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답은 독일이다.

위그노 교도 이후의 일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이왕 프랑스에 간 김에 프랑스 오페라 극장들을 좀 둘러볼까 했는데 마땅히 끌리는게 없고 거리도 그닥 가깝지도 않았다. 이럴 땐 뭐다? 역시 믿고 볼 수 있는건 독일 뿐이다.

처음엔 저번에 못간 쾰른, 본, 뒤셀도르프 쪽을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이 투란도트 정도로 좀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비스바덴은 여러모로 딱이었다. 일단 작품이 명가수다. 여기에 비스바덴 극장은 대구 오페라축제 때 로엔그린에서 가수들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지휘 역시 국립오페라단에서 훌륭한 트라비아타를 보여줬던 파트릭 랑에다. 랑에는 이 극장 게엠데로서 두번째 시즌을 맞았고 바그너를 중점적으로 올리고 있다. 여기에 비스바덴은 프랑스에서 가까운 편이니 다음 행선지로 적당했다.


공연 캐스팅을 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있었다. 일단 파트릭 랑에는 국오 트라비아타와 빈 슈타츠오퍼 헨젤과 그레텔 (0.5회로 칩시다) 을 본적이 있다. 베크메서 역의 토마스 드 브리스는 대구에서 텔라문트를 기가 막히게 불러서 기억하고 있다. 에파 역의 벳시 혼은 작년 라이프치히 아라벨라를 보았고 발터 역의 마르코 옌취 역시 발퀴레 1막 콘체르탄테와 대구 비스바덴 로엔그린으로 두번이나 봤다. 연출 베른트 모틀 역시 작년에 하노버 화란인을 상당히 재밌게 봐서 기억하고 있다.

처음 가보는 독일 극장인데 직접 본 사람이 벌써 다섯 명이나 된다. 괜히 뿌듯해졌다. “아 걔? 내가 언제언제 봤었지~” 아시아 끄트머리에 살면서 유럽 트렌드를 쫓아가려고 제가 이렇게 애쓰고 살았습니다.

하필 이번에 보는 오페라들이 죄다 길다. 정점은 역시 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가수. 공연들이 5시 아니면 6시에 시작하는 터라 제대로된 식사도 못 해보고 있다. 관광은 커녕 시간만 나면 무조건 낮잠이 우선이다. 다행히 공연 보면서 컨디션은 아주 괜찮았다.


비스바덴 극장이 예쁘다는 건 사진으로 보았지만 직접 보니 훌륭하다. 내부는 아담한 극장인데 외부는 아주 넓다. 출입구가 어느쪽으로 나있는 줄 몰라서 악기 메고 출근하는 단원들한테 입구를 물어봐서 들어왔다. 객석도 아름답지만 역시 메인 바가 있는 홀이 매우 아름답다.


흔한 헤센 주 극장의 내부.


프리미어라 학생할인도 안 되지만, 적당히 사이드로 앉으니 20유로 대에 표를 끊었다. 파리 오페라에서 이것보다 8배 정도 비싼 좌석에 앉았지만 이것보다 8배는 더 안들렸다.

끔찍한 바스티유에서 탈출하고 보니 모든게 아름다웠다. 극장의 사이즈는 적당했고 음향도 훌륭했다. 어제 위그노 교도는 죽어있던 무대를 보는 듯 했지만 오늘 무대는 생기가 흘러 넘쳤다. 바스티유에선 무대가 소리도 잡아먹고 가수의 존재감도 죽여버렸지만 비스바덴에서는 가수가 무대를 꽉 채우는 느낌이다.

첫 서곡은 새로운 음향에 적응이 잘 안됐다. 일단 소리가 잘 들리는 건 좋은데, 하필 금관이 오른쪽에 다 몰려있는 배치에 내가 왼쪽 사이드였으니 트럼펫과 트롬본의 소리가 직빵으로 날아들었다. 빈 슈타츠오퍼에서도 느꼈지만 파트릭 랑에가 고급진 사운드를 뽑아내는 지휘자는 아니다.



