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밤입니다. 


쿠렌치스의 SWR 취임 공연을 보았다. 둘째날 공연이지만 이것도 취임 공연이라 치자.


이 공연을 볼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이었다. 심지어 이 공연이 있다는 걸 비행기 표를 사고나서 알았다. 이 날은 다른 일정도 없었고 슈투트가르트에 다녀오는 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우프만 공연 다음날 쿠렌치스 영접이라니, 덕질 복이 아주 대폭발했다. 

SWR Symphonieorchester (Sinfonie인 줄 알았는데 Symphonie다) 는 SWR 산하의 두 오케스트라, 슈투트가르트 방송향(RSO Stuttgart)과 바덴바덴-프라이부르크 방송향(SWRSO)을 통합하며 만들어진 악단이다. 내가 알기로 쿠렌치스는 SWRSO와 공연을 했었다.

RSO는 노링턴과 함께 성남에 와 내한공연을 한적이 있어 직접 보러간 적이 있다. 노링턴 식 절충주의를 현대 오케스트라에 접목하면서 말러와 드보르자크 등에서 독특한 사운드를 선보여 명성을 쌓은 때였고, 노링턴의 퇴임이 확정된 터라 당시 공연 홍보 카피는 노링턴과 RSO 슈투트가르트 조합의 마지막 내한 공연이라고 홍보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아마 그 공연이 노링턴의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될 것 같다.

쿠렌치스가 SWR교향악단의 상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뜬금포는 뭘까 싶다가도 찬찬히 생각해보니 이 악단이 쿠렌치스를 선택한 것은 필연적인 귀결 같기도 하다. 두 악단 모두 시대연주 기반의 절충주의를 선보인 지휘자, 노링턴과 자비에로트가 상임으로 있었다. 또한 로스바우트와 길렌 등이 쌓아올린 SWRSO의 현대음악의 유산 역시 쿠렌치스를 통해 빛날 수 있을 테다. 통합된 SWR오케스트라와 쿠렌치스의 첫 공연인 브루크너9번 뒤에 이어붙인 리게티의 론타노에서 벌써 그 가능성이 보인다. 슈투트가르트가 최고의 지휘자를 영입했습니다!

쿠렌치스가 SWR로 진출해서 가장 좋은 점은 방송국 답게 덕질할 소스를 엄청나게 잘 푼다는 거다. 브루크너 9번 공연때는 특별히 큰 홍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쿠렌치스가 정식 취임하는 이번 시즌부터는 Chefdirigent 방 명패 바꾸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홍보 자료를 만들어냈다. 인터뷰도 기본 영어 진행에 독어더빙없는 판도 따로 풀어준다. 쿠렌치스가 관객 대상으로 곡 설명하는 Currentzis LAB도 매 공연마다 하기로 했는데 이것도 영상 생중계한다. 덕분에 새벽 3시까지 기다려서 본방사수 했다. SWR 사랑합니다. SWR이 독일의 민족정론방송 맞죠? 아 독일에서는 그러면 안되갔구나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저번 샹젤리제도 1열에서 봤지만 이번에는 무대 바로 앞까지 바이올린이 있으니 정말 코앞이었다. 얼빠석에 앉아서 혹시 음향 밸런스가 망가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결과적으론 기우였다. 그동안 듣지못했던 현악기의 파트들이 훨씬 더 또렷하게 들렸고 현악기들끼리만 연주하더라도 서로의 위치 차이로 인해 성부 진행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거기다 악장 솔로 지시할 때는 쿠렌치스의 눈빛이 자연스레 내 쪽을 향했다. 적당히 사이드다보니 공연 내내 그 표정도 잘 보였다. 1열을 선택한 건 역시 옳은 결정이었다. 


