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것은 18세기에게.


어렸을 때 실제 오페라 하우스에서 본 첫 공연이 아이다였고 두번째 공연이 마술피리였다. DVD로 샀던 오페라가 스펙트럼에서 나온 카르멘, 피가로, 마술피리였다. 그렇게 가장 처음 접한 오페라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술피리에 흥미를 잃었다. 여성혐오,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데다가 별것도 없는 이야기를 프리메이슨과 엮어서 뭐라도 되는 냥 약 파는 것도 싫었다. 음악에도 특별한 흥미가 없었다. 피가로나 돈조에 비하면 마술피리의 음악은 대체로 지루한 음악이 많은 것 처럼 느껴졌다.


이제 슬슬 마적 혐오를 떨쳐낼 때가 됐다. 9월에 런던에 갈 때 로열 오페라가 마침 이 작품을 공연한다. 10년도 더 지난 프로덕션을 울궈먹는 데다가 아는 출연진도 한명 밖에 없어 제낄까 싶었다. 하지만 마르코 코민의 돈조반니를 보고나서 모페라에 대한 갈증이 생겼고, 거기다 9월에 가면 파리에서 코지와 티토 까지 볼 예정이다. 마적까지 보면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세편을 모두 보고 오는 셈이다. 쓸데 없는 것에 의미붙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마적을 보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물론 예매할 때 까지만 해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비싼 표는 못끊고 싼 입석으로 구했다.


오푸스 아르테는 저렴한 가격의 영상물 박스를 꽤 내놓는 편이다. 문제는 보통 내가 낱장으로 거의 다 샀을 때 내놓는다는 거다. 러시아 오페라 박스도 다섯 장 중 세 장이 있고, 브리튼 박스는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 이 ROH 모차르트 박스는 한 장도 없다. 피가로나 돈조나 디비디로만 보고 블루레이는 집어들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낱장을 엮어둔 다른 박스 세트와 달리 아예 블루레이 다섯장 짜리 케이스에 합쳐진 부클릿을 제공한다. 파파노 - 메케라스 - 데이비스로 이어지는 "믿음의 경 라인"이 각각 반주를 맡은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최근 모차르트 오페라에 제대로 맛들려서인지 그 동안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음악들이 모두 새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채로운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모페라에 비해서도 특별하다. 예컨데 처음 세 다메가 타미노를 구하고 떠나는 5분 동안의 장면만 하더라도 대략 대여섯 개의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타미노와 대변인의 대화 장면 Die Weisheitslehrer dieser Knaben 역시 음악이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오로지 가사를 따라 움직이는 장면이다. 이처럼 마술피리에서 음악 전환이 상당히 빈번하게 이뤄지며 낭만 오페라에 비해 제한적인 반주 음형 안에서 극을 이끌어내야한다. 또한 잘 알려져있듯이 이 작품에는 밤의 여왕과 같은 바로크적 콜로라투라와 자라스트로의 글루크 스타일, 파파게노의 민요 스타일 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돼있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의 반주가 곧 지휘자들의 오페라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왜 월갑 같은 분이 이 작품을 그렇게 팠었는지 뒤늦게서야 깨닫고 20세기의 마술피리 글을 다시 복습했다. 


맥비커는 이 작품을 어떻게 살려냈을까? 인종차별적인 대사를 삭제하고, 모노스타토스는 백인으로 나온다. 그래도 여전히 성차별 적인 가사는 지울 수가 없다. 대신 이 작품을 18세기의 극장 방식대로 연출한다. 처음에 뱀이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18세기 복장을 한 스태프들이 인형사처럼 막대를 통해 거대한 뱀 인형을 조종한다. 무대 전환 역시 단순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마술피리와 마술종은 트랩도어를 통해 사람이 들고 등장한다. 맥비커가 언제나 전통적인 시각 스타일을 활용하긴 하지만 작품 내내 이렇게 전통적인 무대 장치들을 고수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 작품은 18세기의 작품이고 이 등장인물들은 현대화될 수 없는 구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이 시대착오적인 말을 하더라도 박물관의 전시품을 바라보듯, 사람들이 저렇게 살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구나 라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된다. 굳이 이들의 대화에 불쾌하거나 열을 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18세기 계몽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오로지 파파게노와 파파게나만 근현대의 인물로 등장한다. 쓸데없이 근엄진지한 타미노와 자유롭게 행동하는 파파게노의 대립은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인물이 이야기이다. 한쪽은 자신의 아버지가 많은 땅과 사람이 있기에 자신이 왕자라고 불린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쪽은 평범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다. 