극장 앞에 서있는 분은 쉴러


이 프로덕션용 커튼 까지 제작했다



가수, 지휘자, 연출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먼저 연출에 대해 써보겠다. 베른트 모틀은 펠릭스 모틀의 손자인가 뭔가 여튼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저번 홀랜더 연출에서는 주제의식을 깔끔하게 잘 잡고 합창단 안무를 잘 구성했던 게 기억이 난다.

오늘 공연에서도 이런 면이 잘 드러났다. 일단 어제 끔찍했던 위그노 교도 같은 추상적인 스타일이 아니라 매우 사실적인 모습을 지향했다. 시대 배경은 현대로 무대는 나무톤이 잘 살아있는 술집이 되었다.

작품을 관통하는 컨셉은 노인정이었다. 마이스터들이 입장하는데, 포그너는 장님에 보행기를 들고 다니고 다른 마이스터들도 대부분 걷는 것 조차 제대로 못하는 노인들로 나온다. 그래서 이들이 얘기하고 있는걸 보면 정말 전형적인 “틀딱” 그 자체였다. 마이스터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을 때마다 주위에있는 젊은이들이 어르신 다칠까봐 안절부절 못하며 도와주는 게 깨알 포인트였다.

2막이 되면 컨셉이 한술 더뜬다. 알고보니 1막의 술집은 Alt Nürnberg라는 이름의 요양병원 같은 곳이었다. 술집에 있던 젊은이들은 요양병원의 간호원들인 셈이다. 그들이 입고있던 초록색 하트문양이 무엇인지 이때서야 제대로 밝혀진다.

3막 작스의 집 역시 병실이 된다. 전주곡이 흐를 때 작스는 오래전 사진들을 프로젝터로 살펴본다. 자신의 부인과 아이, 그리고 다비드와 구두 공방에서 찍은 사진, 구두 공방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폐업한 사진, 그리고 다비드와 막달레나가 술집(이자 병원일) Alt Nürnberg를 세운 사진들을 보여준다.

저렇게 마이스터들이 요양병원에 있는 퇴물들이라면, 작스가 신발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3막 초반부가 끝나기 전 연출가가 또 다시 해답을 줬다. 5중창을 부르기 위해 막달레나와 다비드가 입장하는 장면에서 막달레나가 에파를 위해 기성품 신발을 네 상자나 들고와 에파에게 알맞은 신발을 찾아준다. 에파가 작스에게 신발을 봐달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나이든 사람의 옛 추억에 맞춰주기 위한 것 뿐이었다. 짠내나는 포인트를 잘 아는 연출가다.

마지막 노래경연대회 역시 늙은 사람들을 위한 눈물 겨운 쇼다. 1년에 한번씩 병원 환자들을 위해 축제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예술을 사랑해서, 마이스티징어들을 존경해서 모이는 축제가 아니다. 그저 어르신들과 함께 놀아주기 위한 컨셉 놀이일 뿐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작스를 찬양하는 것도 살짝 비틀었다. 원래는 마이스터징어로서 작스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환영하는 노래를 하는 것이지만, 여기선 작스가 이 잔치를 위해 맥주를 큰통으로 기부했기 때문에 작스를 환영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마지막 짠내 포인트는 작스의 마지막 일장연설이다. 노래를 끝낸 발터와 에파는 작스가 말리려는 순간 이미 오토바이 헬멧을 챙겨서 술집을 나가버린다. 작스는 술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젊은이들에게 마이스터의 예술을 존중해달라고 노래하지만 아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처음엔 노인층 많은 오페라 극장에서 이런 연출 해도 괜찮은건가 했는데, 마지막에 작스가 젊은 사람들에게 예술에 대한 관심을 애걸하는 모습은 오페라 팬으로서 누구나 가슴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늙어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저 내가 젊은 관객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마지막 합창에서는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들 일어나 빨간색과 하얀색의 깃발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대 속 무대의 자막에는 Deutsch Meister라는 글자가 점멸한다. 그 모습에 오히려 마이스터들이 당황해 하며 끝난다. 공연을 볼때는 그 빨간색 + 하얀색 깃발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찾아보니 헤센주 주깃발 색과 똑같다. 예술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전체주의로 빠지는 모습을 희화화 한걸까.




