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대륙의 오페라입니까.


학회 때문에 수저우에 왔다. 언제나처럼 공연 뭐 있나 찾아보는데, 학회 끝나는 날에 수저우에서 딱 오페라 공연이 있더라. 보니까 1년에 한두번이나 겨우 하는 것 같은데 운이 좋게 날짜가 딱 맞았다. 


이 공연은 상하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제작한 프로덕션이다. 수저우 공연의 반주는 수저우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토대로 해 상하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이 몇명이 객원으로 참가하는 것 같다. 수저우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2016년 11월에 창단되었다. 인구 천만이 넘는 수저우에 공식 오케스트라가 생긴 것이 1년도 채 안 됐다. 단원 명단을 보니 절반 이상이 외국인인 것 같다. 한국인 이름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 


가수는 모두 중국인이었다. 금 토 이틀 공연에 아이다와 라다메스만 더블 캐스팅이다. 토요일 공연엔 외국인 가수 두명이 캐스팅 되었다. 토요일 라다메스 역으로 캐스팅 된 가수는 헤어하임 라보엠 영상물로 익숙한 디에고 토레였다. 직접 볼 수 있었지만 참 좋았을 텐데 날짜가 어긋났다. 

인터넷 예매가 잘 안 되길래 그냥 가서 구입했다. 생각보다 남은 티켓은 얼마 없었다. 좌석 가격은 680위안 (11만원)/ 480위안 (8만원)/ 280위안 (4.5만원) /180 / 80 위안이었다. 우리나라 좌석 배치를 생각하고 680/480 위안 정도는 사야 1층에 앉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1층 사이드 좌석은 280 위안이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공연장에 들어갔다. 중국에는 화려한 현대식 건물들이 참 많다. 상하이에서도 많이 보았고 이곳 수저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돈의 향기가 물씬 나는 이런 화려한 건물들을 보며 동시에 중국의 소비물가를 고려하면 여러 생각이 든다. 식당 종업원의 시급은 10위안(2000원이 안 된다)이라는데 동시에 이런 삐까번쩍한 건물이 있다. 공연장 근처의 물가는 비싼 것이 확 느껴질 정도다. 학회장 근처 식당에선 풀코스 요리를 배불리 먹어도 1인당 100위안 정도가 나왔는데 전채 요리에 메인으로 꽃빵 삼겹살에 홍차를 마시니 140위안이 나왔다. 


시간이 늦어 이번에도 타임어택 먹방을 찍었다. 꽃빵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집어먹은 뒤 음식물을 다 삼키지도 않은 채로 옷을 입고 계산을 하러 갔다. 공연장까지 다시 급하게 뛰어가 다행히 늦지 않고 입장했다. 

객석은 현장 매표를 할 때 본 좌석 현황보다 더 많이 비어있어보였다. 초대권을 많이 뿌렸던 걸까. 내 옆에도 사람이 없어 혼자 편하게 보겠다 싶었다. 내부는 예당 오페라하우스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것보단 좀더 작아 보였는데 홀 크기나 전체 모양으로 보아 음향은 무난할 것 같았다. 






지휘자가 들어오고 신비로운 전주곡이 시작됐다. 그 때부터 아주 기묘한 경험의 시작이었다. 과연 신생 악단 수저우 심포니의 실력은 어떨까라는 기대로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내 귀로 들려오는 건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아니라 객석의 소음이었다. 이 사람들은 공연이 시작됐다는 걸 과연 신경이나 쓰고 있는 거였을까. 그러더니 막이 열리고 무대가 보였다. 회전이 가능한 높은 이집트 식 단 하나가 무대 장치의 전부였다. 문제는 바로 벽돌 타일이었다. 그래도 공연 무대로 저런 벽돌 단을 만들면 보통 벽돌같은 질감의 물체를 만들어 쌓아 올리지 않나? 그냥 직육면체 스타일로 모양 잡아놓고 거기다가 거대한 벽돌이 그려져있는 시트지를 붙여놨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대학생들 공연 한다고 하면 소품을 이렇게 만들었으려나...?

그나마 디테일에 신경쓴 기둥과 달리, 기둥 밑의 지지단은 정말 대충 처리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색색의 현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며 무대 장치를 점검한다. '흠 이거 박물관인가? 뭐 뮤지컬 아이다 처럼 현대 박물관에서 시작해 유물에 담겨있는 이야기 같은 걸 풀어내는 액자식 구성인가보군. 좀 식상하지만 나름 노력했다고 볼 수 있겠네' 라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라다메스와 암네리스가 등장하고 분장 스탭들이 둘을 쫓아다니며 분장을 확인해준다. 카메라가 등장하고 조명 장치까지 나온다. 아 뭐야, 오페라 전체를 그냥 영화 촬영 도중인 것 처럼 만들겠다고??? 그러니까 뭐 팔리아치 프롤로고의 안티 테제 처럼, '여러분 여기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허구에요. 여러분은 그냥 영화를 찍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뿐이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무덤에 갖혀 죽는 것 같지만 실은 아니랍니다!" 라는 거야?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바텀 같은 생각을 진짜 21세기 무대 위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합창단 뒤쪽에 현대 복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된 패션)을 입은 연기자들이 서있다.


