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저드가 대전시향을 바꿔놓았다.

대전시향이 금노상 이후 여러 객원지휘자들을 거쳤었다. 마티아스 바메르트, 세이쿄 김 등 다양한 지휘자가 상임 후보로 거론되며 연주회를 가졌다. 그 중에서 결국 제임스 저드가 상임으로 확정되고 바메르트는 수석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취임 후 저드의 공연은 연말 베토벤 9번만 보았다. 4악장만 연습한 것 같은 느낌에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KBS와 서울시향을 객원지휘했을 때는 현을 다루는 솜씨가 훌륭한 지휘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대전에서의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말러 9번을 한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나. 저드가 말러로 음반도 냈고, 말러 9번에 도전하는 거라면 준비도 다를 것 같았다.


1부에는 지휘 없이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E장조를 연주했다. 어차피 1부는 버리는 셈 치고 연습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맞았는데 예상보다 더 심했다. 그냥 맛이 살아있지 않은 연주일 거라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음정 리듬조차 흔들리는 연주였다. 말러 9번 때 관객들 잠들지 말라고 배려한 프로그램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말러 9번은 놀라운 연주였다. 말러 교향곡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그때그때 정확하게 나와줬다. 말러이지만 말러와는 또 다른, 말러와 비슷한 무언가를 듣게되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어느 면으로 보아도 분명한 말러였다. 금관과 목관, 그리고 현의 균형잡힌 소리 밸런스는 대전예당의 끔찍한 음향에서도 빛이 났다. 그동안 한국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말러를 들을 때는 금관에 대한 넓은 아량이 필요했다. 이날 대전시향의 금관은 이 난곡을 깨끗하게 완성해냈다. 

전반적으로 이 공연에서 가장 가치있었던 점은 대전시향이 그 동안의 약점을 극복해냈다는 점이다. 현악기의 자신없는 보잉은 예당의 음향과 섞여 마치 모든 패시지를 약음기를 낀 채 연주하 듯 뿌연 소리만 냈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시간차 역시 항상 지목되던 부분이고, 금관, 특히 호른의 끊이지 않는 삑사리는 몇년 동안 대전시향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랬던 과거를 생각하면 말러 9번을 이렇게 훌륭하게 해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현악기는 3악장의 거친 보잉이나 4악장의 찐득한 소리까지 그때그때 필요한 소리를 제대로 뽑아줬다. 금관은 중요한 패시지가 나올 때마다 실망시키지 않았다. 물론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서 온 호른 객원 수석과 역시 외국인이 온 트롬본 객원 수석이 온 효과도 무시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목관 역시 수석진은 물론 전반적인 앙상블이 뛰어나 안정적인 어택합과 충분한 다이나믹 차이를 보여줬다. 호흡을 길게 뽑아내야하는 어려운 장면들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악단 모두가 가장 어려운 곡에서 가장 훌륭한 실력을 뽐냈다. 


 바이올린을 양쪽에 배치하고 베이스를 관악기 뒷쪽으로 넣은 배치는 잘못하다간 앙상블을 깨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였다. 예상을 깨고 모든 파트가 자신있게 맡은 역할을 소화해냈다. 작품 곳곳에 나오는 1바이올린과 2바이올린의 안티폰은 양익 배치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저드는 시향을 데리고 크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해석을 보였다. 잔기술이나 디테일보다는 어떻게 해야 음악이 괜찮게 들릴지 경제적인 방법을 잘 알고있는 것 같았다. 세련되거나 신선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안전하며 표준적인 방향이었다. 템포나 분위기가 침잠해가지 않고 곡 전반적으로 생기 있게 움직이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동안 대전시향의 공연에서 찾기 힘들었던 생동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대마가 확실하게 잡혀있는 연주였기에, 3악장 말미처럼 앙상블에 균열이 생기고 혼돈으로 빠지려는 순간에도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 분명하게 한 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2악장의 여러 춤곡을 거의 대부분 in three로 지휘한 것은 앙상블 유지에는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춤곡으로서 리듬감이나 프레이징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4악장에서 현악기가 주제선율을 연주할 때 굳이 선율 중간에 현악기가 활을 리테이크해서 연주했어야 하나하는 의문도 들었다 


연주를 들으면서 불현 듯 10년 전에 저드의 공연을 본 게 생각났다. 그 날 프로그램은 브람스 교향곡 4번이었는데, 다시 떠올려보니 원래 그 때 예정된 곡은 브람스가 아니라 말러 교향곡 9번이었다. 당시 KBS 교향악단이 상임지휘자도 없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 객원 단원을 쓸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말러 9번이 브람스로 바뀌었었다. 그 때 말러 9번을 지휘하지 못한 저드가 대전시향 상임으로 와서 10년만에 그 곡을 연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도 10년은 나이 들었다. 그 때와 지금은 내가 말러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10년이 유예된 저드의 말러 9번은 그 시절 내 모습을 어렴풋하게 불러냈다. 58세의 저드는 68세의 노지휘자가 되었고 이제는 먼 타국에서 객원이 아닌 예술감독으로서 서있었다.


지방 악단들의 말러 교향곡을 듣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한창 말러를 많이 들을 때에는 광주 대구 부산 까지도 다녔다. 그때 느낀 건 모든 말러 연주는 부족한 완성도에도 나름의 재미와 가치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날 대전시향의 말러 9번은 지방악단의 한계를 이겨내며 빼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대전시향이 과거의 흑역사를 청산하고 저드와 함께 의미있는 작업을 보여줄 거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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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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