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로이드의 보리스 고두노프.



아마도 영상물 중에 유일하게 1872년 판본을 채택한 공연이다. 여기에 무소륵스키가 개정하면서 짤랐던 바실리 성당 장면도 다시 추가했다. 덕분에 공연시간도 3시간이 훌쩍 넘는다. 동시에 유일하게 보리스의 죽음이 아니라 크로미 숲으로 끝나는 공연이기도 하다. 막의 순서야 당연히 중요한 거지만 보리스의 죽음 이후 오페라가 이어진다는 게 참 특이하게 다가오긴 했다. 타이틀롤의 비중이 다른 오페라에 비해 작다고 하더라도 갈등의 중심에 서있는 보리스가 죽으면 극적인 긴장이 풀리게 된다. 때문에 이 뒤에 이어지는 크로미 숲은 일종의 에필로그 처럼 느껴진다. 노세다와 콘찰롭스키의 토리노 공연에서 크로미 숲 장면을 보리스 죽음 장면보다 먼저 넣은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되더라.
반면 이렇게 크로미 숲으로 끝날 경우 오페라의 주인공은 보리스가 아니라 러시아의 민중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보리스의 죽음으로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 차르가 죽었음에도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미트리를 참칭한 그리고리가 마지막에 등장해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 무소륵스키가 선택한 마지막 인물은 유로디비(聖바보)다. 드미트리가 구원자처럼 나타났지만 실상 민중의 고된 삶은 끝나지 않는다.

1869년 판본, 혹은 림코의 1908년 판본에서는 들을 수 없는 노래가 상당히 많다. 대부분이 주로 여성 가수들의 노래인데, 이는 무소륵스키가 1869년에 마린스키 검열에서 퇴짜맞은 이유가 여자 가수의 파트가 너무 적다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림코 판본에도 이때 추가된 대부분의 노래가 포함되어있긴 한데 극 중 가장 아리아다운 아리아인 마리나의 노래가 림코 판본에는 빠져있다. 즉 이 노래를 영상에서 들은 건 나도 처음이다.

이 작품에 귀를 사로잡는 아리아라고는 이 노래와 여관 장면 바를람의 노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극 중에서 딱히 중요한 역할을 맡진 않는다. 그러니까 림코가 짤랐겠지.

마리나와 함께 러시아를 먹을 생각을 하는 예수회 란고니가 나오는 것도 이 영상물이 처음인데 굳이 넣었을 이유가 있나 싶었다. 여러모로 폴란드 막은 계륵이다. 



30대 후반의 게르기예프

게르기예프의 음반과는 다른 연주다. 게르기예프는 1997년에 1869년과 1872년 판본을 다른 캐스팅으로 녹음했다. 이 영상은 1990년에 녹화된 것으로 음반에 비해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의 연주 및 녹음 상태가 상당히 구린 편이다. 음반에서 듣던 게르기예프의 호쾌한 연주를 기대했다면 좀 실망하게 된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서 목관악기가 선율을 주도할 때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연 장소나 연도를 볼 때 볼쇼이 극장의 공연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게르기예프가 러시아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갖는 입지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뛰어날 것 같지만 게르기예프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는 느낌이다. 일단 1990년은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를 맡은지 3년 째 되는 해로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녹화한 1995년 보다도 5년이나 더 이른 시점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앙상블이 종종 충분히 정교하지 못한 장면들이 있다.


대체로 빠른 템포로 달려가는데 바실리 성당 장면에서 사람들이 보리스 앞에서 빵을 달라고 소리지르는 합창에서는 압도적인 폭발을 보여준다. 


가수 중엔 로버트 로이드Robert Lloyd가 빛는다. 요즘에도 종종 심심찮게 오페라 무대에 서는 로이드는 영국이 낳은 가장 훌륭한 베이스가 아닐까 싶다. 베이스 중에 기사 작위를 받은 윌라드 화이트가 있긴 하지만 로이드가 베르디, 푸치니, 모차르트, 바그너, 베를리오즈 등 오페라 핵심 레퍼토리를 이렇게 폭넓게 소화해냈다는 점은 특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

마린스키에서 보리스 고두노프를 외국인이 노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심지어 소련이 완전히 붕괴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 프로덕션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제작했고 아마 로버트 로이드가 그 프로덕션에 출연했을 것 같긴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러시아 오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레퍼토리를 외국인에게 맡긴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본 러시아 관객들도 이 캐스팅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로이드는 셰익스피어 적인 보리스를 표현해낸다. 궁전 장면에서 표도르 앞에서 노래하는 대목이나 슈이스키와 기싸움을 하는 대목에서든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연기한다. 표정 하나하나와 목소리의 톤에 신경쓰는 건 물론이고, 화를 내며 단어를 쏟아내면서도 프레이징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마르케 왕을 부를 때 독일어 딕션이 뛰어나서 인상적이었는데 러시아어 딕션도 꽤 훌륭하다.

슈이스키가 들어오니 일단 욕 한바가지 해준다. 

그리고 썩소와 함께 슈이스키의 목을 사뿐히 감싸준다.

슈이스키가 드미트리 이야기를 꺼내니까 표도르보고 나가라는 장면. 이 때 소리지르는 게 압권이다. 

러시아 못잃어 차르 못잃어ㅠㅠ 

으아아아아앙ㅠㅠ 처럼 찍혔지만 사실 슈이스키한테 Why so serious?라고 묻기 전에 캬하하핳ㅎ 하는 장면

나 좀 살려줘여 굽신굽신

!!



안타깝게 로이드 빼고 다른 가수들이 특별히 뛰어난 편은 아니다. 슈이스키의 노래는 좀 게으른 편인데 간교한 성격과 좀 잘 어울리긴 하지만 보리스를 가지고 놀 만큼 똑똑한 느낌을 못준다. 참칭자 그리고리 역시 볼쇼이의 폭발적인 피압코의 노래에 비할 바가 못된다.



연출은 1990년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꽤나 진보적이다. 피멘 장면에서 드미트리 살해를 회상시으로 계속 보여준다든가, 거대한 시계추가 무대 뒤에서 왔다갔다 한다든가, 나름 새로운 걸 많이 시도해냈다.  

=

보리스 - 유로디비(聖바보) - 드미트리의 삼각구도. 오페라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결국 남는 건 로버트 로이드의 노래와 연기. 위에서 짤방으로 정리한 걸 아래 영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