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흔한 독일 오페라 연출의 클라스입니까?

오늘 메뉴는 아라벨라!



이번에 독일에 오기 전 예습을 가장 열심히 한 작품은 아라벨라, 구레의 노래, 스페이드의 여왕이다. 예상되는 공연의 퀄과 내가 작품을 아는 정도를 고려해 나름 선택과 집중을 한 셈이다.

아라벨라는 슈트라우스 오페라 중 길지 않은 작품이며 음악도 편안한 편이라 예습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들여다 볼수록 이 작품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 작품을 웹툰에 비유한다면 “찌질의 역사”라 할 수 있따. 모든 등장 인물들이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연애의 가장 달콤한 장면과 괴로운 장면을 함께 담았다.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자. 아라벨라의 아버지 발트너 백작은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한 도박 중독자다. 그는 1막부터 3막까지 항상 시간과 돈만 생기면 도박을 하러 간다. 그가 퇴장하는 모든 장면은 도박을 하기 위해서다. 어머니 아델라이데는 점을 보고 기도하는데 중독이다. 점쟁이에게 마지막 남은 자산인 에메랄드 브로치를 줘버리고 남편에겐 이미 저당잡힌지 오래라고 거짓말 한다. 아 물론 예언 실력이 사기라 그 정도는 상납해도 되지만… 거기다 아델라이데는 아라벨라에게 구애하던 도미니크와 묘한 불륜관계라는 것도 암시된다. 둘다 아라벨라 시집을 잘 보내서 가난을 해결하려고 하는 아침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준다.

츠덴카는 착하지만 발암물질이다. 아무리 ‘마테오 못 잃어 내 사랑 못 잃어’ 상태라고 하더라도 아라벨라 방 열쇠를 주는 건 거의 범죄 아닙니까. 마테오가 영혼을 다해 아라벨라를 사랑하니 아라벨라 역시 그 마음을 받아줘야한다는 지극히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하다.

마테오는 자기 마음을 안 받아준다고 발령이나 자살을 생각하는 전형적인 중2병 환자다. 거기다 중간에 다리 놔주는 친구에만 의존하고  또 구박하는 것도 전형적인 연애 찐따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엘레머는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마시기의 달인이다.

그렇다고 만드리카는 정상이냐. 이 양반도 말하는 것 보면 찌질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 앞에선 돈자랑만 하다가 정작 아라벨라를 만나서는 ‘아버지 한테 아무것도 못들었어요?’라고 하질 않나, 그러다간 처음 꺼내는 이야기가 ‘나한텐 천사같은 부인이 있었죠’ 라니. 소개팅 나가서 제일 먼저 전여친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놈 정상입니까. 뭐만 하면 ‘제가 촌놈이라 그럽니다’라는 컴플렉스까지. 마지막엔 아라벨라를 오해하고 ‘마테오가 니 연인이라는 걸 순순히 인정하면 용서해주겠다’라는, 아라벨라 입장에서 어이 털리는 말 까지 한다. 오죽 어이가 없으면 알슈도 할 말을 잊고 아라벨라의 대답을 그냥 대사로 처리한다.



그런데 묘하게 이 인물들이 참 사실적이다. 연애 스토리에 나오는 클리셰적인 인물들이 총집합 한 것 같다. 

여기서 가장 알쏭달쏭한 존재가 아라벨라다. 이 모든 갈등의 중심에 있으면서 어장관리 만렙을 찍은 능력자다. 동시에 어느 날 Der Richtige가 나타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창문밖으로 본 이방인 만드리카가 바로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라벨라가 마지막에 만드리카를 용서 하는 장면도 여느 오페라와 달리 상당히 세심하게 쓰여있다. 한번에 용서하지 않고, 방에 갔다 다시 돌아와서 만드리카를 용서한다. 그것도 참 주섬주섬 이야기한다. 용서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 마지막 아리아 첫 대사가 ‘당신이 아직 가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라는 말이다. 호프만스탈은 여기서 부인에게 용서받기 위해선 문 밖에서 밤을 새는 게 현명하다는 교훈을 알려준다. 