이 완벽함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1악장의 호른 선율에서부터 쿠렌치스는 프레이징에서 강조해야할 음표들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리고 호른에 응답하는 오케스트라의 투티는 그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음표 두개를 아주 깔끔하고 명확하고, 서슬퍼런 칼날처럼 정확하고 예리하게 내려쳤다. 곧바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첼로가 포르티시모로 스케일을 열어젖힐 때 쿠렌치스의 예비박은 뭔가 대단한 걸 예고했는데, 실제로 첼로 파트가 내는 소리는 그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보면대 사이로 보이는 2풀트 아웃의 백발의 베테랑 단원이 지휘를 바라보는 눈길, 그리고 그 또렷하게 구분되면서 폭발적인 16분 음표 스케일에서 SWR 단원들과 쿠렌치스의 연결이 얼마나 두터운지 실감할 수 있었다.


쿠렌치스의 특기 중 하나는 아티큘레이션을 조절하는 탁월한 능력이다. 행진곡에서 1바이올린의 조용한 붓점리듬 멜로디는 마치 처음 듣는 부분인것 마냥 새롭게 들렸다. 쿠렌치스 사운드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런 음색이 그런 짧은 선율에서도 드러났다. 

쿠렌치스가 SWR을 데리고 어떻게 그런 소리를 만들어냈을까. 비브라토를 안 쓰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비브라토를 상당히 절제하고 특히 액센트를 줄 때 음표의 어택에 비브라토를 하지 않으면서 시대연주 스타일 같은 음색이 나오는 것 같았다

원래도 몸을 많이 쓰는 지휘자이지만, 이렇게 지휘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프레이즈 하나하나 마다 다채롭고 끊임없이 바뀌는 것도 흔치 않다. 아무리 쿠렌치스라 하더라도 지휘가 박을 주는 기능만 하는 순간들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데, 오늘 공연에선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 음악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 그 세세한 디테일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첫 악장 솔로를 프레이징 하는 모습은 현대무용가라고 해도 쉽게 따라하지 못할 동작이었다. 어디가 프레이즈의 시작이고 어디가 데크레셴도고 어디가 정점이고 어떻게 마무리해야한지 모든 것이 손짓에 담겨있었다.

행진곡이 처음으로 찬란하게 빛나며 투티로 이어진 다음 현악기가 브람스 풍의 선율을 낮은현에서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부분 등을 보면, 다른 연주에서는 큰 흐름은 있지만 그 흐름안에서 흘러가기만 하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쿠렌치스는 그 안에서도 다이나믹의 변화로 프레이징을 명확하게 이끌어낸다. 과장된 템포 변화 없이도 세밀한 다이나믹 변화로 선율이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첼로가 현을 물어뜯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 소리로 말러 6번을 연주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그런 연주에서 갑자기 재현부 첼로 모놀로그는 표정이 확 바뀐다. 잘 통제된 군악대의 날선 음색에서 살짝 끈적이고 말랑말랑한 방향으로 전환하니 갑자기 공연장의 공기가 바뀌는 기분이다.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연주의 표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프로그램적인 연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치열한 사투였다. 장송행진곡 풍의 적적함에서 찬란하게 약동하는 행진곡이 벽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었다. 1악장이 끝나는 순간 그 엄청난 긴장감과 압도적인 연주에서 해방된 숨소리들이 들렸다. 그 모든 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와 xx 내가 방금 뭘 들은거지


2악장 시작의 오보에 솔로에선 음표하나하나에 쿠렌치스의 몸짓 손짓이 변했다. 쿠렌치스의 피아니시모는 특별하다. 완전히 다른 세상의 차분하고 따뜻한 세상이었다.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슬픈 연주였다. 쿠렌치스의 레가토는 이런 거였지! 또렷하게 들리는 피치카토는 맛을 한층 더 살려준다. 트리오는 경쾌하면서 맛깔나게 지나갔다. 3악장은 또 경박하기 짝이없을 정도로 신나는 스케르초였다. 생동감 있는 템포였지만 아티큘레이션의 발음이 살아있는 연주였다.  플뤼겔혼 솔로는 아름답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저음의 무게감과 춤추는듯한 리듬도 탁월했다. 4악장을 예고하는 듯한 코다에서 하프의 전투적인 비트는 잊지 못할 것 같다. 


