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연출의 마일스톤으로 남을 만한 작품을 직접 보게됐다. 


무성영화라는 독특한 디자인 컨셉을 작품 어느 한 곳에서 빠지지 않고 제대로 완성 시켰다. 

판을 뒤집으려는 시도는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연출은 떠오르지 않는다.


르파주의 반지가 왜 망했는지를 다시 돌이켜보자. 르파주는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일 때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반지는 명백한 실패였다. 르파주의 반지가 망했던 것은 첫 째가 고민이 전혀 없는 듯 나이브하게 이야기를 내버려둔 점 때문이었다. 르파주는 대본에 있는 대로를 들려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둘째로 거창하게 내세운 테크놀로지가 오로지 몇몇 장면에서만 유효했다는 점이다. 훨씬 더 대단한 장면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그만큼의 아이디어가 없었다. 라인골트의 장면전환 장면에서 보여주는 천재성은 다른 장면에서 눈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안무가가 오페라 연출을 맡았을 때도 비슷하다. 사샤 발츠의 탄호이저와 안나 테레사 케르스마커의 코지  판 투테가 그 예시다. 두 사람 모두 이 작품이 어떤 이야기인지 흥미롭거나 설득력 있는 해석은 내놓지 못 했다. 또한 안무를 통한 연출 역시 빈틈이 많았다. 춤이 있는 장면들은 괜찮지만, 춤이 들어간 것은 결국 오페라의 일부일 뿐이고 춤이 없는 장면에선 연출의 공백이 느껴졌다.


코미셰 오퍼의 이번 마술피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달성했다. 마술 피리의 이야기 자체를 대담하게 해석해냈다. 여기에 자신들의 무성 영화 컨셉을 오페라 내내, 정말로 Zu Hilfe 에서 마지막 합창까지 살려냈다. 


난 언제나 프로젝션은 연출 역사의 흐름에서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해왔다. 19세기 말, 아돌프 아피아는 바그너 오페라 연출을 위해서는 고정되어있고 죽어있는 무대 그림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살아있는 빛, 즉 조명을 잘 활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피아의 주장은 20세기 2차대전 후에 빌란트 바그너의 시대가 도래하며 실현된다. 회화의 구체성은 사라지고 조명의 가변성이 오페라 무대에 남게됐다.

프로젝션은 회화의 구체성과 조명의 가변성 둘 모두 갖고 있다. 때문에 프로젝션은 말할 것도 없이 21세기 무대 예술에서 가장 혁신적이며 중요한 공연 기술이다. 

오페라 계의 유명한 프로젝션 덕후로는 라 푸라 델스 바우스가 있다. 얘네 빼놓고 프로젝션을 논할 수 없다. <반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나 <위대한 죽음> 등에서도 프로젝션을 연출의 핵심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1927은 라 푸라 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라 푸라는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프로젝션을 활용했다면, 1927은 프로젝션이 곧 무대다. 1927의 마술피리는 오로지 영화 스크린과 같은 은막 앞에서만 진행된다. 라 푸라가 무대의 입체성을 항상 강조해온 것과 달리 1927은 의도적으로 무대의 공간을 2D로 한정시켰다. 이제 프로젝션은 무대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프로젝션은 무대 그 자체가 됐다.



1927은 프로젝션이 가진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마술피리는 프로젝션을 활용하기에 최적의 오페라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악, 온갖 비현실적인 존재들. 생각해보면 <반지>와 상당히 닮아있다. 

1927이 프로젝션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구현한 비현실적인 존재들을 되짚어보자. 용에게 쫓기는 타미노, 거대한 거미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밤의 여왕, 요정 처럼 등장하는 마술 피리, 나방으로 표현되는 세 어린이, 생각하는 기계 같은 대변인, 괴물로 표현된 불의 시련, 물의 시련. 불의 시련과 물의 시련은 극 중에서 거창한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짧은 시간 내에 대단한 '시련'을 묘사하기가 어려운 장면이다. 

