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노프스키의 오페라 로저 왕(Król Roger)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이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두 수장인 파파노와 홀텐이 처음으로 공동 작업을 한 공연이기도 하다.


현대 오페라를 한편 봐야겠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는데, 사실 로저 왕의 경우 1926년 초연으로 딱히 현대 오페라라고 하기도 어려운 작품이다. 1926년이면 투란도트가 초연된 해다. 시마노프스키의 경우 이름만 많이 듣고 실제로 작품을 접해본적은 없어서 그가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작곡가 쯤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같은 폴란드 작곡가인 루토스와프스키와 헷갈린 것 같다. Roger는 폴란드 어로 로게, 로게르 에 가깝게 발음되는 것 같다.


로저 왕은 12세기 비잔틴 제국의 영역이었던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총 3막 90분으로 짧은 오페라다. 주요 인물은 로저 왕과 그의 부인 록사나, 그리고 시칠리아에 갑작스레 나타난 목자Shepherd 세 명이다. 오페라는 비잔틴 풍의 종교 미사로 시작한다. 대주교가 왕에게 목자가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그를 처벌해달라고 한다. 목자를 왕 앞에 끌고오지만 목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신을 이야기한다. 록사나는 목자의 이야기와 그의 모습에 매혹된다. 로저는 처음에는 처형하려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 밤에 자신을 찾아오게 한다. 2막에서 목자는 로저와 만남에서 자신의 신에 대한 찬양으로 로저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그가 왕으로서 억누르고 있던 동물적인 감각과 본능을 일깨우려 한다. 로저는 그를 제지하려 하지만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이미 목자에게 마음을 빼았긴 뒤다. 목자는 록사나와 다른 추종자를 데리고 떠나버린다. 3막에서 로저는 목자를 쫓아간다. 목자는 디오니소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추종자들과 격렬한 제의를 치른다. 혼자 남겨진 로저는 일출과 함께 새로운 삶을 희망하게 된다.


20세기의 오페라 답게 상징적이며 인물의 심리를 파헤치는 오페라다. 앞서 보았던 글로리아나 비해서도 훨씬 추상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극 중에는 실제로 명확한 사건이 이어지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끊임 없이 이어진다. 특히 목자의 모든 역할은 행동이 아닌 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반대로 로저는 극 내내 끊임없이 흔들린다. 1막에서 목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도 결정을 두 번이나 바꾼다. 3막 까지도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모양새다.


극의 내용은 어찌보면 상당 부분 글로리아나와 비슷하다. 니체가 이야기 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 적인 것의 대립'의로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왕이 권력 관계와 개인으로서의 감정의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글로리아나와 로저 왕이 비슷한데, 로저 왕은 이 관계를 명확하게 니체의 비유로 설명한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임에도 흥미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연주와 연출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파파노와 홀텐은 역시 감탄할 만큼의 실력을 뽐내는데, 여기에 가수진들 역시 훌륭하다. 마리우스 크비첸은 오네긴이나 돈 조반니에서 썩 맘에 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이 곳에선 훌륭하다. 일단 본인이 폴란드 인이고, 폴란드 오페라를 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과 열성을 가지고 공연에 임했다고 한다. 홀텐이나 파파노 역시 폴란드 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수준은 아니니 크비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홀텐과 파파노의 코멘터리는 정말로 귀중한 자료다. 마치 영화 코멘터리 처럼 공연 영상의 별도 오디오 트랙에 수록되어있다. 공연 내내 홀텐과 파파노의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홀텐은 같은 시도를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도 선보였는데, 그 때도 정말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장치에 대해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텍스트와 음악의 설명까지 곁들인다. 자신의 연출을 이렇게 논리정연하고 확고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연출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특히 로저 왕 처럼 상당히 난해한 오페라의 경우에는 이런 해설이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홀텐은 목자와 록사나가 모두 로저 왕의 내면 한 부분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무대 위에 있는 거대한 두상은 몸은 없이 이성에만 치우친 모습, 즉 아폴론적인 것을 나타내고 2막에서 머리를 가린 무용수들은 이성이 없이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디오니소스 적인 것을 나타낸다. 2막에 나오는 춤곡은 로저 왕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것, 2막의 구조가 로저의 내면을 여러 층으로 구조화 한 것이라는 것 등 처음 보았을때 놓쳤던 점들을 깨닫게 도와준다. 홀텐과 파파노의 공동 해설이긴 하지만 대부분 홀텐이 이야기하고 파파노는 가끔 거들 뿐이다. 둘이 다른 오페라의 장면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1막에서 록사나가 목자를 두둔하는 장면은 마치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두둔하는 장면과 비슷하다거나, 2막의 무곡이 살로메의 일곱 베일의 춤과 유사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준다. 앞으로 홀텐은 물론 다른 연출가들도 이런 시도를 더 해줬으면 좋겠다. 물론 자막이 제공되지 않는데다 홀텐의 말이 속사포 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영어 듣기 시험을 보는 기분이긴 하다.


폴란드어로 된 오페라는 처음인데 체코어와 러시아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찾아보니 폴란드어와 체코어가 서슬라브어로 굉장히 비슷한 편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드보르자크와 야나체크 때문에 체코어를 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체코어만 배우면 폴란드어도 어느정도 해결되니 일석이조이려나. 마침 최근에 구입한 오페라 중에 폴란드 작곡가의 작품이 꽤 있다. 바인베르크의 승객 이라든가, 앙드레 차이코브스키의 베니스의 상인이라든가. 이중에 베니스의 상인은 영어 오페라이긴 하다. 생각해보니 모두 브레겐츠에서 상연한 오페라인데, 브레겐츠에서는 로저 왕 역시 상연하여 블루레이로 발매한 바 있다. 브레겐츠에 폴란드 커넥션이 있나?


음악 이야기를 빼놓았는데, 다른 작곡가 중에는 슈트라우스와 가장 비슷한 스타일이다. 로저 왕을 들어보기로 한 것도 트레일러에 나온 음악이 생각보다 굉장히 낭만적이었기 때문인데, 사실 작곡년도가 생각보다 훨씬 빠른 거였다. 1막의 종교적인 음악이라든지, 2,3막의 디오니소스 적 무곡이라든지 독특한 음악어법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겁고 두터운 후기 낭만의 어법을 활용한다.


후기 낭만 - 현대를 잇는 오페라로서 주목할만한 오페라고 해설 코멘터리 까지 달려있으니 이 작품의 귀중한 자료로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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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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