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보리스 고두노프 첫 공연 후기.

루살카와 닮은 꼴, 하지만 나름의 성공.


걱정했던 것과 기대했던 것을 정리했었다. 결국 걱정대로 되어버린 장면도 있었지만 걱정을 깬 장면도 많았고 반대로 기대했던 것이 충족되지 않기도 했다.


길어질 만한 이야기는 뒤로 놨두고, 짧게 할 수 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이 공연의 일등공신은 당연히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코차놉스키였다. 코차놉스키의 지휘는 간결하며 정확했다. 수많은 큐와 프레이징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표현됐다. 적재적소에 강조하는 포인트들은 확신이 넘쳤고 지휘만 보더라도 다음에 그가 뭘 강조하고싶은지 정말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보리스와 슈이스키의 대화 장면에서 노래 사이를 채워주는 부분들도 확실하게 포인트를 줬다. 적절한 템포 변화로 짜릿한 느낌을 주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합창과 나올 때 합창의 아쉬움을 오케스트라가 다 채워줬다. 

그 동안 국오의 명연들이 ‘코심치고 잘하네’였다면 이번에는 종종 오케스트라가 한국 오케라는 걸 잊게할 정도로 훌륭한 사운드를 뽑아냈다. 특히 현악기의 사운드가 이렇게 풍성하게 뿜어져 나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프롤로그 1장이나 2장이나 계속 나오는 현악기의 음형이 찬란하게 빛날 정도였다.


가수


카자코프는 역시 본토 사람의 클라스를 보여줬다. 프롤로그 대관식 장면 아리아, 크렘리 장면 독백, 죽음 장면 독백 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부분이 없었다. 하차한 아나스타소프에 비하면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운 편인데, 대관식 아리아에서 마지막 음에 포르테를 넘어서는 포르티시모를 선보인 건 정말 짜릿했다. 비범과 평범의 차이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은 성악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한계 너머로 보내는 모험이었다. 크렘린 장면에서 표도르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그렇게 무섭게 떨리던 목소리가 가족을 노래하는 순간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다 드미트리 이야기에 넋이 나가서는 거의 팔세토로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볼쇼이 극장 가수라고 해서 기대했던 성량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편이었다. 오케에 묻히는 경우도 자주 나왔던 점은 많이 아쉽다.


그리고리 역의 신상근의 경우 목소리가 과연 잘 어울릴지 걱정했었다. 칼스루에에서 그리고리를 불렀을 때는 1869년 판본이었으니 어느 정도 부드러운 목소리로도 큰 상관이 없었겠지만 폴란드 막이 들어간 이상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걱정했던 대로 알프레도나 로돌포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스핀토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무슨 피압코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고음에서 힘이 충분히 실리는데다 자연스러운 프레이징도 뛰어났다. 원래 연출 의도도 그랬는지, 아니면 목소리 스타일에 맞춘 건지 전반적으로 드미트리가 야망으로 가득찬 야심가라기 보다는 꽤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표현됐다.


피멘과 슈이스키의 캐스팅을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다. 피멘은 일단 상당히 큰 성량과 거친 음색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시종일관 너무 크게 불러서 노래가 단조로운 것도 있었고 늙은 수사라고 하기엔 너무 기운 넘치는 노래긴 했다. 이게 부드러운 그리고리랑 조합되니 늙고 힘없는 수사와 패기넘치는 젊은이가 아니라 세상 물정 모르고 화초 처럼 큰 그리고리와 그런 청년을 휘어잡는 호랑이 훈장 선생님 같아 보였다.

슈이스키 역의 서필은 대전에서 오페라 한다면 가장 믿을만한 테너인데, 항상 주연급 역할만 맡다가 이런 간사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내가 알던 그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더라. 성량도 시원시원하고 깐족거리는 연기도 괜찮았다.