장면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 타미노를 구한 세 다메가 옥신각신하는 장면에서 음악에 따라 변한다. 밤의 여왕의 두 아리아 역시 애니메이션이 음악을 잘 따라가고자 하는 장면이었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전환의 폭이 넓은 것도 장점이었다. 파미나와 파파게노의 자살쇼에서는 순식간에 황량하기 그지없는 배경으로 전환해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이야기와 연출의 결합도 인상적이었다. 두 갑옷남의 듀엣 Der, welcher wandelt는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 장면이 음악적으로나 극적으로나 약간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뱃사공 카론이 노를 저으며 부를 것 같은 노래가 되었다.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와중이라는 간단한 컨텍스트만 덧붙였지만 음악의 분위기가 훨씬 잘 살아났다. 2막에서 자라스트로가 타미노를 파미나와 작별시키는 트리오 Soll ich dich, Treuer 에서는 타미노와 파미노 사이에 거대한 시계추가 놓였다. "Die Stunde schlägt, nun müsst ihr scheiden"라는 가사를 직접 무대 위에서 보여준 셈이다.


르파주 처럼 단순히 무대 기술과 개개의 장면에만 집중한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거의 괴물처럼 묘사되는 밤의 여왕, 그리고 비정상적인 기계 문명으로 보일 만큼 이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자라스트로의 대립은 모두 까기로 적당한 밸런스를 찾은 듯 했다. 대사를 간소화 시키는 과정에서 필요없는 여혐을 삭제했다. 파파게노는 더 이상 파파게나의 외모와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파파게노의 자살쇼 이후 파파게나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세 아이는 파파게노의 자살을 막았지만 폭탄이 터지는 걸 막진 못했다 (이 때 "저길 보세요!"가 파파게나가 아니라 폭탄이 된 것도 깨알 재미였다). 그러고 나서 옷이 찢어지고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은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등장해 울것 같은 표정으로 유명한 듀엣 파파파파를 불렀다. 이걸 보고 있는 순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 감정이 들면서 눈물이 났다. 

내내 고생하던 주인공이 결국에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 바보같은 실수를 해버렸다. 가장 멋진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을 두 사람이 졸지에 폭탄 맞은 채로 마주하게 됐다. 울상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우스운 꼴을 보면서 사랑스러운 듀엣을 부르는 셈이다. 이 구도가 일종의 어린이 만화 클리셰처럼 느껴졌다. 뭔가 뻔한 장치이지만 사랑스러웠다. 이 작품에 대단한 메시지가 있는 것 마냥 철학적, 현학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어린이들이나 어른들이 애니메이션을 즐겁게 관람하게 되는 그 원초적인 맥락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감각과 환상을 부각시킨 전체 컨셉은 이 작품의 부조리함이나 불편함, 논리적인 삐걱거림 등을 일소 시켰다. 이 이야기가 하나의 꿈 같은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줬고, 꿈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니 말이다.


사소한 거지만 가까이서 봤을 때 애니메이션의 퀄리티에 놀라게 되는 부분이 몇가지 있었다. 전등이 흔들리고 그 주위를 벌레가 날아다니는 장면에서 그림자를 계속 바뀌게 만들어 전등과 벌레가 마치 벽에서 튀어 나와 그림자를 만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수들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 훌륭했다. 코미셰 오퍼가 베를린에서 음악적으로는 3등이라고 하지만 전속가수들의 실력은 평균적인 독일 극장에 비해 뛰어났다. 타미노와 파미노가 그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 타미노의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는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노래 연기력도 발군이었다. 대변인 장면 Die Weisheitslehre dieser Knaben을 이렇게 구구절절 진심이 느껴지게 부르는 가수는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연극하듯이' 부르는 레치타티보였다. 파미나는 기본 테크닉에서 다른 사람을 압도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제어할 줄 아는 가수였다. 표현의 감성이 특별히 뛰어난 느낌은 아니었지만, 특정 감정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노래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기에 다메나 갑옷남 같은 조역 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기량을 보여줬다. 갑옷남과 타미노 파미나의 사중창 "타미노 마인"이 이렇게 음악적으로 훌륭한 장면이었나 놀라게 됐다. 조역들이 뛰어나니 오히려 역할 자체가 어려운 밤의 여왕 캐스팅이 아쉽게 느껴졌다. 합창단은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1막과 2막의 피날레를 짜릿하게 마무리하는 데 1등 공신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서곡에서 죽을 쓰더니 점차 나아졌다. 서곡은 뭐 거의 표현이란 게 전무할 정도로 무미 건조했다. 기본적인 아티큘레이션 통일도 안 돼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휘자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점점 상태가 나아졌고 가수와 합창단에 적당히 묻혀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명성에 걸맞는 프로덕션이었다. 이토록 각 장면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연출도 흔치 않고 그런 고민의 결과를 이렇게 효과적으로 표현한 예도 드물다. 

블로그 이미지

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