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지휘에 세련된 미장센.



올해 들어 계속 바빴다가 이번주 부터야 오페라를 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적는 국립오페라단 후기다. 마농을 올린다고 할 때부터 상당히 기대했던 공연이다. 


판본에 대해서. 일단 마농 판본 역사를 내 스스로 잘 알진 못 하지만 대충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레치타티보 대화체 대사가 사용된 버전이고, 1막은 마농과 데그리외가 마차를 타는 걸로 끝난다. 5막의 처음 데그리외와 레스코의 대화가 짤렸다. 


지휘자 세바스티안 랑 레싱이 독일 극장에서 아주 다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괜찮겠구나 싶었다. 전주곡의 경우 약간 강약 대비 보다 몰아치는 데 더 집중한 것 같았지만 자신감 넘치는 사운드는 훌륭했다. 전반적으로 템포가 좀 빠른 편이었지만 유동적인 템포 변화가 매우 자연스러운 지휘자였다. 프레이즈 정점에서 살짝 느려지는 걸 우아한 손동작으로 제어했고 코심도 매우 잘 따라줬다. 곳곳의 포인트들이 잘 살아있었고 오페라의 매력 포인트들을 잘 짚어줬다. 3막 2장에서 단순하며 조용한 화음 역시 섬세하게 잘 처리해줬고, 특히 사랑에 관련된 선율들이 나올 때 아주 탐미적으로 잘 처리해줬다. 가수들과의 호흡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졌다. 합창단과의 호흡이나 효과도 훌륭했다. 오케스트라 반주의 다양한 음형이 모두 조화롭게 들리고, 악기간의 밸런스를 잘 맞춰 오케스트라의 음색 역시 훌륭했다.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나 싶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이맘때였던 보리스 고두노프 역시 콘차놉스키의 반주가 훌륭했었다. 파트릭 랑에의 라 트라비아타, 콘차놉스키의 고두노프, 차그로세크의 파르지팔 정도와 비견될만 했다. 


마농 역의 가수 크리스티나 파사로이우는  마농에 필요한 다채로운 면모를 모두 갖춘 가수였다. 목소리가 풍성하게 부드러운 것보다는 찌르는 느낌에 가까웠는데 어린 마농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제격인 소리였다. 콜로라투라 패시지나 포인트를 주는 고음 역시 깔끔하게 터져나왔다. 비브라토가 적고 맑은 음색이 내 취향의 스타일이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연기까지 훌륭했다. 1막에서는 처음 여행을 떠난 소녀의 설레고 부산스러운 마음이 잘 드러났다. 2막에서는 데그리외를 사랑하면서도 새로운 유혹에 성적인 긴장감을 느끼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3막 1장에서 여왕으로서 부르는 가보트에는 천진난만함보다 사라져가는 자신의 젊음에 대한 애수가 느껴졌고, 데그리외 백작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목소리 톤을 확 바꾸었다. 3막 2장에서 데그리외를 유혹하는 장면 역시 탁월했다.


반면 데그리외 역의 테너 이스마엘 조르디는 조금 아쉬웠다. 공연 보기 전 며칠동안 비야손이나 아라이사 같은 테너들의 노래를 들은 것도 있겠지만, 한방이 없는 게 아쉬웠다. 데그리외 역할 자체는 여러가지 목소리 톤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목소리 자체에 대한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좀더 폭발적이거나 더 구구절절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테다. 2막의 꿈노래나 3막의 아 퓌예나 중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후반에 포인트를 줘야하는데 그게 없어 밋밋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연기도 너무 딱딱했다. 1막 끝부분에 마농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장면에서 환희에 찬 마농의 표정과 달리 데그리외의 표정은 하나도 기뻐보이지 않았다. 3막에서도 어색어색... 4막에서 아버지를 보고 당황하는 장면도 어색... 


조연진들 중 가장 빛났던 건 브레티니 역이었다. 캐스팅을 주의깊게 보지 않았고, 공연장에 일찍 들어가느라 누군지 전혀 모른 상태로 1부를 보았었다. 젊고 잘생긴 가수가 브레티니로 나오길래 브레티니가 저렇게 잘생기기까지 하면 반칙 아닌가;; 이거 줄거리가 브레티니가 마농 유혹하는 건가요? 몇번 나오지도 않는 1막만 해도 무대 위에서 존재감이 장난 아니길래 국립오페라단이 정말 재능있는 신인을 찾았구나 싶었다. 그러더니 2막에서는 마농이랑 불탈 것 같은 눈빛을 주고받는데 어우야... 이거 주인공 브레티니 맞죠...? 남자를 잘못 만난 마농을 돈많고 잘생긴 브레티니가 구원하는 내용이구나? 그런데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노래도 탁월했다. 일단 성량부터 나머지 3명 보다 뛰어난 데다가 긴 호흡으로 2막의 주요 선율인 마농!에 마성을 담아 노래했다. 데그리외 말고 브레티니 주연으로 오페라 하나 더 쓰면 안 될까요??