4악장과 5악장은 비교적 담백하게 지나갔다. 4악장의 알토 솔로는 이 역할을 자주 맡는 게르힐트 롬베르거였다. 베테랑 답게 차분하고 tief 그 자체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Doch alle Lust will Ewigkeit에서 느려지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쭉 이어나가는데 오케스트라와 가수의 부착성도 좋았다. 5악장에서는 소년합창단의 소리와 여성합창단의 음색이 확실히 대비가 잘 됐다. 합창단이 상당히 높은 곳에 있으니 정말 천상에서 부르는 효과도 났다. 캐롤풍의 반주 멜로디와 합창단의 레가토가 교차하는 부분 역시 쿠렌치스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한 프레이즈 안에서도 절반 씩 뉘앙스가 바뀌는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쿠렌치스가 가장 사랑하는 6악장. 쿠렌치스 랩에서 설명하던 것들이 무엇인지 연주를 들으니 또렷하게 들렸다. 첼로가 선율을 연주할때 비올라의 불협 경과음, C#단조에서 비올라의 싱코페이션, 마지막 4부에서 플룻이 첼로 선율을 연주할 때 나오는 현악기의 자장가 같은 반주, 무엇보다 이 느린 곡에서 선율이 어떻게 레가토로 흘러가야하는지에 대한 해답.

쿠렌치스가 여기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박과 박의 경계를 없애고 진정한 레가토로 연주하는 것이다. 박과 박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틈들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쿠렌치스의 손이 이 느린 악장에서도 바삐 움직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차분하고 느린 곡이 동력을 잃은 채 의미없이 부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언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필요했다. 쿠렌치스의 음악은 정지해있지 않았다. 느린악장에서 등장하기 쉬운, 한박한박 마치 한발짝씩 내딛는 것이 아니라 연속동작으로서의 걸음이었다. 여기에 오히려 이전 악장들에서 잘 보이지 않던 과감한 루바토로 프레이징을 완전히 나누는 곳들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호른이 1악장의 선율을 연주하며 고통스럽게 끼어들다가 다시 한번더 변모한 모습으로 나올 때마다, 쿠렌치스가 6악장을 예수의 말을 빌려 표현한 것이 같이 떠올랐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랑,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 말러는 이를 "Father, look upon my wounds / Let no creature be lost"라고 했고 쿠렌치스는 이것을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n't know what they are doing"이라 비유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나아갈 수록 감격과 아쉬움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태까지 말러의 느린 악장 중 가장 덜 친숙한 것이 3번 6악장이었다. 하지만 모든 음표가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받고 꿈틀대며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이 연주를 듣고 있으면, 이 악장이 말러의 느린 악장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마지막 반복이 시작되는 순간은 눈물을 참을수 없는 종교적인 감동이 있었다. "내가 더 어리고 연약하던 때"에 말러는 내게 뼈저리게 슬픈 음악이었지만, 쿠렌치스의 연주는 이제 변해버린 지금의 나에게, 숭고한 감정으로서의 말러를 알려줬다.


