. 베르디와 피아베가 라 트라비아타를 쓰면서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고려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원작 춘희를 다시 찾아봤는데 조르조와 비올레타의 만남이 담긴 챕터 25를 뒤져봐도 young and beautiful 과 관련해 저런 이야기는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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