이윽고 라다메스가 등장한다. 홍콩 출신의 노장으로 한때 유럽에서 잘 나가 홍콩의 성악 영웅 쯤 되는, 비유하자면 1세대 원로 성악가 쯤 되는 가수인가 보다. 경력을 보니 주로 드라마티코 테너를 많이 맡았었다. 유독 드라마티코로 잘 나가는 가수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활동하는 것 같다. 목소리가 늙어가는 걸 '드라마티코'하다고 우긴다는 느낌이다. 안타깝게도 이 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소리에서 영광스러운 한 때를 보낸 자신감이 엿보이지만 현실은 고음은 메마르고 억지스러운데다 광폭한 비브라토 덕에 음정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암네리스는 4일 연속 싱글 캐스팅으로 부르길래 어떤 생각인지 궁금했다. 가수가 그렇게 잘 하나? 아니었다. 그냥 암네리스를 떨이 역할 정도로 생각했나보다. 목소리를 묘사하자면, 노래와 공기 사이에 경계가 없어보인다고 해야할까. 분명히 노래를 하고 있는데 깔끔하고 중심잡힌 소리가 아니라 공기 중으로 섞여 들어가기만 하는 소리였다. 클라리넷 같은 경우 극한의 피아니시모를 내서 음의 어택이 아예 안 나게, 즉 소리의 시작과 침묵의 경계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데 이 사람 노래하는 게 그런 느낌이었다.


이왕 까기 시작한 거 안좋은 이야기만 계속해보자. 대륙의 관객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짜 그냥 다른 세계다. 당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걸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도 계속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까진 그냥 그려려니 했다. 그런데 1막에서 무대가 잠깐 회전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무대 회전하는 걸 찍는닼ㅋㅋㅋㅋㅋㅋㅋㅋ 아는 분들도 많겠지만, 중국에서는 공연 중 핸드폰으로 사진찍는 관객들이 많아서 직원들에 뒤쪽에서 레이저로 경고 신호를 보낸다. 핸드폰에 레이저를 쏘며 '너 보고 있으니 하지 마라'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다. 레이저는 아마 밤하늘에 별자리 설명하면서 쓸 것 같은 그 강렬한 초록색이다. 2009년에 베이징에 아바도 보러갔을 때도 이 레이저 세례를 구경하긴 했지만, 수저우의 레이저는 한층 두껍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레이저를 쏘는 것도 사람이 쏘는 거기 때문에 한번에 제대로 타게팅할 수도 없고, 그러니 레이저 포인터가 이리저리 갈지 자로 흔들리며 겨우 핸드폰을 쏜다. 당연하지만 핸드폰 화면보다 그 레이저가 수백배 쯤 밝은데다가 그 레이저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레이저 포인터에 쫄아서 핸드폰을 내리면 다행이지만, 관객들도 적응을 해서인지 레이저로 경고를 받든 말든 핸드폰으로 계속 찍기도 한다. 그 지경에 달하면 직원이 다가와 찍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게 절차다. 그래서 무대가 전환되거나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올 때면 그걸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드는 관객들, 그걸 저지하겠다고 레이저 포인터를 휘두르는 직원들의 콜라보로 화려한 빛의 전쟁을 이룬다.

커튼콜에서 박수치는 사람보다 핸드폰으로 찍는 사람이 더 많아보였다. 
루브르 모나리자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찍는 건 처음이다.


차라리 무대를 찍는 건 최소한 공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예 대놓고 잡담하거나 핸드폰 하는 관객은 왜 그렇게 또 많은지. 전체적으로 객석이 계속 소란스러웠지만 내 뒤에 있는 관객은 특히 심했다. 귓속말도 아니고 그냥 조용한 대화 수준으로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더라. 참다참다 화가나서 팸플릿 든 손으로 팔을 뻗어 조용히 해달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눈이 동그래지더니 왜 나에게 뭐라 하냐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옆에 같이 온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중 한명은 아예 고개 숙이고 핸드폰만 보고 있더라. 

이 쯤되니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은 돈을 내고 오페라를 보러 온걸까. 무슨 벌칙이라도 걸린 건가.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되신 거냐고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러니까 전반적인 공연의 상황은 뭔가 가짜의 향기가 가득났다. 가짜 벽돌 무늬를 붙여 놓은 가짜 무대에서, 이야기가 꾸며낸 영화 촬영일 뿐이라고 굳이 더 자신이 가짜라고 우겨되는 연출, 거장인 척 노래하는 테너, 여기에 오페라를 보러오는 척 하는 관객 까지 모든 게 가짜에 '척' 투성이었다. 영화 버드맨 앞부분에서 무대 위에 있는 게 다 가짜 소품이라 빡쳐버린 배우가 생각났다. 이 오페라 극장에서도 모든 게 가짜 같았다.