도대체 이 가수가 누군가 싶어서 프로그램 사서 보니까 저번 예당 마술피리 때도 극찬했던 우경식 씨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 개그연기하던 파파게노 보다가 섹시한 유혹자 연기하니까 전혀 못 알아봤다. 그래도 최소한 내 가수 취향은 매우 일관되긴 하나보구나ㅋㅋㅋㅋ 같은 사람한테 두번 연속으로 덕통사고라뇨. 독일 활동을 접고 아예 한국에 정착한 듯 하니 앞으로도 자주 볼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조심스럽게 유추해보자면 가을에 올린다는 헨젤과 그레텔에도 캐스팅 되지 않을까 싶다. 


레스코 역의 공병우 씨는 노래나 딕션이나 다 훌륭했다. 프랑스 오페라를 부르는 건 처음 본건데 원래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프랑스 기점으로 활동한 것 같다. 내가 레스코 노래에 아무 관심도 없는데 괜찮게 들었다. 데그리외 백작 역의 베이스는 위엄있고 근엄한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아주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부사르의 연출은 꽤 훌륭했다. 부사르 최고 작품인 함부르크 <나비 부인> 급은 아니어도, 영상으로 나온 마농들에 견주어도 장단점이 있었다. 일단 의상 퀄리티가 매우 좋았다. 예전부터 부사르 프로덕션의 본체는 의상 디자인인 라크루아라고 밀었는데, 어쩌면 부사르 본인의 의상 기준도 매우 높은게 아닐까 싶었다. 전반적으로 돈을 아낀 것 같은 무대 디자인과 달리 의상은 확실히 신경을 팍팍 썼고, 주름이 특이하게 잡히고 화려하지만 절대 싼티 나보이지 않는 의상은 라크루아가 디자인한 <라 파보리트> 의상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나 마농의 의상은 신경을 아주 많이 썼다. 1막의 경우 모든 승객이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었을 때 마농은 검은 외투 밑으로 화려한 색상의 치마가 드러나게 했다. 마농이 수녀원에 가는 처지이지만 본질적으로 화려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치였다. 2막에서는 (아마 데그리외의 것으로 보이는) 펑퍼짐한 흰 와이셔츠에 니삭스를 신어 데그리외와 달콤한 신혼관계, 그리고 브레티니와 있을 성적인 긴장감을 잘 표현했다. 3막 1장과 2장의 화려한 드레스는 분명히 라크루아 풍이었다. 4막에서는 많은 연출이 그렇듯 흑화한 마농을 그리기 위해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1막에서 푸세트 등 세 명 역시 마농의 마음을 뺏어야할 만큼 화려한 옷을 입어줘야하는데, 정말 마농의 반응이 수긍될 만큼 화려하면서 품격있는 의상이었다. 마농이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역시 중요한 연출 포인트였다.

<마농>에서 연출마다 갈리는 포인트가 몇가지 있다. 첫번째가 레스코를 어떻게 표현할까이다. 레스코야 말로 가수에 따라 천차만별로 표현될 수 있는 인물이다. 연출 부사르와 바리톤 공병우는 레스코를 완전한 개그 캐릭터로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개그캐 해석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일관성 있는 해석에 곧 납득이 됐다. 2막에서 데그리외가 très poliment?이라고 따지는 장면에서 très poliment! 이라고 반박자 빨리 되받아치는 부분에서 피식했다. 1막에서 마차에서 내린 승객 중 마농을 찾아다니며 엉뚱한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장면 역시 재치있는 장면이었다.