바를람 역의 김대영은 기대했던 대로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카잔 노래도 힘이 넘쳤고 수배문을 읽을 때 목소리 연기도 아주 탁월했다. 그 때 내던 목소리 크기가 장난 아니던데 노래할 때 좀 아꼈나 보더라. 근데 보통 다른 바를람보다는 목소리가 거칠지 않고 둥글둥글한 편이라 피멘 역 가수와 역할을 바꾸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미사일은 언급하고 지나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늘 공연 크로미 숲 장면에서 제대로 씬 스틸러가 됐다. 민경환의 노래는 작년에 카시오나 스폴레타로 들었었는데 조연 치고 되게 목소리가 튄다는 생각을 했다. 목소리가 날카롭고 얇다고 해야할까. 약간 울림이 좀 적은 느낌인데 이 느낌이 미사일에서는 딱이었다. 합창단 사이에서도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데다가 민중의 거친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듯 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패기넘치게 앞으로 걸어나와 한바퀴 턴해주며 망토 휘날리는 모습이 꽤나 멋있었다. 

마리나 역의 알리사 콜로소바는 기대에 비해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러시아 메조에게 기대하는 끈적한 목소리가 없어서 평범한 느낌이었다. 

란고니 역은 원래 내가 관심이 없어서 별 생각이 안 남는다. 원작에 안 나오는 근본없는 인물 따위 

크세니아 표도르 유모는 한세트로 묶여 커튼콜도 같이 받더라. 어제 글 쓰면서 1872년 추가된 아리아를 그대로 넣으면 과연 저 가수들이 어떻게 소화할까 했는데, 정말 다행히도 빠졌다.

여관 주인의 추가 아리아는 보존됐는데, 무언가 쫓기는 느낌은 들었지만 노래 자체는 좋았다. 뒤에 그리고리와의 대화도 무난했다.

셸칼로프(슈첼칼로프라고 적혀있다)의 노래를 내가 좋아하는 편인데 탁월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잘해줬다. 4막 보야르 장면이 원래 셰칼로프로 시작하는데 림코 판본에는 짤려서 결국 프롤로그만 나왔다. 

유로디비 역은 엄청 중요한데 왜 캐스팅이 안나오나 했다. B팀 슈이스키가 불렀는데 목소리가 답답해서 이 역할과 전혀 안 어울린다. 


오페라의 처음을 시작하는 니키티쉬 역시 역할을 소화해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가수였다.

합창단은 파트를 쪼개서 노래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작품을 이 정도 했으면 잘한 거다. 큰 기대를 안했기 때문에 나름 만족했다.

전체적으로 반주와 가수가 조금씩 엇나가는 순간들이 상당히 자주 있었다. 그렇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고, 템포나 박자가 자주 변하고 오케와 가수가 똑같이 가는 부분이 많아 유독 튀었던 것 같다.

가수들의 러시아어 딕션이 다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종종 어색하게 들리거나 딱딱하게 들리는 부분도 있고 어려운 발음들도 있었지만 문제가 되는 건 전혀 없었다. 마지막에 커튼콜 때 딕션코치도 나와서 박수를 받았는데 국오에서 자막을 준비 안한 것 같더라. 루살카와 달리 지휘자도 러시아인이라 훨씬 더 신경쓴게 아닐까 싶다. 


판본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여러 판본을 보면서 느낀 건데 결국 초판본이 가장 이상적이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노세다 처럼 크로미 숲 장면 정도만 적당해보인다. 폴란드 막은 전체 음악의 균형을 깨뜨리고 극적인 흐름도 방해한다. 넣어야 한다면 2장의 마리나-참칭자 듀엣 정도만 적당하지 란고니까지 들어가는 건 끔찍하다. 
무소륵스키의 원래 관현악이 림스키코르사코프 편곡에 비해 훨씬 간결하며 개성적이다. 림코 1908년 악보를 보면서 무소륵스키 원본을 들어보니 안 고친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더라. 무소륵스키가 오보에를 매우 제한적으로 특별한 효과에만 쓴 것과 달리 림코는 여기저기 넣어놨고 대체로 무소륵스키의 관현악에 비해 성부간 더블링이 많아져서 음향이 두터워졌다. 이게 정말 구렸던 게 보리스 죽음 장면에서 비올라만 나오면 될걸 클라가 같이 나와서 오히려 앙상블이 무너져 뭉게지더라. 관현악법만 고친 게 아니라 아예 레치타티보와 반주가 주고받는 호흡의 길이를 바꿔버리는 것도 있고, 가수가 먼저 나와야할 때 오케가 먼저 나오게 바꾼다든가, 온갖가지 방법으로 바꿔놨더라. 
림코 판본에서 가장 싫어하는 장면은 대관식 장면이다. 무소륵스키의 원본에서 등장하는 날카로운 트럼펫이 빠지고 호른으로 연주하면서 일단 노잼이 되고 뒤에 목관의 리듬이 4마디 단위로 점점 가속되는 듯한 느낌도 완전히 희석시켜버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림코판본을 사용하면서 프롤로그 1장을 순례자의 합창에서 끊었다. 2장은 림코가 쓴대로 합창이 길어졌고, 2막 크렘린 장면의 추가 아리아는 다 짜르고 가장 짧은 판본으로 갔다. 3막 폴란드 막은 림코 판본 그대로 전체가 다 들어갔고 4막은 크로미 숲 - 죽음 장면으로 구성됐는데 죽음 장면에서 셸칼로프 파트가 아예 짤리고 나머지 슈이스키 피멘 보리스의 노래도 림코 판본대로 몇마디씩 짤렸다. 