공연을 다시 떠올릴 수록 큼지막한 템포 변화나 다이나믹 파괴가 떠오르지 않아 조금 당혹스럽다. 잔기술이라고 해야하나, 장치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들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연주가 평면적이고 지루했냐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신기하다. 사람들은 쿠렌치스를 보고 파격이라고 말하지만, 난 오히려 쿠렌치스야 말로 탁월한 기본기로 승부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쿠렌치스는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밸런스, 그 아티큘레이션, 치밀한 앙상블. 이처럼 템포를 따라한다고 해도 절대 비슷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후기를 적으려고 악보와 음원을 복기해보는데, 떠오르는 말은 Nicht diese Töne! 일 뿐이다. 괜찮은 공연은 음반을 듣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대단한 공연을 보면 아무리 음반을 찾아들어도 그때의 소리를 찾을 수 없다. SWR홈페이지에서 전곡 영상이 다시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카우프만의 리사이틀에서 실망스러운 부분을 느끼고 이번 공연에도 조금은 걱정했다. 쿠렌치스가 말러를 잘할 수 있을까. 그의 모차르트와 라모가 완벽하다는 건 잘 알지만 과연 말러도 엄청난 연주를 보여줄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됐다. SWR오케가 잘 안따라주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들었다. 팬으로서 공연장을 찾아가면, 혹시나 연주가 성에 안차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곤 한다. 공연이 훌륭하길 기대하는 마음이 그냥 관객으로 갈 때랑 팬심을 두르고 갈 때는 확실히 다르다. 팬으로 갈 때는 그 공연이 꼭 좋아야만 하는, 내가 그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기를, 내가 빠졌던 그 사람의 매력이 여전하길 기대하게 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기에 두려운 마음도 조금 자리잡는다. 하지만 정말 기우였다.  예수를 의심한 베드로의 마음과 닮은 구석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의심의 죄는 오늘 5악장의 노래와 6악장의 사랑에서 사함 받았다.

1열에서 너무 사진만 찍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사진보단 박수에 집중했다. 거기다 욕심내서 조리개 넓혀서 수동으로 찍다가 몇장 건진게 없다. 




공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아보려고 어셔에게 물어봤다. 친절하게 백스테이지 출입구 위치를 알려줬다. 놀랍게도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원들 기다리던 사람들이 빠지니 남는건 돈조반니 LP를 들고 있는 아저씨와 나밖에 없었다. 출연자 출입구 관리하는 직원 분은 친절하게도 쿠렌치스가 혹시 다른 곳으로 먼저 가버리진 않았는지 확인해줬다. 30분쯤 지나서 LP 아저씨와 나 둘밖에 없어 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슈투트가르트 근처 도시에 살면서 SWR 정기권을 끊어서 보는데, 이렇게 잘하는 공연은 없었다고 칭찬했다. 다른 지휘자들의 공연이 잘하는 수준이었다면 오늘 공연은 완벽했다며, 단원들이 이렇게 연주하는 건 처음본다고 했다. 사인 받으려고 LP판 다 가지고 오셨더라. 앨범 하나가 전집 박스 사이즈이니, 저기다 싸인 받아서 집에 전시해놓으면 간지 폭발이겠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쿠렌치스 음반 중에 뭘 제일 좋아하냐고 물으니 봄제와 돈조를 꼽았다.

나도 어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름 준비를 했다. 오는 기차 안에서 편지도 쓰고, 사인받을 용도로 슈투트가르트 기차역 앞에서 저번 샹젤리제 공연에서 찍은 사진도 인화해갔다. 그렇게 1시간 쯤 기다리니 쿠렌치스가 지인들과 함께 내려왔다. 객석에서 볼때는 몰랐는데 좁은 실내에 있으니 진짜 키가 정말 정말 크더라.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모든 엘피판에 사인을 해줬다. 아저씨가 쿠렌치스에게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고 칭찬하니 'I really worked hard" 라고 대답했다. 리허설이 빡세긴 빡셌나 보다. 

LP 아저씨의 콜렉션!

난 쿠렌치스 사인 받을 블루레이 커버를 이것저것 챙겨가긴 했는데 썩 성에 차지 않았다. 사인을 받아도 매번 꺼내놓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자기 앨범에 싸인을 해주는게 더 기분이 좋을 수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사진에 사인을 받아놓으면 훨씬 자주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장에다가만 받을까 했지만 쿠렌치스가 이런 쪽에는 또 워낙 친절해서 챙겨간 사진 세장 모두 받았다. 어느 공연 때 찍은 사진이었는지도 물어보더라. 용기내서 사진 같이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고 흔쾌히 찍어줬다. 편지도 잘 전달했으니 아쉬운 것이라면 딱하나 오늘 말러3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충분히 찬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뻘이야기 1. 

