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토 베르디 시리즈로 나온 리골레토다.


이런 전집류에서 유명 타이틀에 거는 기대는 아무래도 작을 수 밖에 없다. 이미 상당한 양의 영상물이 나온 작품과 경쟁해야하니 말이다. 투토 베르디 시리즈의 라 트라비아타를 잠깐 먼저 본적이 있는데 훌륭한 편은 아니었다. 투토 베르디 살 사람이면 메인 작품은 다 결정반 하나씩 가지고 있을텐데 리골레토나 트라비아타가 좀 아쉽더라도 뭐 그게 큰일이란 말인가.


리골레토 영상을 그렇게 많이 본 편은 아니다. 루이지 지휘의 드레스덴 젬퍼오퍼, 마리오티 지휘의 메트, 로페즈-코보스 지휘의 리세우 극장, 그리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공연 정도인 것 같다. 담라우 팬이라서 젬퍼오퍼와 메트의 공연을 좋아하긴 하지만 타이틀 롤을 맡은 루치치가 많이 아쉽다. 리세우 공연은 이상하게 몰입도가 낮았던 걸로 기억한다. 오히려 제일 인상깊은 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이었다. 누치, 베찰라, 모숙이 나온 취리히 공연은 한참 전에 사놓고 여전히 안보고 있다.


파르마 극장의 공연은 캐스팅부터 화려하다. 우리시대의 리골레토 장인 레오 누치가 나오고 공작은 데무로가 맡고 질다는 마차이제가 맡았다. 이 정도면 나름 호화 캐스팅아닌가. 거기다 지휘는 마시모 자네티인데, 내가 빌바오에 가서 본 돈 카를로의 지휘를 맡았던 사람이다. 당시에 입체적이면서 오밀조밀한 반주에 감탄했었는데 이 공연에서도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데무로는 아주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테너다. 마르첼로 알바레스나 플로레스 처럼 너무 가볍지도 않고 베찰라 처럼 느끼하지도 않다. 무게감이 있지만 드라마티코가 가지고 있는 힘과는 다른 성질이다. 목소리가 공명으로 가득차있는 느낌이다. 찰지다고 해야할까. 이런 데무로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연기를 아주 못한다는 거다. 노래를 안하고 있을때 표정 관리나 자세는 나쁘지 않지만 노래에 집중할 때는 연기를 거의 잊어버리는 것 같다. 표정은 항상 일관되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경우도 별로 없다. 하지만 뭐 공작이잖아. 연기 좀 못한다고 별 문제 없다. 베찰라 처럼 눈썹 비브라토를 하면서 과장하는 것보단 진득하니 표정잡고 노래하는 게 더 낫긴 하다. 노래가 대체로 목소리 하나만 믿고 밀어붙이는 성격이긴 하다. 하지만 달콤한 목소리 하나는 독보적이다. 국립오페라단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내한했을 때 못본 것이 한이 될 정도다. 


마차이제 역시 좋은 가수다. 콜로라투라도 안정돼있고 프레이징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누치는 뭐 말할 필요가 없다. 표정 하나, 몸짓 하나가 이미 완성된 리골레토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발성을 뽐내며 완벽한 해석을 선보인다. 그 목소리는 요즘 어떤 바리톤도 쉽게 흉내내지 못할 소리다. 가사 하나하나가 살아서 강조된다. 루치치의 노래를 들을 때 항상 2% 아쉬웠는데, 사실 그 2%가 노래의 모든 것이라는 걸 누치가 보여준다. 누치는 무대 위에서 흔들리며 흐느끼고 오열한다. 


지휘 역시 언급한 대로 훌륭하다. 곳곳에서 적절한 아고긱과 뒤나믹으로 반주 음형을 강조한다거나, 가수가 쉬는 마디에서 반주를 갑작스레 키워 특별한 효과를 노린다든가 하는 부분이 많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폭력적인 음향도 서슴치 않으며 극을 시종일관 드라마틱하게 끌고 나간다. 3막 끝에서 트레몰로 역시 Tremo의 의미를 정말 잘 살려냈다 싶을 만큼 섬뜩한 음향을 만들어낸다. 


연출은 역시나 이탈리아 스타일이다. 전통적인 연출을 질색하는 나도 반해버릴 만큼 화려한 의상들이 등장한다. 1막에서 몬테로네의 딸을 등장시켜 리골레토가 직접적으로 모욕을 주는 장면을 추가한 것은 훌륭한 판단이다. 다만 3막 사중창에서 마달레나가 가사로는 튕기는 대목인데 너무 빨리 공작에게 마음을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2막의 가장 중요한 리골레토의 Cortigani, vil razza dannata 부분에서 합창단원들의 동선이 너무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카메라가 심한 클로즈업을 과도하게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 단점이긴 하다.



종합하면 단일 타이틀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공연이다. 누치의 압도적인 리골레토를 볼 수 있으며 여기에 데무로 역시 매력있는 가창을 선보인다. 마차이제의 질다 역시 부족하지 않으며 마시모 자네티의 지휘는 최고로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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