난 폴란드 막을 전체 다 넣은 거 보고 기겁했는데, 진짜 끔찍했다. 들은 말로는 포다가 이번 공연이 거의 한국 초연이다시피 하니 관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폴란드 막을 넣었다는데, 나는 폴란드 막 언제 끝나나만 기다렸다. 폴란드 막 대신 바실리 성당 장면이나 넣을 것이지... 


자 이제 포다를 이야기해봅시다.


나름 포다의 연출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도 해봤다. 포다에게 대단한 연기 지도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라는 건 파스타 요리사에게 커리부어스트 주문하는 거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나 포다스러운 디자인이 많았다. 사각형 공간을 만드는 삼면의 벽. 거기에 키릴문자로 조각된 것 까지 포다의 파우스트를 연상케 했다. 참고로 벽에 써진 러시아어는  на кого ты нас покидаешь отец наш (누구를 위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우리의 아버지여. 합창 첫구절) 였다. 아마 저 세 문구를 여러 사이즈로 반복해논 거였다. 

일단 객관적인 묘사로 시작해보자.


프롤로그 1장의 합창의 동선에는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모여서 울부짖기도 하고.

2장 대관식 장면 에는 천장에서 거대한 종 14개가 내려왔다.  무대 뒤쪽 벽이 열리고 회전바닥에 합창단이 들어왔다. 합창단은 백성보다는 보야르들이 더 많이보였다. 다들 십자가 모양의 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 회전무대가 다 돌면 그 중앙에 보리스가 서있다. 아리아를 부른 다음 사람들이 보리스를 들어올리며 동시에 무대 뒤쪽 벽이 다시 올라간다.

1막 피멘 장면은 프롤로그와 바로 이어진다. 종이 올라가고 대형 진자형 향로가 등장한다. 그리고리가 향로를 밧줄로 잡아 당겨 진자운동을 시킨다.

1막 2장 여관 장면은 무대 바닥 아래에서 진행된다. 타이스 리뷰에 캡처한 장면과 같은 구조다. 여관 주인 말고 무용수들도 여럿 있다. 여관 주인은 굽이 높은 부츠에 타이트한 바지를 입고있어 마치 칼날 여왕 캐리건이라도 되는것 같다. 지하 레지스탕스 느낌이 나게 만들었다. 바를람 카잔 노래 때 무용수들이 개판을 치며 춤춘다. 

경찰들은 셰퍼드와 도베르만을 데리고 등장한다. 바를람이 수배문을 읽으면서 그리고리의 정체가 발각되려는 순간부터 무대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 지하 여관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추격장면은 지상에서 보여준다.

2막. 뭐 없다. 그냥 가운데서 노래하고 중간중간 조명 좀 바뀌고 마지막에 아이의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회전바닥에 아이가 조용히 서서 한바퀴 돌면서 보리스를 지켜본다.

3막 폴란드. 갑자기 새 하얀 삼면벽으로 무대가 바뀐다. 벽에는 키릴문자 대신 라틴어가 알파벳으로 적혀있다. 뭐 Gloria 같은 거 적혀있었던 것 같다. 옷도 다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데 등에는 피가 묻어있다. 새하얀 벽면의 단면은 노출 콘크리트로 돼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란고니가 등장해서 마리나의 옷을 열심히 검게 물들인다. 마지막으론 검은 베일을 씌운다. 