이런 복잡한 것들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오퍼 라이프치히에서 본 공연의 연출은 정말로 탁월했다.


아라벨라는 별다른 전주곡이나 강렬한 전주 없이 오묘한 음악으로 시작한다. 막이 올라가는데, 텅빈 검은색 무대가 등장한다. 음… 네?? 아무리 미니멀리즘이라 해도, 이게 무슨 현대무용 공연도 아니고 진.짜. 텅 빈 무대요??


그러더니 점쟁이의 예언에 맞춰서 등장인물들이 무대 뒤에서 한명씩 등장했다. 오페라가 시작하자마자 결말을 읊어주는 이 황당한 장면을 아예 프롤로그 처럼 설정한 셈이다.


이후 츠덴카가 혼자 남자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방이 하나 등장한다. 방에는 책상만 하나 놓여있다. 츠덴카는 마치 이 집의 사무 담당이라도 되는 냥 책상 앞에 앉아 청구서들을 확인한다. 소녀 가장의 모습이 강조됐다.


마테오의 등장은 특이한 점이 없었으나 아라벨라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다시 무대 뒤편에서 방이 하나 등장하는데 이번엔 아라벨라의 침실이다. 아라벨라가 외출에서 돌아와 ‘부인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 하는 장면은 아라벨라가 꿈결에 하는 소리가 된다. 츠덴카가 현실에 괴로워하는 사람이라면 아라벨라는 꿈속에서 아름다운 외출을 하고 돌아온 꿈과 환상이 많은 소녀다. 



그리고 아라벨라와 츠덴카의 이중창에서 츠덴카가 노래하는 도중에는 아라벨라가 츠덴카가 있던 방에 가서 청구서를 읽어보게 된다. 아라벨라가 현실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엘레머의 장면에서는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무대 위의 방은 검은색 무대 바닥에 올려져 있는 형태인데, 방에서 무대 바닥으로 내려오기를 굉장히 주저하며 조심스러워 한다는 점이다. 아라벨라와 츠덴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왔다갔다 하는 공간이지만 엘레머에겐 방에 가상의 경계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 선을 넘는 자와 못 넘는 자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마테오는 항상 방의 구조물 안에서만 존재하며 만드리카는 자신이 곰과 싸우고 12주만에 빈에 온 이야기를 정신없이 늘어놓는 장면에서 가상의 벽을 넘는다. 발트너는 돈을 받아 신나게 노래하는 장면에서 벽을 넘는다. 


단순히 소격효과를 노린 것일 지도 모른다. 가장 압권인은 1막 마지막 아라벨라의 아리아인 Mein Elemer다. 츠덴카가 dein Elemer라는 단어를 내뱉자 아라벨라가 놀라는 순간, 무대 위에 있던 방들이 모두 회전하여 뒷면의 검은 벽을 보인다. 이 때 무대를 움직이는 스탭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며 무대의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다. 이렇게 아라벨라는 환상을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2막의 무대는 화려한 무도회장 대신 1막 마지막에서 보여준 방 구조물의 검은 뒷면으로만 가득차있다. 이 구조물들은 나중에 간격을 좁히며 분노한 만드리카를 압박하는 장치로도 사용된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초반 만드리카의 구애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포인트. 만드리카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아예 아라벨라에게 강제로 키스까지 한다. 아라벨라가 만드리카가 독특한 사람이라며 반하게 되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됐는데, 강제로 키스하는 나쁜 남자에 반한다는 설정이 세련되진 않았지만 나름 연출가의 고민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엘레머는 피아커밀리에게 만드리카를 가지고 놀라며 사주한다. 촌뜨기인 만드리카를 비엔나 귀족들이 대놓고 놀려먹는 셈이다. 이때 피아커밀리는 노래를 끝내고 만드리카에게 거대한 열쇠 목걸이를 걸어준다. 점쟁이가 모든 결말을 알고 있는 것 처럼, 엘레머와 피아커밀리 역시 만드리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3막의 시작은 마테오가 아라벨라의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호텔 로비에서 마테오와 아라벨라가 단 둘이 있었다고 뭐 딱히 오해할만한 일이겠냐 싶은데, 마테오가 바지도 입지 않은채로 아라벨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림이 달라진다.