돈조 다큐멘터리에서 비토 프리안테와 싸우는 모습 때문에 쿠렌치스의 성격과 스타일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꽤 있지만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신과 동물의 모습이 함께 있고, 상대방이 동물처럼 행동하면 그땐 자기가 가장 강한 동물이 되야한다.'가 요지이고, 특히 그 중에서 '자유를 준다고 해서 어느 순간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그땐 뼈를 좀 분질러줘야한다'.  리허설 과정에서 프리안테가 보여준 모습은 분명 무례한 것이었다. 지휘자의 지시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녹음 과정 중에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연히 그 부분을 피아노 리허설도 같이 했을 테고 이미 합의된 해석이었을 테다. 거기다 프리안테가 지적한 부분은 심지어 자기가 부르는 대목도 아니다.

단원들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단원들과 함께 친구처럼 어울리는 민주적 리더십을 갖춘 지휘자가 존경받는 건 당연하지만, 그런 아바도 조차도 그리모랑 카덴차 가지고 싸워서 캔슬하지 않았나. 

다르게 생각해보자. 카라얀이랑 리허설 하는데 가수가 카라얀한테 이건 논센스라고, 참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모습이 상상이나 되나? 아바도나 얀손스한테 그렇게 말하는 가수가 있었을까? 두다멜이나 네제세겡 같은 젊은 지휘자에게 가수가 그런식으로 말했을 때, 과연 그 지휘자들이라고 좋게좋게 넘어갔을까? 프리안테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건지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대로 그렇게 대놓고 의견표출할 만큼 작업 분위기가 유했다는 반증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쿠렌치스가 프리안테와 실제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Break his bones a little bit이라고 해서 쿠렌치스가 진짜 프리안테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물론 190이 가뿐히 넘는 근육맨 쿠렌치스와 단둘이 있다면 충분히 물리적인 위협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프리안테를 즉석에서 짜른 것도 아니고, 너 앞으로 내 구역에서 음악 못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한 것도 아니다. 그가 프리안테에게 음악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말도 없다.

전체 리허설 중에 가수가 해석이 논센스라 참아줄수가 없다고 말하는 걸 들은 지휘자들을 인터뷰해보면 다들 어떻게 심경을 표현할지 궁금하다. 사람들은 지휘자가 어떻게 반응하길 기대하는 건가? "아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에 좀 실수가 있었죠. 그럴 수 있어요"라고 말해야 하나. 자신에게 전권이 주어진 오페라 녹음에서 리허설 도중에 저런 일이 생기면 어느 지휘자가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점에서 쿠렌치스의 성격이 독특한 건 인터뷰에서 이미지 관리 따위 안하고 (물론 반대로 동물의 왕 컨셉을 잡고 싶은 것도 있었겠지만) 자기 생각대로 이야기한 점이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일한다는 건 지휘자의 해석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암묵의 약속을 한 것이란 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아주 피곤해질 뿐이다. 같은 약속이 지휘자가 전권을 지닌 오페라 녹음에서는 성악가에게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난 지휘자가 함께하는 모든 단원들과 성악가들에게 사랑만 받는 인간이길 기대하지 않는다. 난 그가 훌륭한 음악을 만들기를 원한다. 쿠렌치스가 만드는 음반에선 모든 것이 쿠렌치스의 의도대로 설계되고 실행됐기를 바란다. 다른 녹음에 비해 엄청난 시간을 쓴다고 해도 유한할 수밖에 없는 리허설 시간을 온전히 쿠렌치스가 원하는 대로 진행한 결과를 듣고 싶다. 리허설을 방해한 가수를 얼마나 평화롭고 신사적으로 처리했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법적이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그 영상에 한글자막 입혀 페북에 공유한 장본인이라..... 그 영상을 올리고 나서 졸지에 난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 됐다.


