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당 너 이렇게 예쁜 극장에서 이러기냐


파리엔 오페라 극장이 두 개 있다. 그 중 역사가 깊은 가르니에는 새 극장 바스티유가 세워진 다음 발레만 공연하곤 했다. 요즘은 그런 구별이 다시 사라졌다고 한다. 모차르트 같이 작은 극장이 어울리는 오페라는 가르니에에서 하는 것 같다. 아, 그렇다고 가르니에가 절대 작은 극장은 아니다. 위키 찾아보니 1979석. 


iMac님 블로그에서 가르니에 포스팅을 보고 가보고 싶은 욕심이 많이 들었는데, 19세기 유럽 오페라 계의 황제라 할 수 있는 Opéra의 위용을 보여주는 극장이다. 내부와 외부 모두 압도적이다. 가본 극장 중에 외부는 젬퍼오퍼 정도가 겨우 비교 대상에 오를만 하고, 로비는 그 어느 극장과도 수준이 다르다. 이렇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로비는 처음 봤다. 안에서 미녀와 야수 찍어도 될 것 같다. 중앙 계단에서 사진을 찍으면 누구나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극장 내부 역시 샤갈의 천장화와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그 유명한 샹들리에로 압도한다.


내 자리는 가장 윗층의 중앙이었다. 티켓값이 좀 비싼 편이라 비시야장애석 중 가장 싼 좌석이었음에도 50유로였다. 무대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가리지 않는 무대를 봐서 기분이 좋았다.


조르당이 입장하고 서곡을 시작했다. 음향이 썩 좋지 않다. 경험상 여기보다 시야장애석인 사이드를 선택했으면 소리가 더 잘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음향 대신 시야를 선택한 건 꽤 현명한 결정이었다. 조르당 모차르트가 노오오오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음향이 답답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주를 들으면 들을 수록 그냥 조르당이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내 취향과 너무나 달랐던 거다. 조르당은 우아하고 고상한 모차르트를 추구하며 의도적으로 다이나믹 폭을 좁힌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갈 때 최대한 평면적으로, 관조적으로 가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오케스트라가 더 뿜어낼 수 있는 부분에서 조용히 갔다.

듣고 있는데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코민과 쿠렌치스 류의 해석으로 모페라에 경도된 나로서는 가장 마주치기 싫은 해석인 셈이었다. 노래의 변화 폭이 너무 좁아서 차라리 레치타티보가 더 음악 같이 들릴 정도였다. 여기에 오케스트라 역시 극장 오케가 콘서트 오케보다 구리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니들 지금 모차르트 반주라고 대충하는거냐 으으으 호른은 2막 부드러운 합창에서 같은 부분에서 두번 연속으로 삑을 내질 않나 오케 앙상블은 술에 물탄 것 처럼 하고 있고. 피날레에선 제대로 터뜨려주겠지 싶었지만 그저 무난하게만 지나갔다. 그러다가 느린 노래가 나오면 다시 노잼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조르당은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에 너무 경도된 나머지 아무것도 안함으로써 온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조르당이 왜 이러나, 파리 오페라가 원래 모차르트를 잘 못하나 생각을 해보니, 가르니에에서 한 영상이 떠올랐다. 캉브를랭 지휘 티토의 자비. 내가 그거 보고 티토가 레알루다가 노잼 작품인줄 알았자너ㅋㅋㅋㅋㅋ 반주의 느낌이 딱 그랬다. 이게 바로 프랑스 모차르트입니까ㅜㅜ


반대로 가수의 노래들은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사실 아는 이름이 아무도 없어서 걱정했는데 누구 하나 아쉬운 점이 없었다. 가장 인상깊은 건 돈 알폰소 역의 파울로 소트Paulo Szot(스좃 아닙니다)였다. 이렇게 다채롭게 목소리 연기를 하며 모차르트를 맛깔나게 하는 가수가 참 흔치 않은데 말이다. 찾아보니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해 토니 상까지 받았다. 

굴리엘모 역의 필립 슬라이Philippe Sly는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인 가수였다. 이번에 엑상프로방스에서 돈조를 불렀다길래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들으니 물건이었다. 일단 목소리가 꿀 같은데 프레이징 역시 이 달콤한 목소리를 잘 활용해낸다. 1막 아리아에서는 재치있는 표현을 보여주고 2막 듀엣에서는 여심 녹일 노래를 들려줬다.

페란도 역의 시릴 뒤부아Cyrille Dubois는 모차르트 부르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고음도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고 대체로 파사지오를 넘나들때도 목소리의 성격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아래 노래는 프레이징이 좀 오도방정인 느낌이 살짝 나지만 공연 때는 조르당의 지시 때문인지 차분하게 잘 불러줬다.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가수는 피오르딜리지 역의 자클린 와그너Jacquelyn Wagner였다. 

모차르트를 부르기에 손색이 없이 고운 음색에 대단한 성략, 그리고 비브라토가 심하지 않는 기품있는 프레이징까지 갖췄다. 1막의 아리아 Come scoglio의 안정감과 앙상블에서 보여주는 고음은 인상깊었다. 