만드리카는 아예 한술 더 떠서 피아커밀리를 애인인냥 데리고 온다. 소파에 여유있게 앉아서 싸움을 감상하던 피아커밀리가 만드리카의 “내가 저 남자가 당신 애인이라는 이유로 용서해줘야하느냐”라는 말을 하는 순간 퇴장하는 것도 나름 합리적인 포인트였다.

3막에 개뜬금 장면 중 하나가 총이 도착하자 발트너가 “도박사의 냉정한 결단성으로” (진짜 지문이다) 제대로된 적수를 만났다며 비장하게 결투를 준비하고 세명의 도박사가 Oho! Oho!라고 하는 장면이다. 아마 발트너의 도박 중독을 강조하려고 넣은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이 장면을 살리기 위해서 1막에 예언장면에서부터 발트너의 그림자 처럼 꾸준히 등장시킨다. 


가장 도발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부분은 마지막에 물을 떠오는 장면에서, 핀 포인트 조명을 받은 엘레머와 점쟁이가 무대 양끝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물을 따른다는 점이다. 무슨 의미였을까. 마치 이 날의 해프닝이 엘레머와 점쟁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이 만든 시련을 아라벨라가 이겨내었다고 인정받는 순간으로 보였다.

마지막 피날레는 상당히 클리셰적이었다. 각각의 방들이 무대 뒤편에서 하나로 이어지며, 모든 등장인물들이 등장해 happily ever after 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보여준다. 발트너는 도박하고 아델라이데는 도미니크랑 바람피고 있고… 마테오와 츠덴카만 안나와서 어쩌면 저 둘만 다른 미래를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하는 듯 하다. 이 장면 앞에 화해의 중창을 부르는 장면에서는 오페라 부파 앙상블 처럼 일열 횡대로 서서 노래하는 것도 클리셰의 일종이었다. 작품 자체가 진부하게 끝나는 걸 대놓고 연출로 조롱하는 건가?!


연출을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1막이 끝났을 때는 대박이다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중박이 되는 감이 들었다. 하지만 영상으로 본 다른 세 개의 아라벨라에 비했을 때 작품에 대해 고민한 티가 훨씬 많이 나는 느낌이었고 캐릭터와 상황들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했다. 1막이 끝났을 때 느낀 점은 독일 놈들은 치사하게 지들끼리만 이런 좋은 연출 보고 영상물은 평범한 것들만 내놓는 건가 싶었다.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훌륭했다. 알고 있던 가수는 만드리카 역의 토마스 마이어Thomas J. Mayer. 바이로이트에서 텔라문트 역으로, 도쿄에서 홀랜더 역으로 본 적이 있다. 사실 처음에는 가수들 목소리가 잘 안들려 가수들이 전반적으로 성량이 작은건가 싶었는데, 만드리카 소리도 잘 안들리는 걸 보고 홀 음향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토마스 마이어는 산적같은 만드리카였는데, 자칭 반쯤 농부가 괜한 말이 아니구나 싶게 잘 어울렸다. 가장 아쉬운 가수는 발트너 역의 얀-헨드릭 루터링Jan-Hendrik Rootering이었다. 슈투트가르트 반지에서 봤던 가수인데 이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더라. 오케스트라에 묻혀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라벨라 역의 벳시 혼Betsy Horne은 부드러우면서 깊이 있는 목소리가 아라벨라 역에 적격이었다. 한동안 플레밍 아라벨라만 듣다가 이 목소리를 들으니까 살 것 같더라. 특히 2, 3막에서 혼자만 고급스런 비취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의상을 참 잘 소화해냈다. 2막에서 만드리카와 부르는 사랑의 듀엣이 음악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츠덴카 역할의 올레나 토카르Olena Tokar는 독일어 딕션이 약간 서툴긴 했지만 목소리나 연기나 매력적인 츠덴카였다.


