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첫공은 1층에서 보고 막공은 가장 싼 자리에서 보려고 했다. 그랬는데! 내 블로그에 가장 오래 전부터 댓글을 종종 남겨주신 ‘지니가던 사람’님께서 일요일 공연 1층 S석 티켓을 두 장이나 보내주셨다. 세상에 블로그하면서 티켓 선물까지 받게 될줄이야ㅜㅜ 

친구 샤이보이는 국오 안티인 나에게 초대권이 곱게 올 리가 없다며, 혹시 편지에 탄저균을 있을지도 모른다고 드립을….. 하지만 결국 그렇게 둘이 보고 왔다고 합니다ㅋㅋㅋ 티켓 제공해주신 ‘지나가던 사람’님께 진심으로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ㅜㅜ



국오의 한 공연을 두 번 보러가는 건 파르지팔을 세 번 다  간 이후 처음이었다. 보리스 첫공연이 끝나고, 이걸 한 번 더 보러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번째에서 보이는 것들은 확실히 달랐다.


일단 판본에 대해서 잘못 언급한 부분이 있다. 이번 공연에선 림코 판본 중에서 3막 2장의 란고니와 참칭자의 6분 정도의 대화 부분이 대폭 잘려서 폴로네이즈 직전에 몸을 숨기라는 장면만 남았다. 폴란드 막에서도 커트가 됐던 것이다.

그 외에 프롤로그 1장의 합창이 반복되는 걸 없애고 (림코가 수정한 사항이 아니다) 니키티쉬 - 합창 - 셸칼로프로 바꿨다. 프롤로그 1장에서 민중들 중 한 두명이 나와서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장면을 삭제한 것이다. 순례자 장면 뒤에 나오는 대화는 원래 림코판에서 삭제된 장면이라 결과적으로 합창단이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대화가 삭제되어있다. 또한 크로미 숲 장면에서도 라비츠키와 체르니콥스키라는 두 명의 예수회(림코는 이걸 합창으로 바꿨다)가 등장하고 러시아인들이 이들을 묶어서 혼내는 장면을 삭제했다.


음악적인 주는 인상은 비슷했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그리고 한 번 들었던 공연을 다시 들으니 괜찮게 들리는 노래들이 많았다. 특히나 셸칼로프 노래는 상당히 훌륭했다. 비교적 단순한 노래이지만 호흡을 충분히 길게 가져가면서 분위기를 잘 살렸다. 처음엔 비교군이 없어서 생각치 못했지만 성량 역시 탁월했다. 여관 주인의 노래도 목요일에 비해 더 괜찮게 들렸다. 


캐스팅이 달라졌던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블라디미르 바네예프는 러시아 레퍼토리 몇 편에서 봤던 가수이고 게르기예프 레코딩에서도 보리스를 맡아 상당히 기대했던 가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남긴 했다. 일단 나이가 나이인지, 아니면 금요일에 좀 무리해서 체력이 부족했는지 오케스트라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2막에서는 유독 그런 점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4막 죽음 장면에서는 절절한 노래를 들려줬다. 너무 거칠지 않고 깊이있는 목소리로 보리스를 소화해냈으며 카자코프 처럼 목소리의 극단적인 대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알리사 콜로소바가 나왔던 A팀과 비교해도 B팀의 마리나 양송미는 부족함이 없었다. 어두운 목소리의 메조였고 목소리의 특색이 덜했던 알리사보다 좀 더 귀에 꽂히는 노래를 들려줬다. 당연한 거지만 딕션에서의 아쉬움은 좀 남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슈이스키/유로디비(성 바보)를 A팀 B팀이 서로 스왑해서 불렀다. 슈이스키와 유로디비 모두 서필이 뛰어났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으니 연기는 아예 빼고서라도, 슈이스키나 유로디비나 가벼운 목소리가 필요하다. 두 역할 모두 일종의 슈필테너로 분류할 수 있다. 부드럽거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울리는 역할이 아니다. 슈이스키의 간사함이나 유로디비의 바보같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볍고 시원한 목소리가 적격이라는 걸 이 캐스팅 스왑을 통해 더 확신하게 되었다.


조연급 인물이 많아서 보리스 공연이 실패할 거라는 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카자코프와 바네예프의 성량이 작다고 느꼈던 건 하누 가수들이 놀랄 만큼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 아쉬운 부분은 남지만 (예컨데 ‘램프는 꺼져가는구나’라고 말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칠 것 까진 없지 않나) 가수들 한명 한명 모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피지컬 좋은 한국 가수들과 재능있는 지휘자와 딕션코치가 만나면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림스키코르사코프 판본을 사용한 건 여전히 아쉽다. 무소륵스키의 관현악이 가볍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투박하다는 평이 있지만 이제 그런 특성들이 모두 이 작품의 특별한 매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림코 편곡으로 연주하는 건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을 바그너 편곡으로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89년에 왔다는 볼쇼이의 내한 공연은 분명 림코 판본이었을 테니 원본으로 연주했으면 무소륵스키 원전판 초연이라는 타이틀이라도 가져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림코가 바꾸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원전과 림코판은 정말로 다른 작품이다. 차라리 무소륵스키 원전에서 몇가지 컷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폴란드막을 거의 다 넣은 것도 결국 이 작품에 익숙치 않은 관객을 배려하기 위해서라는데, 성공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미 객석이 많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원전을 하나 림코판을 하나 객석 점유율 차이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게 그렇게 걱정이었으면 안 그래도 정적인 오페라를 더 정적으로 만드는 연출가 말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게 맞지 않았을까.