흔히 마적의 진짜 주인공은 파파게노라는 말을 많이한다. 이 프로덕션에서는 혼자 근대인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고 킨리사이드의 연기가 더해져 더욱 흥미로운 존재로 탄생한다. 이 바닥에서 저명하신 빠순님께서 킨리 3대 입덕 영상으로 햄릿, 돈조, 그리고 이 공연을 꼽으셨다. 과연 그럴 만하다. 일반적인 조증 파파게노와 달리 무기력한 우울증 환자 같은 파파게노를 보여준다. 처량함이 온몸에서 묻어나온다. 나는야 새잡이라고 노래하는데 새도 제대로 못 잡는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걱정으로 보인다. 이런 소시민을 데려다가 왕자라는 놈이랑 같이 시험 치르게 하니 얘가 자살할 생각을 하지 ㅉㅉ 피치가 안맞는 팬플룻 역시 더 처량하게 만든다. 

킨리사이드의 장기가 휘파람 부는거라는데 팬플룻 대신 휘파람 부는 애드립까지 한다. 자살하기 전에 eins zwei drei 세는 표정이 무슨 햄릿 대사라도 치는 표정이다. 그러다 파파게나가 나타나니 태세전환해서 세상에서 젤 행복한 인간이 된다. 침대로 점프하는 씬은 왠지 맥비커가 요구한게 아니라 지가 알아서 뛰었을 것 같다. 

원래 노래빨 100%로 먹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지만 이 공연에선 특히 목소리가 유독 거칠게 느껴진다. 킨리사이드 목소리가 이렇게 찐득했나 싶다. 덕분에 멍청함이 한층 상승하게 들린다. 독어 딕션도 구리지만 그려려니 하고 넘어가자. 아주 이상한 매력을 보여주는 파파게노다.


가수 이야기로 빠졌으니 더 이야기해보자. 오페라 덕질하면서 이 공연을 안 본 사람은 많아도 밤의 여왕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디아나 담라우 검색하면 제일 위에 뜨는 바로 이 영상.

이미 대사에서부터 압도한다. 뒤에 가서 음정 틀리는 건 안타깝지만, 스튜디오 레코딩이 아니니까. 이런 걸 현장에서 직접 보면 아리아 끝나고 기립박수 칠듯. O zittre nicht도 아주 훌륭하다. 이 영상의 표지를 괜히 밤의 여왕이 장식한 게 아니다.


타미노를 맡은 빌 하르트만Will Hartmann은 목소리가 살짝 무거운 축에 속하나 가사 처리가 자연스럽다. 21세기에 도로테아 뢰슈만Dorothea Röschmann 정도의 파미나를 듣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프란츠요제프 젤리히Franz-Josef Selig의 자라스트로는 좀 심심한 편이다.

콜린 데이비스는 나름 영국이 자랑하는 모페라 전문가다. 서곡은 재미없지만 가수를 섬세하게 뒷받침 해주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데에서 노련한 반주다. 좋게말하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하면 드라마틱한 낙차가 부족하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 만큼 '물 라인'은 아니라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맥비커는 인터뷰에서 자기가 모차르트 오페라를 처음 접한게 데이비스의 오래전 영상들이었다며 데이비스와 작업하게 된 것이 영광이라고 말한다. 


킨리사이드를 비롯한 영국인 조연들의 딕션이 구리다는 단점은 감수해야한다. 노래와 연출 모두 충분히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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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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