엘레머와 마테오 역시 잘해줬지만 가장 인상적인건 라모랄 역의 한국인 베이스 장세종이었다. 라모랄은 2막에서 잠깐 나오는 쩌리 3인방의 한 명일 뿐이지만 유일하게 아라벨라의 키스를 얻어내는 꿀 역할이기도 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소리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한참 선배뻘이라고 할 수 있는 루터링이 커튼콜 때 잘했다고 툭 쳐주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울프 셔머의 반주는 좀 특이했다. 셔머의 많지 않은 디스코그래피에서 알슈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슈트라우스 3연벙을 계획하길래 알슈 장인이라고 기대하고 갔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할까 상당히 분절적이고, 조금 기계적인 면이 있었다. 반주가 무려 게반트하우스인데, 세부적인 밸런스에 신경을 쓰고 아티큘레이션도 독특하게 가져가는 부분이 많은, 현미경 같은 지휘였는데 그 합이 아름답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거기다 3막에서는 너무 빠르게 달려 오케스트라가 못 쫓아가기도 했다. 공연 끝나고 유일하게 약간의 부잉을 받았다. 아니 너님 여기 게엠데인데 안방에서 욕먹으세요…?? 라이프치히의 김성근인가… 생각해보면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수준의 단체가 콘서트 오케스트라로서 감독과 오페라 오케스트라로서 감독이 따로 있는 경우가 있을까 싶다. 여기에 토마스 교회 반주도 해야하고…



글을 쓰고 나니까 쓸 데없이 디테일하고 뭔가 내 감정은 안 들어간 것 같다. 아침에 공연을 하나 보고 오후에 오퍼에 들려서 주니어 카드를 샀다. 라이프치히는 베를린 처럼 학생할인을 받으려면 따로 1년 짜리 카드를 사야한다. 어차피 1년 10유로고 주니어카드가 있으면 잔여석을 10유로에 살수 있기 때문에 한번만 써도 개이득이다. 20유로 주고 80유로 좌석에 앉았다.



좋은 자리 앉으려고 티켓 판매 3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렸다. 표 사고 나서 극장 안에 들어가니까 아라벨라 본다는 생각에 흥분돼서 헠헠 거렸다. 극장 마다 내부 인테리어 톤이 상당히 다른데 라이프치히는 황금빛이었다. 극장 상징도 노란 색이고, 내부도 밝은 나무 톤을 잘 살려냈다. 극장 구경을 한 20분 쯤 하고나서야 저녁을 안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로비에 있는 바그너 흉상



라운지에 전속 가수들의 다양한 사진이 붙어있다. 가운데 수염난 사람이 베이스 장세종 씨

천장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음향이 구릴 이유가 없어보이는데 구렸던 게 미스테리. 


베토벤 상도 있다.




기대를 많이했기에 아쉬운 점도 꽤 있었다. 셔머의 반주는 아주 구린 것 까진 아니지만 듣고 있으면 극적인 자연스러움이나 유기적인 흐름이 아쉬웠다. 독일 오페라 극장들은 음향이 다 짱짱할 줄 알았는데 가수들 소리가 잘 안 들려 당황했다. 1막에서 혼을 빼놓을 정도로 뛰어났던 연출은 뒤로 가선 그런 느낌을 잘 이어가지 못했다. 


덧: 몇줄 쯤 뒤에 있는 사람이 커튼콜에서 브라바 브라보 브라비를 열심해 외쳤다. 하도 열심히 외쳐대서 앞에 있는 할머니가 계속 뒤돌아보더라. 예당의 브라보 오지상이 라이프치히 원정 오신 줄 알았다. 왜 괜히 내가 다 부끄럽지... 읍읍 뒤돌아보긴 뭐해서 누군진 못 봤는데, 자꾸 브라-보가 아니라 브라보!- 라고 하는 걸 보니 유럽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끝나고 나오니 해가 다 저물었다. 아쉬운 마음에 급하게 폰을 켜서 사진을 찍었는데, 구름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예쁘게 찍혔다. 직원들이 부지런해서 아라벨라도 살로메로 바꿔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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