또 하나가 2막에서 마농의 고민을 어떻게 표현하냐이다. 이들 둘이 한참 밀월을 즐기고 있는지, 왜 마농은 마음이 흔들렸는지, 마농은 데그리외를 얼만큼 사랑하는지 등 말이다. 부사르는 마농이 데그리외를 매우 사랑하지만 브레티니의 유혹에도 상당히 흔들려한다는 걸 잘 보여줬다. 2막이 시작하면 브레티니가 마농과 데그리외의 집에 장미를 한송이씩 계속 던지도록 연출했다. 브레티니의 구애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공들인 것이라는 걸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에 브레티니가 레스코와 집에 찾아온 순간에서도 둘 사이에 묘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을 잘 표현한다. 마농은 구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마음이 흔들려 당황하는 모습을 잘 보여줬다. 다 늙은 할아버지 브레티니가 와서 유혹했으면 설득력이 없었겠지만 우경식 씨가 존잘이라 완벽하게 설득됐다. 데그리외가 편지를 붙이러가기 전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주저하는 마농의 모습은 2막의 하이라이트였다.


3막 1장의 무대는 좀 싼티가 났다. 디자인 자체는 괜찮은데 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이 가득 찼을 때는 화려해보이지만, 모두 빠지고 나서는 황량한 느낌이 나는 게 마농의 화려한 삶과도 맞닿아 있었다. 기욤의 발레단 장면도 들어가있지만 실제로 발레를 보여주지 않은 것 역시 좋았다. 발레단 섭외 비용을 아끼는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 마농이 데그리외를 다시 떠올리며 흔들리는 감정에 더 조명이 갔다.

같은 맥락에서 4막의 무대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앞선 막에서부터 재활용한 긴 비즈형 커튼?을 잘 활용했다. <마농>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수도원에서 도박장으로 이어지는 이 전환이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해주기 위해 넣은 막 같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원작에서도 도박은 중요한 장치고, 아주아주 비슷한 구성을 갖는 트라비아타 2막 2장도 있긴 하다. 하지만 <마농>의 도박장은 훨씬 퇴폐적인 느낌이다. 음악에서부터 뿌연 대마초 냄새가 난다고 해야하나. 특히 도박을 상징하는 초반 클라리넷 바순의 멜로디가 그렇다. 많은 연출가들이 여기에 다양한 볼거리를 집어넣는데 여성의 가슴노출도 그런 볼거리로 소비된다. 맥비커는 게이라 좀 더 공평한지 근육질 남자들도 넣어준다. 부사르는 이런 도박장의 퇴폐적인 모습을 모두 커튼 뒤로 넣어서 거의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여기에 마농과 여자조연 세명이 함께 부르는 인생 찬가 사중창에서 이 비즈 커튼을 뛰어다니며 흔들어놓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도박장이라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여기서 핵심인 '인생의 화려함'만 반짝이며 출렁거리는 비즈로 표현한 것이다. "세련됐다"라는 표현은 이런데 딱 적합하다. 말할수 없는 그 사람이 연출했으면 이 장면에서 얼마나 끔찍한 걸 봐야했을까...


5막의 무대는 굉장히 단순했는데, 원작 소설의 사막 죽음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이었다. 마농이 죽어갈 때 2막의 단칸방에 있었던 자그마한 백열전구가 내려와 켜지는 건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기에 적당한 장치였다. 전반적으로 마농을 악녀로 묘사하지 않고 즐거움과 사랑을 좇는 소녀, 그리고 데그리외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으로 묘사한 점이 좋았다. 마농을 평범한 악녀로 묘사하는 것은 봐주기 힘들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생기발랄한 모습이 남아있고 소녀같은 두려움 역시 잘 표현된 것이 원작 소설의 마농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부사르가 이미 작년에도 마농을 연출했었기 때문에 와그너 연출 로엔그린 처럼 거의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트레일러에서 보인 모습과는 인상이 달랐다. 다시 찾아보니까 3막 2장에서 마농이 데그리외 유혹하는 모습은 상당히 비슷해보인다. 4막에서 비즈 같은 금속 줄을 활용하는 모습도 비슷하고. 대신 무대 전체적인 색감은 꽤 다르다.



전반적으로 불어 딕션은 괜찮았다. 대사 부분에서는 어색함이 꽤 느껴졌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주역 두명은 대사 처리가 상당히 좋았고, 그 뒤로 대사가 가장 많은 기욤 역의 가수는 대사 딕션이 조금 딱딱하긴 해도 전반적인 연기 자체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요약하면 반주가 상당히 훌륭하고 연출도 세련됐다. 마농 역의 가수는 꼭 가까이서 볼 만한 가수이고, 테너의 경우 B팀이 더 나을 여지가 충분히 있어보인다. 그리고 브레티니 우경식 씨는 4일 모두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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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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