도라벨라 역의 미셸르 로지에Michèle Losier도 메조 느낌이 너무 과하지 않게 적당히 어두운 음색으로 미워할 수 없는 도라벨라를 표현했다. 목소리가 과하면 도라벨라가 팜므파탈 마냥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도록 사랑스러운 면모를 잘 표현해냈다.

데스피나 역의 진저 코스타잭슨Ginger Costa-Jackson은 재밌는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로 가벼운 수브레트 느낌의 데스피나라기보단 캐릭터 가수의 느낌이 더 두드러졌다. 고운 음색을 가진 다른 두 가수와 달리 개성있는 목소리로 극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연출은 유명한 안무가인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가 맡았다. 난 잘 모르는데 현대무용 쪽에서 정말 네임드 안무가더라.  젊은 가수들로만 캐스팅한 이유가 바로 가수들도 일정 이상의 안무를 소화해내야하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인물 별로 무용수 더블이 있어 시종일관 무대에서 함께 했다. 사실 코지를 어떻게 연출해도 대단한 해석이 나올 거라 기대하진 않고 음악 맞춰 시각적인 효과만 좋아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기대를 했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관객에게 맡겨도 크게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다 파리 오페라 하면 역시 발레인데, 발레는 못 보더라도 이렇게 무용을 볼 수 있다는 게 특히 기대가 됐다.

결론 부터 말하면, 무용은 정말 좋았다. 무용 공연을 많이 보는 편이 아니지만 내가 본 무용 중에 가장 내 취향이었다. 동작은 대체로 크고 대담했고 표현이 난해하지 않았다. 각각의 인물마다 춤의 스타일이 다른 것도 좋았다. 도라벨라는 오도방정 댄스를 많이 추고 반면 피오르딜리지는 동작이 거의 없거나 우아했다. 데스피나의 춤은 가볍고 발랄했으며 알폰소의 춤은 품이 컸다. 무용수가 긴 코트 입고 턴을 하는데 단순한 동작인데도 멋있더라. 1막 피날레에서 페란도가 빠른 패시지를 부를 때 무용수가 점프 턴을 하는 모습은 앙상블 음악이 시각화 되는 좋은 예시였다.


또 하나 인상깊은 건 조명의 활용이었다. 1막에서 독약먹고 자살쇼 하는 장면에서 장난이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동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감정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이 때 무대 조명이 강렬한 색채들로 조금씩 그라데이션 하며 변하는데 단순한 효과였지만 아주 세련됐다. 좀 뻔한 수작이라는 거부감이 들법도 한데 빛이 불러일으키는 직관적인 느낌의 전달이 우선이었다. 2막의 코지 판 투테를 외치기 전에 나오는 레치타티보에서 조명을 아예 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이야기하게 만든 것도 재밌는 해석이었다.

거기다 무용 같은 경우는 4층에서도 뚜렷하게 잘 보이니 참 서민친화적인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가수들 표정 제대로 볼 수 있는 관객은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무용수 얼굴도 자세히 보이면 좋겠지만 큰 폭의 움직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도 멀리 떨어져 볼 때의 장점이다. 춤추기 편한 템포가 아닌 경우가 많았을 텐데 무용수들 모두 잘해줬다. 가수들 역시 몸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어떨 때는 누가 가수고 누가 무용수인지 분간이 안될 때도 있었다. 


오히려 아쉬웠던 건 무용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간을 보느라 춤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1막 피오르딜리지의 아리아 come scoglio에서는 다들 진짜 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있더라. 물론 의도한 거였겠지만 느린 노래에서 춤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피오르딜리지 역 무용수는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날 정도로 활약이 없었다. 굴리엘모의 무용수도 비슷한 편. 최소한 아리아나 중창에서는 무용이 계속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안무가가 연출을 맡은 다른 예시로 기억나는 건 사샤 발츠의 탄호이저가 있는데, 춤의 스타일이 안나 테레사가 더 대중적이고 흥미로운 점이 많다. 또한 코지가 탄호이저에 비해 연출가의 해석이 부족한 것이 큰 단점이 되지 않기도 한다. 



가수와 연출은 훌륭하지만 조르당의 반주는 절대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모차르트였다. 조르당에 대한 믿음으로 3시간 동안 뭔가 달라지겠지 싶었지만 절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펠레아스는 잘 해주겠지 ㅂㄷㅂㄷ



덧: 파리가 냄새 난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보고 지하철에서도 경험했는데, 가르니에 극장 4층에서도 뭔가 찌릉내 같은 쾨쾨한 냄새가 가득 났다. 웬만하면 시트 한번 교체 좀 하지....ㅠㅠ  2막 있으면서 어지러울 정도라 끝나고 로비로 나오니 상큼한 공기 때문에 겨우 살것 같더라. 냄새나는 오페라 극장이라니.... 파리 너란 도시 도대체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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