폴로네이즈에서는 역시나 폭발적인 안무가 나온다. 그리고 그리고리와 마리나의 대화장면. 둘의 노래가 끝날 때 쯤 흰색벽면 무대 전체가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둘을 퇴장시킨다.

4막 1장 크로미 숲. 성난 민중들이 노래하며 보야르를 놀린다. 연기자들이 합창단을 제지하려 인간벽을 쌓아보지만 이번엔 합창단의 폭발적인 힘을 이기지 못한다. 바를람과 미사일이 등장해 선동한다. 이때인가 이 전인가 검은 깃발을 든 사람들이 한바퀴 지나간다. 참칭자는 흰색 코트를 입고 마리나와 함께 등장하며 하얀색 옷을 입고 하얀색 깃발을 든 폴란드 인들이 따라온다. 그들이 다 퇴장하면 성 바보가 나타나 노래한다.

4막 2장. 보야르들이 중구난방 모여서 노래를 하면 슈이스키가 뒤에서 등장한다. 그 뒤로 딱히 별거 없음. 보리스 죽을 때 다시 14개의 종이 내려오고 드미트리 역 아이가 같은 방식으로 회전바닥에 등장해서 보리스를 지켜보다가 죽은 보리스 옆에 다가가는 것으로 끝난다.




좋았던 것 부터 꼽아보자.

1. 여관 장면 괜찮았다. 대체로 텐션이 떨어지고 좀 쉬어가는 느낌인데 지하 조직 느낌이 나게 만들어 긴장감을 높였다. 카잔 노래에서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안무 역시 난장판에 가까운 음악과 매우 잘 어울렸다. 뭐 중간에 바를람 술 취해서 노래할 때 미사일이랑 여관 주인이 위에서 놀고 있다거나 하는 건 번잡해보였지만, 진짜 개를 무대에 등장시키는 효과도 꽤 괜찮았다. 바를람이 수배문을 읽는 장면은 긴장감이 극대화 되는 부분인데, 여기서 무대를 아래로 내려버리는 건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다. 긴장이 클라이막스를 찍는 부분인데 노래하고 있는 사람을 지하로 내려버리는 건 너무 코미디였다. 마지막에 경찰들의 추격을 지상에서 보여준 것은 역동적이었고 참신했지만 잃는 것도 많았다.

2. 폴란드막 폴로네이즈에서 안무가 음악의 에너지와 잘 어울렸다. 살짝 오글거리는 것도 있고 파우스트에서 본것과 비슷한 안무가 또 나온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그래도 음악에 이 정도 잘 맞는 안무는 흔치 않다.

3. 크로미 숲에서 합창단이 폭발하며 저지선을 뚫는 건 음악적으로나 극적으로나 상당히 합리적이며 멋진 장면이었다. 

4. 살짝이었지만, 슈이스키의 교활한 모습과 마리나의 의도적인 도발이 나름 어느 정도 표현됐다. 사실 당연히 해야하는 건데 포다한테 이런 건 기대 안 했었다. 

5. 각각의 장면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포인트라고 지적했었다. 포다는 폴란드 막을 다 넣었는데, 넣은 만큼 작품의 핵심 요소로 폴란드막을 활용했다. 그 활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래도 폴란드 막을 넣은 것에 대한 책임은 다 했다고 본다.

6. 크렘린 장면에서 1872년 추가된 아리아들을 빼는 건 아주 좋았다. 


마음에 안들었던 걸 꼽아보자.

1. 프롤로그 1장에서 합창단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고통 받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관심도 없는 보리스 추대에 괜히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전달이 안된다. 푸쉬킨 원작에서 이 부분이 리얼 개그 포인트다. 애가 안 우니까 바닥에 내팽겨쳐서 울게하고 양파 가져와서 눈물 나게 하고.. 콘찰롭스키 연출이 이걸 정말 잘 표현했다.