끔찍한 경험이 될뻔 했지만 이 와중에 이 공연을 살려내는 요소들이 있었다. 아이다 역의 Xiaoying Xu는 오페라베이스에도 중국 공연밖에 없고 유튜브에도 올라온 게 없길래 그냥 중국 내수용 가수라고 생각했다. 1막에서 암네리스와 라다메스의 처참한 듀엣을 들으며 기분이 울적해지고 있을 때 아이다가 등장했고, 이 공연에도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나타났다. 또렷한 발성, 엄청난 성량, 안정적인 딕션, 약음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포르테의 어둡고 날카로운 목소리까지 두루 갖춘 가수였다.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가 너무 남달라 아이다를 맡기에 적당한 역할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힘을 들이지 않고 노래할 때에는 아주 부드럽고 청순한 목소리였다. 그러다가도 저음에서는 아주 어둡고 강렬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드라마티코와 리리코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재능이다. 어느 이탈리아 레퍼토리를 가져다줘도 다 잘해낼 것 같았다. 토스카, 초초상, 미미, 투란도트, 류, 아이다, 비올레타, 질다 등등등...

이 공연에서 아이다의 포스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마리아 칼라스가 무대에서 저런 존재감을 보여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애써 무대를 장악하려고 기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발성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표현을 빚어냈다. 드라마티코 특유의 부담스러운 비브라토도 없었다. 다이나믹과 비브라토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아는 가수였다. 두 아리아에서 보여주는 완급조절과 프레이징은 다소 교과서적이었지만 그런 표현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다. 3막의 아리아 끝부분에서 마지막 음에 거대한 크레셴도를 넣은 것은 식상한 기교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노래에 완전히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돌아와서 자료를 찾으려고 해봐도 영어 검색 결과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찾은 결과가 상하이 오페라단의 투어 공연 리뷰. 전반적으로 공연이 구렸지만 Xiaoying Xu에 대해서는 아주 호평했다. 어차피 내 평가를 검증할 다른 자료가 없으니 칼라스가 부르는 것 같은 아이다를 듣고 왔다고 자랑해도 되겠다.


상하이 오페라 하우스의 소속 단체들의 노련미도 빛났다. 수저우 오케스트라는 오페라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완전히 적응된 것 같진 않지만 안정적인 사운드를 내줬다. 관악 솔로의 기량도 훌륭했고 투티에서 만들어내는 무게감도 좋았다. 지휘자 Xu Zhong 은 이탈리아에서도 활동하는 지휘자인데 정석적인 연주를 추구하는 듯 했다.  

합창단은 오케스트라보다 더 뛰어났다. 합창단이 이 만큼 노래를 잘하는 것은 독일에서도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오브리 합창단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고급진 사운드가 나왔다. 포르티시모로 노래해도 전체적인 밸런스나 소리의 질이 깨지지 않고 아름답고 힘 있게 퍼져나갔다. 2막 1장에서 암네리스의 시종들이 부르는 합창은 파트가 나뉘면서 앙상블이 흔들리기 쉬운 곳인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아름답게 해냈다.

심지어 무용단도 뛰어났다. 1막 2장에서 여자 무용수들이 등장하여 음악에 어울리는 관능적인 춤을 췄다. 안무가 음악에 잘 어울리고 세련되기도 했지만 무용수들의 동작도 아주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냥 무용단체 돈 주고 섭외해서 무대에 올리는 퀄리티랑은 격이 달랐다. 일단 무용수들의 숫자에서부터 차이가 꽤 났는데, 여자 무용수만 해도 10명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10명 모두 기량이 고루 탁월해 함께 군무를 이룰 때 거슬리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안무나 무용수의 실력이 참 좋아서 개선행진곡 장면에 나올 무용 장면이 기대될 정도였다.



공연이 끝나니 안 그래도 빈 객석이 더 비었다. 다들 핸드폰으로 찍느라 박수 소리는 쥐꼬리만 해서 연주자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몇가지 있다.

첫째, 중국 내수 시장은 엄청나게 큰가보다. 유럽에 나가도 충분히 잘 나갈 것 같은 가수가 중국 내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둘째, 좋은 예술은 좋은 관객층이 밑바탕이 되어야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돈이 많은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셋째, 공연장 내 절대정숙이 과연 금과옥조가 맞는지 의심이 생겼다. 그냥 모든 사람이 자기 거실에서 영화보듯 딴 짓 하고 떠들기도 하다 적당히 재밌어보이면 보고 하는 게 '성숙하지 못한' 문화인지 '다른' 문화인지 모르겠다. 이런 객석에서도 저런 예술이 꽃피잖아? 생각해보면 모차르트나 베르디 시대의 오페라 하우스가 이 날 수저우보다 조용했을 것 같진 않다. 


한 마디로, 컬쳐 쇼크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관람 문화에 한번 놀라고, 그런 관람 문화 안에서도 유지되는 몇몇 가수와 상하이 오페라 하우스 부속 예술단의 예술적 성취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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