연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더 많다.


일단 이 연출은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어느 정도 뒤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 포다는 인물의 동작과 표정 등 디테일한 점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무대의 ‘그림’에 치중했다. 앞에 앉아봤자 특별히 더 볼 수 있는 게 없다. 반면 무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거리에서 봤을 때 무대의 그림 자체가 확실히 잘 뽑혔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앞에 앉으면서 놓친 게 또 있는데 천장과 바닥이다. 맨 앞에 앉아서 위를 쳐다보면 천장에 메달린 종과 각각의 벽들이 끝나는 지점들이 다 보였다. 하지만 객석 뒤 쪽에서 보니 위에 메달린 내벽의 끝이 안보여서 훨씬 높이 까지 벽이 이어졌을 것 같은 공간감을 주었다. 또한 회전 바닥이 시계였다는 것도 두번째 보면서야 알게 됐다. 1열에서 볼때는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회전 무대에 요철로 구분이 되어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2막에 나오는 ‘시계 장면’과 연관 지은 것 같은데, 회전 무대와 그 시계가 잘 어울리는가 하면 좀 부정적이다. 리브레토 상 이 부분이 시계 장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괘종 시계 울리기 시작하고 8시를 알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밤 12시에 종이 울리면 귀신이 나타난대” 같은 늬앙스라고 봐야지, 장미의기사 원수부인이 “밤이되면 시계를 모두 멈춰버리고 싶다”라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늬앙스와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포다가 유독 ‘시간의 흐름’이라는 걸 좋아하는지 파우스트에서도 뜬금없이 모래시계를 엄청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더라. 뭐 이건 어디까지나 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던 부분 중에 실망한 것들도 생겼다. 1막 2장 여관 장면에서 무대 2층이 안 보일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너무 난잡했다. 바를람과 미사일이 여관 주인을 두고 다투는 냥 하는 동작들, 여관 주인의 팜므 파탈화 등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분명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다시 보아도 1막 1장부터 그리고리 역을 분명하게 찐따로 표현하더라. 몸을 숙이고 무릎에 손을 가져다대며 뒷걸음질 치는 그리고리의 모습은 희대의 사기꾼이 된 참칭자의 모습과 너무 괴리가 심했다. 자신을 죽은 황태자라고 속여서 러시아 황제자리를 먹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소심하고 불안할 수 있나. 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방식을 시도했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그 해석이 기존 해석보다 설득력이 생기는 포인트가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체르냐코프의 파르지팔에서 클링조르는 무서운 악당이 아니라 쿤드리의 눈치를 보는 불안증세을 보이는 거세된 남성처럼 묘사된다. 이로 인해 클링조르와 쿤드리의 관계가 역전되고 새로운 시각으로 2막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야망에 넘치는 그리고리가 저렇게 소심해져서 더 괜찮게 보이는 부분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 했다. 일종의 성장 드라마처럼 마지막에 하얀색 옷을 입고 나오며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탄생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나 하면서도, 그건 그냥 전통적인 해석으로도 허름한 옷에서 멋진 옷으로만 갈아입어도 간지가 나는 장면이다. 


합창단의 에너지가 괜찮았던 크로미 숲 장면 역시 다시 보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합창단의 노래 - 바를람 미사일의 등장 - 드미트리의 등장인데, 서로 피아 식별이 안된다. 바를람과 미사일은 민중을 선동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억제하는 역할을 하더라.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경찰관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과 인간 벽을 쌓고 합창단을 제지하고 말이다. 이 수도사들이 검은색 깃발을 드는 인간들과 함께 등장하는 건 마치 러시아 정교회를 상징한다고 보았을 때, 폴란드 예수회 복장으로 등장하는 드미트리를 이들이 환영하라고 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된다. 텍스트는 분명하게 미사일과 바를람이 드미트리의 앞잡이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선율이 합창단의 선율과 똑같은데 이게 어떻게 대립이 되나 선동이지. 민중과 미사일 바를람이 서로 다투고 있는 꼴도 웃긴데 여기에 3의 세력까지 등장하며 극의 흐름이 완전히 사라진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역동적인 동선 자체에 눈이 팔렸는데, 다시 보니까 이게 무슨 개판인가 싶더라.


이 장면에서 리브레토는 아주 명확하다. 민중들은 분노에 차있고, 바를람과 미사일은 이들을 선동하며 드미트리가 입장하기도 전부터 드미트리를 환영하라고 소리친다. 이러던 와중에 폴란드의 예수회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민중들은 곧바로 그들을 억압하고 조롱한다. 그러고 나서 드미트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포다는 여기서 예수회 장면을 삭제했다. 노세다의 토리노 공연에서도 짜른 부분인데 그 이유는 이 공연에선 폴란드막을 잘랐기 때문에 예수회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포다는 가장 많이 짤리는 란고니 장면은 넣어놓고 이 예수회 억압 장면은 짤랐다. 아마 뒤에서 하얀색 옷을 입은 폴란드인들이 구세주 처럼 등장하는 것과 러시아인들이 예수회를 조롱하는 장면과 대치되기 때문일 테다. 자신의 컨셉을 밀어붙이기 위해 원작에 있는 장면을 짜른 셈이다.