2. 프롤로그 2장에 등장하는 회전 바닥은 왜 쓰는 걸까 이해가 안간다. 파우스트에서부터 회전 무대를 참 좋아하던데, 파우스트에서야 무대를 회전하면 구조물이 돌아가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그냥 사람들을 위에 세워놓고 돌리는 역할만 한다. 아니 그냥 사람들 보고 직접 걸어다니라고 좀 하면 안 돼요?? 합창단이 발이 없어 뭐가 없어. 이건 뭐 정적인 동선도 아니고 동적인 동선도 아니고.

3. 러시아는 죄다 검은색이고 폴란드는 죄다 흰색이라는 이분법적 상징주의. 보는 순간 딱 저번 김학민 루살카가 생각났다. 루살카의 세상과 인간 세상을 나눈 것 말이다. 
폴란드 막이 이질적인 걸 이렇게 표현하나 싶다가도, 이 둘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야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아니 원래 이 오페라에 들어있지도 않는 막이잖아. 타이스에서 두 세계를 양분하고, 파우스트에서 마르게리트를 하얀색으로 표현한 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납득할테다. 그런데 뜬금없이 폴란드는 왜 하얀색인데?  


갑자기 보리스 고두노프가 블랙앤 화이트가 됐다. 제일 싫었던 건 4막 크로미 숲 장면에 하얀색 옷 입은 참칭자와 폴란드 사람들이 구세주 처럼 등장한다는 것이다. '핍박받는 검은나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하얀나라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참칭자가 러시아를 먹을 수 있었던 건 폴란드 군대 때문이 아니라 민중의 지지 때문이었다. 사실 군대는 이미 쳐발림. 거기다 러시아 민중들이 폴란드 옷으로 갈아입은 드미트리를 추종한다고? 

결국 시각적으로 가장 강조되는 극중의 사건은 흰색 문명이 검은색 문명을 ‘구원’하러 오는 장면이다.  폴란드 인들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러시아 민중과 보야르의 차이는 더더욱 줄어들어보이고 보리스도 소외된다. 실제로 폴란드막은 하나도 안 잘랐으면서 고두노프 죽음 장면은 림코 판본대로 셰칼로프 짜르고, 슈이스키와 피멘, 고두노프의 파트 일부를 짜른대로 진행했다. 폴란드에 힘을 실을 수록 러시아와 보리스는 붕 떠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왜 란고니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거지??

4. 마지막에 뜬금없는 화해의 해피엔딩. 어라 이것도 완전 김학민 루살카네? 마지막에 음악이 조용히 끝나니 착하고 통큰 드미트리 어린이가 보리스를 용서해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오페라가 보리스가 드미트리에게 용서 받기 위한 여정이었단 말인가. 흐름과 논리가 없다.  내가 드미트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연출 포인트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오페라가 드미트리한테 보리스가 용서받고 끝날 오페라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만들고 싶었으면 그렇게 끝나야만 할 극의 이유를 만들었어야지. 

5.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빈약한 연기 동선. 그 거대한 공간에 무대 장치나 소품도 없이 가수들끼리만 노래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포다에게 안무는 가수들의 연기 만큼 중요하답니다’라고 3인칭으로 자기가 직접 써놨던데, 포다가 안무에 신경쓴 만큼 연기에 신경썼으면 이 정도는 아닐텐데. 

6. 가끔 조명 바꿔주던데 일관성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포인트를 준다고 새빨간 조명 쓰는 건 너무 구식이었다. 조명이 음악과 상황에 맞춰 가변적인 건 당연한 거긴 한데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진 부분이 종종 있었다. 연기로 해결해야할 걸 다 조명으로 해결하려 했다. 너무 변덕스럽게 자주 변해 포다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자연스러운 조명이 인공적으로 변했다. 

7. 무대가 너무 심심했다. 스케일 거대하고 연기도 엄청 뿜어내고 퀄리티도 좋았지만, 같은 무대가 계속 단조롭게 재활용됐다.

8. 의상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인간적인 공감을 끊어놨다. 폴란드 놈들은 거의 SF느낌까지 주고 보야르들의 수염은 상당히 어색했다. 거기다 백성과 보야르의 의상 차이가 그렇지 않아도 별로 없는데  폴란드의 흰색 의상 대비가 너무 심해 러시아 안에서의 차이는 더더욱 덜 표현됐다. 