캐스팅 중에 가장 놀라운 가수는 마르코 옌취였다. 옌취가 한국에 왔을 때는 두번 다 실망스러워 이번에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게 조르당에게 실망했던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조르당은 나와 취향이 안 맞는거구나였다면, 옌취는 그냥 실력이 부족한 가수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발터는 포기하고 들어야하나라는 심정이었는데 이게 웬걸.

야구로 치면 긁히는 날이라고 해야하나. 방어율 7,8 점대 투수가 선발이라 에효 오늘은 또 얼마나 먹히려나 하고 봤더니 완봉승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1막에서부터 도대체 막히는 곳이 없었다. 고음을 지르면 고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막힘이 없었다. 2막에서 에파에게 마이스터들에 대해 불평하는 부분에서는 얼마나 또 연기나 표현이 좋던지. 그냥 노래가 깔끔하게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가사를 마음대로 완급조절을 해가며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엇다. 부르는 대로 노래가 술술 나왔다. 물론 옌취 특유의 가벼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오늘 노래는 분명히 하나의 스타일로서 최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3막에서의 노래는 화룡정점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없이 믿고 들을 수 있었다. 프레이징은 아름다웠고 딕션도 섬세했다. 미성의 헬덴테너이지만 포그트보다는 좀더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어 듣는 맛이 달랐다. 노래를 짓는 장면이나 노래경연대회나 호소력 있느 노래를 들려줬다.


작스 역을 맡은 올리퍼 츠바크는 1막 무난, 2막에선 살짝 아쉽나 했는데 3막에서 훌륭한 노래를 들려줬다. 반!에서부터 확실히 폼이 잡힌 모습을 보여줬다. 오케스트라 반주와 함께 긴 호흡을 뽑아내는 데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전형적인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 목소리에 정석적인 노래였다.

베크메서역의 토마스 드 브리스는 이번에도 엄청난 성량을 자랑했다. 목에다 앰프를 설치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 작스의 성량도 작지 않았는데 베크메서는 그냥 성량의 수준이 달랐다. 진짜 노래 시작하면 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여기에 어둡고 낮은 목소리도 악역을 맡기에 적당했다. 하지만 신이 모든 걸 주진 않은 듯 아쉬운 점도 있었다. 너무 장군 포스로 노래를해서 베크메서의 영악하거나 간교한 느낌은 부족했다. 직접 본 가수 중에 성량 큰걸로는 네트렙코가 최고였던 것 같은데 드 브리스는 네트렙코와 붙어도 해볼만 할 것 같다. 훌륭한 가수이지만 베크메서를 부르기에는 뭔가 아쉽다.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하기에는 베크메서가 적당하지 않고 반대로 베크메서에게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춘 건 아니었다. 그래도 2막 세레나데를 그렇게 빠른템포와 우렁찬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정말 흔치 않을 테다. 이 장면을 고스족 젊은이들의 락 콘서트 처럼 만들어버린 연출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에파 역의 벳시 혼은 목소리가 풍성한 스타일이 아니라는 아쉬움을 빼면 무난했다. 아라벨라 때 상당히 괜찮았던 걸 생각하면 무난해서 아쉬운 수준. 그래도 연기는 탁월했다.

다비드 역은 목소리가 조금 특이했는데, 1막 설명충 부분에서 고음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런 실수를 빼고서라도 비브라토가 많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막달레나는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포그너 역의 베이스는 한국인 가수 박영두 씨였는데 상당히 훌륭했다. 이외에 프리츠 코츠너가 쓸데없이 노래를 잘해서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감동받았다.