출입구에서 기다리며 LP 아저씨와 이야기하면서 둘다 쿠렌치스가 관객에게 얼마나 친절한지 이야기했다. 클덕질 초창기에 지휘자 사인좀 받아보겠다고 열심히 쫓아다닌 적이 있는데, 다른 지휘자들에 비하면 쿠렌치스의 성격은 최고로 나이스한 편이다. 물론 팬을 대하는 태도와 실제 성격은 당연히 다르겠지만 내가 짧은 순간이나마 쿠렌치스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받은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그가 사람을 대할 때 신을 대하듯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곁다리로 빠져서 - 쿠렌치스로 힐링하고 나서 카우프만 후기를 다시 읽으니 내가 왜 그렇게 울적했을까 신기해서 우울했던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카우프만도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에게 정말 친절하고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했고, 카우프만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 난 우울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였는데!


뻘이야기 2.
공연 티켓 예매와 관련한 잡설

티켓을 예매하려고 SWR공홈을 이용했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된다는거다. 독일식 계좌이체만 가능하다고 해서 멘붕. 아직 1열 얼빠석이 남아있는 상황이라 어떻게든 사수하기 위해 용감하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 쪽에서 계좌 번호를 알려줄테니 그쪽으로 입금하면 된다고 하며 예매를 진행해줬다. 놀라운건 원래 가장 비싼 티켓도 50유로 대인데, 학생이라고 하니 할인해서 7유로라고 한다. 7유로 할인해주는게 아니라 할인해서 최종 금액이 7유로ㄷㄷㄷ 원래 독일 학생 티켓이 깡패라지만 공연 당일 땡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예매할 때부터 그냥 7유로라니ㅋㅋㅋㅋㅋ 

근데 문제는 해외 송금이었다. 해외 송금 수수료가 3만3천원이다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7유로는 9.9x 달러라 10달러 미만이라고 송금을 안 해주더라. 다시 또 메일 보내서 내가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10유로 보내도 되겠니 하고 그냥 10유로 보냈다. 독일에 사는 지인분께 부탁할까도 했는데 송금할 때 이름 문제도 있고 해서 그냥 내가 수수료 내고 송금했다. 코앞에서 쿠렌치스를 만원에 볼 수 있다는데 그깟 수수료 따위... 나중에 알고보니 이지티켓이라는 사이트에선 친절하게 같은 좌석들을 카드 결제로 학생할인까지 지원해주더라. 흑흑 내 수수료

이렇게 깔끔하게 해결된 것 같았지만 나의 게으름 때문에 공연 전에 심장쫄깃한 일이 있었다. 계좌 송금을 해놓고 확실하게 처리가 된건지 확인 메일을 보내본다는게 하루 이틀 늦어지고,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만약 그게 처리가 안 됐으면 (이미 매진이니) 난 망한거라는 생각에 메일 보내는걸 포기하게 됐다. 결국 공연 1시간 전까지 내 티켓이 정말 유효한 건지 확인을 못한 상황이었다. 공연장에 미리 가서 확인 받으려고 했는데, 1시간 전에 하는 곡설명회를 티켓검사 안하고 그냥 들여보내는 바람에 또 한번 기회를 놓쳤다. 공연 30분 전에 프리렉처가 끝나고 나와서 어셔를 찾아 티켓을 체크해달라고 했는데, 이게 또 핸드폰 화면에서 QR코드 인식이 잘 안되는 거다. 그 순간 머리 속에서 내가 슈투트가르트 까지 와서 공연장에 못들어가는 거 아닌가 라는 끔찍한 상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티켓 오피스가서 제대로 인쇄를 해오라고 하는데 티켓오피스는 10분째 줄이 하나도 안줄어들더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QR코드 깔끔하게 캡쳐해서 핸드폰을 다시 들이밀었다. 정말 다행히도 인식됐고, 내 티켓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공연 보기 전에 이렇게 쫄깃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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