공연 보기 전에 꼽았던 연출 포인트를 다시 짚어보겠다. 


1. 드미트리 살해는 극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무대 위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 사건을 직접 표현하진 않았다.

2. 보리스는 죄책감으로 병들어 죽는다. 아나스타소프도 이야기했듯이 죄책감으로 죽는 오페라 인물은 흔치 않다. 어떻게 보리스가 겪는 정신적인 압박과 고통을 전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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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드미트리가 회전 무대에 등장하는 걸로 처리하고 몇가지 조명효과를 넣었는데 특별히 설득력 있어보이진 않았다. 

3. 이 작품에는 이상한 아리아가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 1872년 개정에서 여자 역할을 늘리기 위해 늘어난 노래다. 여관 장면에서 주인장의 '오리 노래', 크렘린 장면에서 유모의 '각다귀 노래'와 표도르의 뒤 이어지는 노래, 림코 판본엔 없지만 '앵무새의 노래' 등이 있다. 이런 아리아들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주인장 노래는 새로 설정한 여관의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다른 쓸모없는 아리아는 짤라버리는 걸로 해결.

4. 각각의 장면이 상당히 파편화 돼있다. 인물들은 서로 각자의 이야기만 한다. 크세니아는 자기 약혼남이 죽었다고 징징대고, 바를람은 옛날 노래를 부르고 있고 표도르는 벌써부터 왕놀이를 하고 있다. 좀더 넓게 보면, 그리고리가 여관에서 탈출하는 장면은 왜 꼭 굳이 있어야할까? 음악적으로 쉬어가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연출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 크세니아와 표도르의 인물 묘사는 거의 없는 셈 후루룩 지나갔다. 여관 장면은 긴장감을 높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잘 보여줘서 전체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5. 주요 인물들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대체로 해석이 비슷하겠지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꽤나 다를 수 있을 것 같고, 보리스 역시 당연하게도 매우 중요하지만 슈이스키라는 인물을 어떻게 보여줄지도 당시 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키 포인트다.
- 생각보다는 잘 했다. 슈이스키는 전형적인 간신 정도로 나왔고 드미트리는 의도한건지 모르겠지만 유약한 인간으로 묘사됐다. 

6. 전체의 구조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대관식 장면의 음악은 보리스의 최후와 똑같다. 차르들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수도원에 왔지만 그리고리는 차르가 되기 위해 수도원을 뛰쳐나간다. 장면의 역할을 전체 흐름 속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이어진다.
- 보리스 죽음 장면 때 종이 내려오는 걸로 수미상관 처럼 표현했다. 무대 디자인에는 종이 다 부서져서 나오는 걸로 돼있던데 마지막날에는 진짜 부서뜨리려나. 하지만 그것 외에 별다른 구조는 없었다.

7. 러시아의 민중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들의 삶과 각각의 이야기, 고통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 크로미 숲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좋았지만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고 보야르들과도 별 구분도 안됐다. 마지막에 폴란드 인들에게 휩쓸려서 존재감도 사라졌다 

8. 이 작품은 다른 오페라와 비교했을 때 매우 연극에 가깝다. 피멘의 독백, 보리스의 독백, 보리스와 슈이스키의 대화, 마지막에 슈이스키의 등장과 피멘의 이야기, 보리스의 죽음을 어떻게 연극적으로 흥미롭게 표현할 것인가.
- 핵. 노. 잼. 


포다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무대와 의상은 생각보다 실망이었고, 역시나 연기는 핵노잼이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여관 장면과 폴로네이즈 장면, 크로미 숲에서 보여준 에너지의 발산은 상당히 훌륭했다. 문제는 그런 장면 빼고는 거의 대부분 무대가 죽어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폴란드와 러시아의 대비를 너무나 강렬하게 준 것 역시 별로 공감 가지 않았다. 

공연 보면서 묘하게 저번 루살카가 계속 오버랩됐다. 이게 그분이 포다워너비, 혹은 짭포다 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진짜 입김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말하면 포다는 '무대와 의상이 예쁘고 안무가 멋진 김학민' 정도 였다. 