랑에의 지휘는 독특했다. 일단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향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템포변화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중요한 모티프가 나올 때 의도적으로 빈 공간을 만들어내 분리시키며 강조했다. 사운드 역시 입자감이 있었다. 현악기의 통통 튀는 리듬이 곧잘 들렸고 부드러운 액센트보다 꼬집는 걸 좋아했다. 야경꾼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오케스트라가 폭발하는 모습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역동적인 반주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보였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도 상당히 훌륭했다. 1막 전주곡에서 밸런스가 조금 아쉬웠지만 그건 트럼펫 트롬본 소리가 정면으로 들리는 자리 탓이 컸을 테다. 현악기 수석들의 솔로도 좋았고 현과 목관의 조화도 합격점이었다. 3막에서 바이올린이 빠른 16분음표 스케일을 하면서 액센트를 중간중간 넣을 때에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깔끔하게 해내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날의 주역으로 빼놓을 수 없는건 바로 합창단이었다. 2막 피날레는 완전히 개판이 나긴 했는데, 이게 합창단 소리가 너무 커서 현악기가 정말 하나도 안들렸다. 그나마 튜바가 모티프를 연주해야 겨우 들리는 편이라 1분여간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3막에서는 완벽하게 제몫을 해냈다. 무대를 가득 채운 합창단이 여러 조합의 노래를 서로 교체 없이 쭉 이어서 다 불렀다. 이때 모틀의 역동적인 합창단 안무가 곁들여져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평소엔 그냥 쓸데 없는 파티 장면 쯤으로 생각했던 이 전환 장면이 이렇게 감격적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 다들 노래를 너무 찰지게 부르는데다가 표정까지 환희에 가득 차있었다. 그래 이런 거 들으려고 오페라 극장 오는거지.


다시 연출로 돌아오면, 작은 무대를 잘 활용해서 실내 오페라 같은 느낌을 주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합창단의 동선은 영리하고 효과적이었다. 단순하고 조금은 유치한 동작들이 음악과 맞아 떨어져 극에 생기를 불어넣고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여기에 작품에 포함된 여러가지 갈등을 늙음과 젊음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신선한 시각이었다. 발터는 젊은이들의 대변인이 되고 마이스터징어들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며 젊은 간병인들이 없이는 혼자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됐다. 얌전했던 간병인들이 저녁이 되자 가죽자켓을 입고나와 광란의 밤을 보낸다는 컨셉도 재치있었다.

물론 무리수가 아닐까 하는 부분들도 없진 않았다. 발터가 3막에서 노래를 처음 짓는 장면에서 시종일관 하얀 와이셔츠를 다림질 하면서 노래를 했다. 레이싱 드라이버처럼 입고 다니던 발터가 와이셔츠를 다리는 것은 노인들에 대한 존중이라 할 수 있다. 2막에서 대놓고 마이스터징어들을 조롱해 에파의 마음까지 상하게 했지만 3막 시작에선 에파의 종용에 못이겨 작스의 병실에 들어오며 이들을 최소한 이날 하루만큼은 존중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런 연출의 의도를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다림질하며 노래하는 가수를 보는 마음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다.

마지막 노래경연대회 장면에서는 한술 더뜨는데, 3절을 부르는 순간부터 아예 사람들 사이를 거닐고 사람들은 발터와 함께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는다. 노래에 대한 집중이 깨질수밖에 없는 장면이라 좀 불만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합창에서 합창단이 자연스레 발터를 둘러싸고 함께 노래를 하는 걸 보고 이걸 노린 연출이었구나 싶었다.



사실 극장 출입구는 쉴러가 서있는 곳이 아니라 그 반대편인 이쪽이다. 밤에 본 모습




요약.
극장 음향: 비스바덴 >>> 바스티유
극장 비주얼: 비스바덴 >>>>>> 바스티유
연출: 비스바덴 >>>> 바스티유
내 귀에 들리는 가수의 소리: 비스바덴 >> 바스티유
작품: 명가수 >>>>>>>>>>전세계 95%의 오페라 >>>>>>>>>>> 위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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