포다는 이 크로미 숲의 피날레, 즉 백과 흑이 만나는 장면을 구상을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었나보다. 텍스트와 음악에 반대되는 바를람과 민중의 대립을 넣은 것도 흰색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포다 역시 드미트리와 폴란드 군사가 러시아인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폴란드인 의상 뒤에 피를 묻힌 것도 그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엿을 테다.  비록 객석에선 거의 안보이지만 유로디비의 옷이 키릴문자, 즉 러시아의 정체성으로 도배되어있다는 것도 러시아의 민족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합창단으로 대비되는 민중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인간들이 된다. 연출가 본인은 뻔히 보이도록, 그리고 별로 공감이 안 갈 만큼 괴상하게, 폴란드인의 이면을 묘사했다고 하지만 정작 무대 위에 있는 인물들도 이 상징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국립오페라단은 보리스 고두노프가 민중들의 오페라라고 열심히 홍보하는데, 실상 연출을 뜯어보면 극중 인물로서 합창단은 완전히 소외된다. 민중들은 바보가 아니다. 프롤로그에서 니키티쉬가 노래를 시키면 도대체 우리가 왜 노래해야 하는지, 좀 쉬었다가 하면 안되냐고 따지는게 이 민중들이다. 포다는 이 장면을 삭제했다. 도대체 차르가 누가 되려고 하는 건지, 크렘린 가서는 뭘해야하는건지, 그냥 울라고 시키면 또 울면 된다고 말하는 그 민중들의 대화는 림코가 짤랐다. 그리고 그 판본을 선택한 건 국오다.

민중들은 드미트리를 환영하지만 다른 신을 믿는 예수회 사람들은 잡아다 족친다. 포다는 이 부분도 잘랐다. 그렇게 폴란드 사람들이 왔을 때, 합창단은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라가는 존재가 됐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민중들을 바보로 만들어놓고 보리스 고두노프의 주인공이 민중을 상징하는 합창단이라고 홍보하는 것이 너무 우습다. 

내가 포다 연출을 싫어하는 건 이렇게 극 중의 살아있는 인물들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그저 노래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타이스나 파우스트에서 재미없는 연기로 그렇게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삭제하면서 그렇게 했다.


포다는 전체 극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보다 각각의 장면이 주는 그림의 인상에만 집중했다. 프롤로그 1장은 원래대로라면 합창단이 처한 고통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결국 포다가 짜르고 남은 파트는 귀족들에 의해 강제로 부르게되는, 신에 대한 신세 한탄밖에 없다. 크로미 숲에서도 미사일과 바를람이 민중을 어떻게 선동하는지, 드미트리가 어떻게 민중의 지지를 얻는지는 신경쓰지 않고, 백과 흑이 만나는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내용을 바꿨다.


포다가 만든 무대가 탈한국급 퀄리티라는 것은 나도 동의한다. 여기에 자연스러운 조명이 만드는 분위기와 아우라는 사람들이 오페라 극장에 왔을 때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구린 부분이 있었다는 건 확실히 짚어야겠다. 그리고 무대와 조명 퀄리티 따위는 별로 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건 그냥 구린 연출이다.

김학민 단장 부임 이후 섭외한 연출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김학민 본인 포함 6명의 연출가 중 파비오 체레사, 다니엘레 아바도, 페데리코 그라치니, 스테파노 포다로 이탈리아인이 4명이고 그 외에는 카를로스 바그너 한 명 뿐이다. 그 동안 국립오페라단에서 섭외했던 연출가로는 필립 아흘로, 아흐노 베르나르, 장 루이 그린다 같은 프랑스 연출가, 박쥐와 오텔로와 화란인을 연출했던 영국 연출가 스티븐 로리스, 후궁탈출을 맡았던 한국계 독일 연출가 요나 킴 등 다양한 스타일의 연출가들이 고루 분배되어있었다. 하지만 김학민 감독이 부임하고 난 뒤 이탈리아 연출가들의 비중이 급증 했고, 그 이탈리안 스타일의 정점이 이번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탈리아 프로덕션은 민간 오페라단에서 허구한 날 데려오는데 국오까지 이렇게 이탈리아 스타일로만 신작을 채울 필요가 있나 싶다.


음악적으로도 헤맸던 작년에 비했을 때 많은 발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연출을 '역대급'이라고 평가하는 것에 적어도 난 반대한다. 이상한 재연출로 망가지기 이전의 베르나르 트라비아타도 이것보다 훌륭했으며, 카를로스 바그너의 로엔그린 연출도 이보다 뛰어났다. 그 때는 무대 위에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였으며 역동적인 이야기가 담긴 진짜 드라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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