이야기할 게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일단은 이 정도로 하고 일요일에 다시 한번 보면서 정리해야겠다. 


기타.

프로그램 북 퀄리티가 떨어진다. 그 전에 항상 허영한 교수가 아주 고급진 설명을 해줬는데 이번엔 빠지고 문장 구조은 물론 내용까지 이상한 글이 있더라. 틀린 내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3막 폴란드막을 설명하고 나서 4막 1장을 설명하는데 1869년 판본에만 있는 바실리 성당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바보가 고두노프의 아픈곳을 찌른다고 한다. 이건 뭐 자기 맘대로 판본 섞어서 이야기하는 거라 치더라도 “고두노프는 극도의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다”는 아예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 림코 판본이 무소륵스키 원본보다 대담한 화성을 사용했다고 써놨는데 큐이는 반대라고 설명했다. 4막 크로미 숲과 보리스 죽음 장면의 순서에 관한 이야기도 전혀 근거 없어보인다. 원래 무소륵스키 본인도 고민하면서 계속 바꿨던 장면이다. 요즘 한물간 림코 판본 쉴드치려고 애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보니까 음악학 전공도 아니던데 어떻게 저렇게 음악학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맡겼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 중 두 개나 샬리아핀 초연설을 언급한다. 가수 인터뷰에서도 샬리아핀을 위해 썼다는 소리를 했던데, 진회숙 씨 글은 1874년 초연에서 "전설적인 가수 살리아핀"이 주연을 맡아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써놨다. 러시아에서는 두살 짜리 베이스가 노래를 합니다! 림코의 1908년 파리 오페라 용 편곡 때는 분명 샬리아핀이 주역을 맡은 게 맞는데, 1896년 판본은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샬리아핀의 보리스 고두노프 데뷔는 1898년이었다. (http://russkiymir.ru/en/news/137495/)

프로그램 노트에 나와있는 연출가 노트 번역이 이상하더라. "무대는 검고 견고하며 억압적인, 일종의 기하학적 상자이다. 그리고 뚜껑이 등장인물들의 삶을 그 안에 가둬버린다." 라는 말.  무대에 뚜껑이 없는데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원문은 이렇다:"Il palcoscenico deve essere quindi una cassa nera, solida, geometrica, opprimente, un coperchio che si chiude sopra le vite dei personaggi". "따라서 무대는 검고 견고하며 기하학적이며 억압적인 상자이며 인물의 삶을 덮어버리는 뚜껑이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무대가 상자이며 뚜껑인데 왜 문장을 저렇게 쪼개논 건지 모르겠다. 

리브레토가 키릴 러시아어 - 우리말 병기로 돼있다! 당연히 알파벳 표기 러시아어로 줄줄 알았는데 키릴 문자로 돼있더라. 그런데 폰트가 달라서인지 т 가 m처럼 나와있더라. 알파벳 러시아어 읽는 건 알파벳으로 써놓은 우리말 읽는 것 처럼 어색한데, 러시아어-영어 리브레토 중에서도 키릴 문자로 써놓은 걸 못찾았었다. 이 점은 아주 좋았다. 번역도 저번 처럼 부인 시켜서 영어 중역하지 않고 러시아어 전문 번역가가 번역하고 노문학과 교수에게 감수도 맡았다. 

다만 내가 자막을 별로 안 봤지만 딱 하나 번역에서 이상한 게 있었는데, 크로미 숲 장면 합창 노래 시작할 때 "не сокол летит по поднебесью, не борзый конь мчится по полю. сидем сидим бояринушка буму думает," 이 부분이 "하늘에 묶인 매처럼, 자유를 빼앗긴 한 마리의 말처럼, 어느 귀족이 앉아서 생각을 하고 있네"라고 돼있더라.난 이 부분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매는 없고 들판을 달리수 있는 말은 없다네(No falcon flies in the sky, No horse rushes on the field)" 라고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뜨네" 같은 말을 한 다음 "보야르가 앉아서 생각을 하고 있네"라고 비꼬는 건 줄 알았다. 전문 번역가가 나보다 잘 알겠지만, 그래도 문장 구조를 봤을 때 저게 어떻게 저렇게 번역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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